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라고 모든 면이 다 좋을 순 없으니까요
두려움을 이기고 쓰는 일
나는 그녀를 직장 동료로 알게 됐다. 자진해서 옮긴 부서에 그녀가 있었다. 입사 때 배치되었던 부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긴 고민 끝에 부서 이동을 결심했으므로 걱정도 기대도 컸는데, 업무적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되는 것이라 걱정이 많이 됐고 나이대가 비슷한 사원, 대리급 직원들이 다섯 쯤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회사-사회생활이라는 측면에서는 기대가 됐다. 전 부서에서 또래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즐거운 회사 생활을 했던 나는 부서 생활만큼은 즐겁겠다는 부푼 기대로 새 부서로 첫 출근을 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처음 온 내 자리를 제외하고도 온 부서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가까운 자리에 앉은 또래의 직원들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일도 좀처럼 없었고, 커피를 마시러 나갈 때도 둘셋으로, 혹은 혼자 카페로 향했다. 단순히 일은 일, 친목은 친목으로 나누어 생각하기 때문에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고, 뉴 페이스인 나는 '혹시 여기 무슨 일 있었어요?' 물어보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며 한 달 여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또래인 다섯 중 한 명이 부서를 옮기면서 그 기묘한 긴장감의 전말을 알게 됐다. 그녀. 그녀가 문제라고 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그녀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엄청나게 소극적인 사람. 이 정도의 짧은 문장이 내가 그녀를 본격적으로 겪기 전 그녀에 대해 생각했던 전부였다. 업무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못했으므로 내성적인가 보다, 회사 다닌다고 고생하시겠네, 정도의 생각으로 약 한 달을 지나 온 차였다. 하지만 그녀와 긴 시간을 보내온 사람들의 평가는 달랐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했다. 가진 능력이나 성품보다 잘 풀리는 그녀의 직장 생활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스트레스를 받아 회사를 다닐 수가 없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그녀의 뒷배경을 밝히며 험담을 했다. 자격지심이 있어서 그렇게 못되게 구는 거 아닐까 싶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엔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까지 있나, 좀 거북했다. 분명 좋지 않은 이야기였고, 그녀를 따돌리는 것 같기도 해서 이 대화에 끼어도 되는 건지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일부러 들은 이야기와 반대로도 생각해 봤다. 다들 그녀를 질투하고 있는 건가? 운이 좋아 좋은 부서로 발령을 받고 편한 일을 하고 있는 그녀를? 바쁜 와중에도 책을 내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그녀가 부러운 건 아닐까?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소개하며 작가라 이름 붙였다. 그녀는 독립출판으로 한두 권의 책을 낸 작가였는데 (이 글은 그녀가 누구인지를 은근슬쩍 밝히고, 그녀를 욕보이고 싶어 쓰는 글이 절대 아니기에 그녀가 노출되지 않게 약간 비튼, 아주 간략한 정보만을 적는다. 그녀를 직접 겪어내지 않은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절대 알 수 없었으면 하기에), 꽤 사람 좋아 보이는 글을 쓰고 있었다. 많은 작가들처럼 사랑을 쓰고, 이해를 펴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여러 모습이 있고, 작가는 그런 다양한 면 중에서도 자신의 가장 좋은 면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니, 그녀의 글 역시 참 다정했다. 내가 마주한 실상과 그녀가 쓴 글 사이에 꽤 큰 간극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포인트였다.
그녀는 회사의 계약직 직원들을 무시했다. 당시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계약직, 혹은 파견직 직원분들은 말이 계약직일 뿐이지 어마어마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설령 스펙이 좋지 않더라도 그녀에게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됐지만 그녀보다 능력이 부족하고, 갖춘 것이 없기에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설명을 꼭 덧붙이고 싶다. 부서의 주 업무가 되지 않는 번역, 디자인 등의 일을 맡아서 해주시는 계약직 직원분들은 각자 맡은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영어든 중국어든 디자인이든, 뭐가 됐든 자기 분야에서만큼은 대부분 경영학과나 공대를 나온 나와 그녀를 포함한 다른 직원들보다 월등히 훌륭했다. 일반 직원들끼리도 각자가 맡은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수행해가며 업무를 굴리는 것처럼 계약직 직원분들과 정규직 직원들 사이의 관계도 다를 것 없이 꼭 같았다. 적어도 내가 느낄 땐 그랬다. 우리가 직접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있는 거였고, 그 도움을 받지 않으면 업무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자신이 그분들을 부리듯이 행동했다. 나는 정규직이고, 너는 내 일을 도우라고 채용되었으니 무조건 내 말을 들어야 하며 일을 하는 동안 내 편의대로 진행하는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나는 절대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형적인 갑의 마인드였다. 나는 좀 놀랐다. 이전 부서에서는 계약직/파견직 직원분들뿐 아니라 하루 4시간만 근무하시는 나이가 많으신 시간제 직원분들까지 서로 챙겨가며 일을 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 부서의 모든 인원이 그랬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상사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무리한 부탁을 해야 할 때는 미안해했고, 내 실수로 여러 번 일을 다시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사과의 의미로 커피라도 사는 식이었다. 사적으로도 꽤 친밀했다. 일상을 공유하고 생일을 챙겼다. 같은 부서에서 일을 하며 서로 존중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왔고, 새로 옮긴 부서의 많은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인 듯 보였는데 그녀만큼은 예외였다. 제삼자인 내가 봐도 충분히 느껴지는 그 무시가 시리고, 뼈 아팠다.
그녀의 안하무인인 태도는 회사 외부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언젠가 한 번 그녀와 함께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사업장으로 출장을 가게 됐다. 그녀는 택시가 도착하자마자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고, 나는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뒷자리에 탑승했다.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님이 앞 좌석에 앉은 그녀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기 시작하셨는데, 그녀는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까지 가시네요, 거기도 사업장이 있습니까, 혹시 몇 시까지 도착하셔야 하는지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기사님이 슬쩍 옆을 쳐다보았지만,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내가 다 민망할 참이었다. 나는 얼른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끼어들어 기사님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가끔 불편한 소재를 꺼내시는 기사님들도 있지만, 우리가 탄 택시의 기사님은 맹세코 조금이라도 서로가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약 30분의 운행 시간 동안 내가 기사님과 여기는 저도 처음이에요, 기사님 돌아가실 땐 어떻게 하시나요,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그녀는 내내 휴대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했다. 택시에서 내리면서도 '영수증 같이 주세요'라는 말 외엔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그녀의 태도는 차가웠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같은 부서에서 일을 하며 업무로 부딪힐 일이야 많으니 그거야 그렇다 치고, 업무 능력이야 천차만별이니 또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는 인간적으로 참 별로인 사람이었다. 결코 그래선 안될 대상들에 대한 은근한 무시와, 어떤 실수에도 절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태도 같은 것들에 그녀와 엮여야 할 때면 속이 답답했다. 다른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평가들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동시에 내내, 따듯한 문장으로 서평을 남기고 좋아하는 유명 작가들에 대해 수줍은 고백을 써내는 에세이 작가였다. 피할 수 없이 그런 글들을 마주해야 했던 나는 아주 찜찜했다.
그녀는 내가 처음 만난 작가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단점이 있고 실수와 모순을 빚으며 살아간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내가 좋아했던 작가들도 어쩌면 그녀와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현듯 외로워졌다. 깊은 사유와 따스한 위로의 글을 쓴 그 모든 작가들에게도 이면이 있겠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직접 그와 마주하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감동받았던 그 모든 것들이 다 거짓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지가 좋았던 연예인들이 사고를 쳤을 때, 청렴한 줄 알았던 정치인의 비리를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배신감보다 훨씬 잔잔하면서도 아린 아픔이었다. 아무리 좋은 에세이를 쓴 작가라도 그의 일상과 삶의 어떤 면면에서는 그가 참 못난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걸 깨달은 순간, 좋은 글을 쓴 작가는 분명 따스한 사람일 거라는 나의 맹목적인 믿음에 슬슬 금이 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같은 감정을 느낄 것 같아 무섭기도 했다.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그 어떤 일보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한 신뢰를 깨버렸다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나의 단점이, 나의 부족한 점이 언젠가 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글에 담긴 진심마저 의심하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며칠 글을 쓰지 못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한 신뢰에 실금이 가고 나니 나 자신에 대한 신뢰는 아주 쩍쩍 갈라져 깨졌다. 어쩌면 내게도 단순히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로는 덮어줄 수 없는 아주 못난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고, 그런 의심 속에서 애써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으며 내 속의 이야기를 하는 건 아주 오만한 일인지도 몰랐다. 계속 이렇게 글을 써내는 건 타인이 내 과오를 파헤치기 쉽도록 내 안의 숨겨진 것들을 늘어놓는 짓 밖엔 되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했다. 두려웠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작가가 되어 아무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욕심과, 내가 신이 아닌 이상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실망시킬 수밖에 없다는 예고된 실패 사이에서 오래도록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앞서 걷고 있는 많은 작가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으리라. 내가 글을 쓸 만큼 괜찮은 사람인지, 정말 좋은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더 나은 나를 위해 글을 써나갔을 것이다. 언젠가 작가로서 펴낸 글과 나라는 인간 사이의 괴리가 누군가를 실망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나은 사람'으로 가는 길을 묵묵히 걸었을 것이다. 쓰지 않으면 소모되는 마음을 채우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쓰며, 쓰는 행위를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하루하루를 묵묵히 채웠을 것이다. 그녀도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좋아한다고,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고백한 많은 작가들의 책을 나도 읽었다. 그들은 분명 사랑과 용인과 위로를 노래했다. 그녀는 그녀가 읽은 수많은 글들 속에서 이미 발견했으나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 아니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이내 찾아낼 깨달음들을 삶 속에 심어 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다. 완벽하지 못한 나를 인정하고, 배움을 위해 읽은 것들이 내 삶의 태도를 더 곱고 아름답게 바꿔놓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테다. 그리고 내가 겪어나갈 예정된 실패와 가까스로 얻은 성공들에 대해 쓸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고 잘못된 신념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나갈 것이다. 누군가 나와 내 글 사이에서 발견한 괴리를 지적하고, 네 본모습은 겨우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 또한 용기 있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건 연예인이든,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작가든, 가진 직업과 상관없이 모두가 같다. 내가 완벽하지 않은 존재인 것처럼 타인도 나를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자 마음에 일었던 풍랑이 잦아들었다. 인생에 대한 내 태도를 바꾸어 놓은 많은 작가들도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꿋꿋이 걷고 있을 테다. 나도 그들을 따라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매일 나아지는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읽고 쓰는 수 밖에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