코로나 시대의 입원 경험
비대면 입원 생활, 외롭고 감사했어요
*지금도 수술 여파로 정신없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이라도 오늘의 기분과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두기 위해 씁니다!
작은 수술을 위해 1박 2일 간 짧은 입원을 했다. 이비인후과 수술이라 호흡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웬만하면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진 뒤 수술을 진행하고 싶었지만 수술을 미루기엔 처한 여건과 몸 컨디션이 적당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급하게 수술 날짜를 잡고, 검사 일주일 만에 입원 수속을 밟았다.
이비인후과 병원인 만큼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이야 코로나 이전에도 종종 마스크를 쓰고 계셨기 때문에 그 모습이 많이 어색하지는 않았는데, 복잡해진 병원 방문 절차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정문과 후문, 옆문까지 사방팔방 열려 있던 문들이 굳게 닫히고 지정된 문으로만 입, 퇴장이 가능했다. 한 줄로 서서 카메라 앱으로 병원에서 제공하는 QR 코드를 찍고 연결된 인터넷 사이트에서 문진표를 작성했다. 작성 완료 후 나타난 QR 코드를 다시 입구 앞 리더기에 찍고, 개인 정보 확인을 위한 체크인 코드를 또 한 번 리더기에 읽혔다. 동시에 체온을 확인하고, 입장 가능 여부가 확인된 뒤 왼쪽 어깨에 동그란 파란색 스티커를 붙였다. "오늘 돌아다니시는 동안 스티커 떼시면 안 돼요." 단호히 주의를 주시는 간호사 선생님께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드디어 병원 문을 열고 접수대 근처로 가 섰다.
내가 그나마 능숙하게 입장을 위한 여러 절차를 수행하는 동안, 어르신들은 입구에 서서 오래도록 휴대폰과 씨름을 하고 계셨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어르신 한 분 한 분께 QR 인증 방법에 대해 안내해 드렸지만 이게 뭔지 도통 모르겠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분도 많았다. 접수 순서를 기다리느라 잠시 대기하는 동안 휴대폰으로 QR 코드 인증 화면을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캡처했다. 가족 단체 채팅방에 한 번, 시어머니께 또 한 번 캡처한 사진들을 보내면서 미리 인증해놓으시면 좋을 것 같다고, 요새는 인증할 줄 모르면 병원에도 못 오겠다며 걱정의 말을 덧붙였다. 사실 엄마 아빠는 이미 알고 있고, 잘 쓰고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는데 시부모님이 걱정이었다. 시부모님은 우리 부모님보다 다섯 살, 여덟 살이 많으셨는데,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데도 기계에 적응하는 속도는 꽤 차이가 있었다. 같은 모델로 TV를 바꾸어 드려도 우리 부모님은 넷플릭스로 미드를 즐기실 때 시부모님은 리모컨 사용법을 몰라 케이블 방송만 보셨다고 했기에 더 마음이 쓰였다. 접수를 마칠 때 즈음 시어머니께 연락이 왔다. '엄마는 이거 할 줄 알아. 근데 더 늙은 분들은 뭔지 몰라서 카페도 못 들어오시더라.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지금까지는 문제없이 바깥 생활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쉽게 물러갈 생각이 없는 코로나 때문에 가속화될 일상생활의 변화에 시부모님이 잘 적응하실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인터넷 쇼핑도 복잡하다고 어려워하시며 남편을 시키는 분들인데, 이제는 정말 뭐든 휴대폰으로 인증하고 예약하는 시대가 될 텐데 그땐 정말로 괜찮으려나? 병원 입구 구석에서 QR 코드 인증과 씨름을 하고 계시는 어르신들, 기다림에 지쳐 길게 늘어선 줄 가운데서 기웃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맥도널드 등 패트스 푸드 매장에서 키오스크 사용법을 잘 몰라 난감해하며 뒷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시는 어르신들이 생각났다.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은 당연한데, 기다리지 못하고 비아냥 거리며 결국 어르신들을 키오스크 앞에서 물러나게 했던 사람들도 떠올랐다. 내가 더 나이 들었을 땐 무엇이 어려워질까. 나는 무엇으로부터 소외될까. 잘 와 닿지 않았던 디지털 소외 계층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구체화됐다. 일전에 읽었던 교육 격차에 대한 기사도 번뜩 머리를 스쳤다. 코로나로 원격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아이들 사이에도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는 기사였다. 인터넷 사용이 원활하지 않은 환경에서 수업을 듣는 데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나이 듦이 소외로 향하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 도처에 널린 소외를 피하기 위해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걷는 것이구나.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더 많은 소외를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또 언젠가 마주칠 소외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구나. 느닷없이 찾아온 무거운 결심들에 어깨가 무거웠다. 아닌가. 얼마 전 터치 몇 번으로 손쉽게 구입한 태블릿 때문이려나. 괜히 죄짓는 기분으로 수술을 위해 여러 검사를 받았다. 입원실과 수술실까지 총 6층 규모의 꽤 큰 병원 안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간호사 선생님들이 내 왼 어깨의 스티커를 꼼꼼히 확인했다. 나는 무사히 입장해서 병원 서비스를 받고 있고, 곧 입원실 침상에 누워 유튜브로 여러 정보를 접할 참이었다. 수술을 앞둬서 그런지 기분이 뚝뚝 떨어졌다.
코로나 여파로 보호자 동실은 물론 면회도 아예 불가했기 때문에 입원 수속부터 퇴원 절차까지 모두 혼자 해낼 수밖에 없었는데, 고작 만 하루의 입원이라고 해도 짐이 많아 은근히 번거로웠다. 병원은 내가 기억하던 코로나 이전보다는 훨씬 한산했지만 전염 예방을 위해 강화된 절차에 검사 소요 시간이 늘어났다. 짐을 이고 지고 여러 검사를 받은 뒤 두 시간 만에 입원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2인실을 예약했는데 만실이 아니기도 했고, 코로나 예방을 위해 겸사겸사 2인실에 환자를 1명씩만 배치해 주셨다. 잠을 편하게 자지 못할까 걱정했었는데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짐을 풀었다. 물컵과 수건, 칫솔을 먼저 꺼내 두고 태블릿과 휴대폰 충전을 위한 충전기도 꺼내서 꽂았다. 여러 간호사 선생님들이 들어오셔서 수술 절차에 대해 설명해 주시고 동의서에 사인을 받아가셨다. 혼자 있다고 심심할 틈은 없었지만 아무리 작은 수술이라도, 의지할 사람도 없이 수술장에 들어가야 한다니 좀 외로운 기분이었다. 긴 기다림으로 긴장은 오히려 풀려가고, 괜찮은 것 같았던 컨디션이 조금씩 나빠졌다. 물도 마시지 않는 완전 금식이 12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침상에 누웠다, 앉았다를 몇 번 반복하고 드디어 수술실로 향했다. 10년 전쯤 비중격 만곡증 수술을 하면서는 엄마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혼자였다. 내 코는 정말 말 그대로 평생 말썽이구나. 서른이 넘었지만 수술은 무서운 건 열 살 먹은 어린이나 다름없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강제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수술실 앞의 침상에 누웠다. 미리 항생제와 진통제 등의 주사를 맞고 잠시 대기하다가 수술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는데 마취에서 깨어났다. 목이 불편했지만 투정 부릴 곳이 없었다. 간호사 선생님들의 배려 아래 휴식을 취하다가 마취 기운이 좀 가시고 나서야 부축을 받으며 입원실로 돌아왔다. 입원실에서도 혹시 모를 전염을 대비해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했다. 수술한 곳에 마스크가 닿아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쓰고 누웠다. 병원의 모든 분들이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고생하시는데 나만 예외일 순 없고, 내가 평화와 안전을 깨는 주범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아픔도 꾹 참았다. 숨 쉬기 답답하고 간혹 목이 너무나 아팠지만 무통주사 버튼을 눌러가며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아픔이 조금 가시고 정신이 들었을 땐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휴대폰을 열어 걱정하고 있는 남편과 가족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수술은 잘 마쳤고, 지금은 병실에 누워 있어. 계속 잤어. 많이 아프진 않은데 기분이 이상해. 좀 외로워.
아침엔 굳이 굳이 병원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엄마에게 어차피 면회도 안 되는 거 따라오지도 말라고, 괜찮다고 만류하며 혼자 집을 나섰었다. 수술은 나 혼자서 하는 거고 아무도 도와줄 수도, 대신 아파줄 수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씩씩하게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었는데, 한나절 만에 기운이 다 빠져 백기를 흔들었다. 혼자는 외로웠다. 아프니까 더더욱. 원칙적으로 면회가 금지되어 간호사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계속 환자들을 확인하시고, 필요한 것은 다 챙겨 주셨지만 아프다고 칭얼거릴 상대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슬펐다. 조금 찡찡거리니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엔 아프다는 소리도 잘 안 하는 애가 찡찡거리니까 걱정돼 죽겠다며, 짧게라도 면회는 안 되냐고 묻는 엄마의 목소리에 마음이 조금 녹았다. 일부러 아기처럼 웅얼거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칭얼대고 나니 그제야 뭘 먹을 기운도 생겼다. 손도 대지 못했던 죽 뚜껑을 열어 몇 숟갈 입에 넣었다. 엄마 목소리가 반찬이네. 아프기도 아프고, 서럽기도 서러워 눈물을 찔끔 흘리며 밥을 먹었다.
뭘 좀 먹고 기운을 차리니 할 게 없었다. 가지고 온 태블릿을 열어 글을 좀 쓰려고 했지만 머리가 아파 잘 되질 않았다. 한참을 시도하다 깨끗하게 포기하고 주말 간 챙겨 보지 못해 밀린 드라마를 틀어놓고 늘어졌다. 할 것도 딱히 없는데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 아까 너무 많이 자서인가? 아님 입이 너무 말라서인가. 불편한 몸으로 뒹굴거리고, 간간히 찾아오는 통증에 무통주사 버튼을 누르기를 몇 번. 지루한 몇 시간이 가고 정말 자야 할 시간이 다 되었다. 못 본 드라마도 다 봤는데, 이제 뭘 해야 한담. 심심함에 남편과 가족들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다들 이미 잠들었는지 답은 오지 않았다. 시무룩해져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볼까 하는 차에 간호사 선생님께서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불이 켜져 있길래요. 뭐 필요한 건 없으세요? 물 더 갖다 드릴까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지가 너무 오래됐어요, 저랑 말동무 좀 해주세요. 외로움에 갑작스럽게 인싸(!)로 변할 뻔했지만 꾹 참고 물만 부탁드렸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하시는 맑은 목소리가 반가웠다.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가 출입할 수 없어 이전보다 훨씬 더 고생하시는 선생님들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굳이 이 시기에 수술을 받게 되어서 죄송해요,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물을 가져다 주신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더 필요한 것 없어요, 감사합니다, 연거푸 인사를 했다. 선생님이 편히 주무세요, 하시며 문을 닫고 나가시자 안정감이 찾아왔다. 누가 있긴 있구나. 아플 때 벨을 누르면 도와줄 분들이 계시는구나. 외로움이 조금 가라앉자 도망갔던 잠도 슬슬 제자리를 찾아오는 듯했다. 몸을 움직여 불을 끄고, 숨 쉬기 조금이라도 더 편한 자세를 찾아 몇 번 뒤척이며 누웠다. 중간중간 숨이 막혀 깼지만, 코 속을 메워놓은 솜을 갈고 다시 잠을 청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깊게 잠들었던 것 같다.
새벽 다섯 시, 항생제 주사를 놓아주러 오신 간호사 선생님의 방문으로 잠에서 깼다. 밤에 좀 어떠셨어요, 주무셨어요? 물으시는 목소리가 다정해서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몇 번이고 대답했다. 네네, 신경 써 주신 덕에 잘 잤어요. 주사를 놓고 병실 안을 둘러보신 선생님은 또 내 물병을 들고 밖으로 나가셨다. 새 물병을 들고 오신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도 여러 번 전했다. 평소에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잘하는 성격이지만 수술 다음날은 정말이지 모든 게 감사했다. 퇴실할 때 전해달라고 두고 가신 설문지에도 꼼꼼하게 후기를 적었다. 신경 써 주신 덕택에 생각보다 잘 자고 일어났습니다. 물을 자주 챙겨주신 덕에 목도 덜 말랐고요. 제가 한 번 비슷한 수술을 해봐서 아는데, 엄마도 없는 이번 입원이 엄마가 있을 때만큼 편했습니다. 물론 마지막 문장은, 서른한 살이라는 내 나이에 맞게 엄마 타령을 빼고, 적당히 고쳐 적었다.
돌아다니는 데 제한이 있는 줄로만 알았지, 별게 다 불편하구나 싶었던 코로나 시대의 입원 경험. 짧디 짧은 1박 2일이 이토록 외롭고 힘들었는데, 오랜 기간 혼자이실 환자분들의 고통은 어느 정도일지 감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요양원에 꽤 오래 계셨는데도 늘 정정하시다가, 코로나가 전 세계를 덮치고 자식들이 잘 찾아뵐 수 없게 되자 돌아가신 시외할머니도 생각이 났다. 질병도 질병이지만 힘든 일을 혼자 겪어낸다는 건 배로 고통스러운 일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개인을 더 개인화시키고 고립시키는 이 몹쓸 전염병이 얼른 사라져야 할 텐데. 고작 1박 2일의 입원 경험으로 오두방정을 떨며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가 얼른 개발되기를 기도해 본다. 내 코도 얼른 좀, 진통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아프지 않게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