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에세이 쓰기의 모든 것

일상에세이 강좌 글로 풀기

by 이남희

1. 에세이는 일기와 어떻게 다른가?


산문이란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그중 수필은 외형적 제약 없이 자유롭게 쓰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겪은 경험이나 자기 생각을 그냥 쓰면 된다. 이렇게 정의되고 있는 탓인지 그냥 마음을 풀어놓고 쓰는 일기와 에세이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아가 수필을 써서 공모전에 냈더니 수필은 일기가 아닙니다, 란 평을 받았다는 고민도 듣는다.

그래서 나는 강의 초기에 칠판에 큼직하게 적는다.

narrative

gossip

두 말 다 ‘이야기하기’라는 뜻이다. 우리말로 바꾼다면 narrative는 서사(敍事 :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는 일), gossip은 한담(閑談 : 한가하게 주고받는 이야기,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정도가 될 것이다.

‘이야기하기’가 뼈대가 되는 글을 놓고 합평할 때 흔히 narrative가 잘 됐다든지 흥미롭다든지 하고 말한다. 예전에 story가 어떻다고 평하는 것보다 조금 더 전문적이고 트렌디하게 들린다. gossip은 뒷담화, 쓸데없는 내용이라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인지 이 단어를 발음할 땐 괜히 겸연쩍은 표정들이 된다.

그러나 gossip인들 아무 소용없이 존재할 리가 없다. 우리는 같은 그룹에 속해있다고 느끼고 싶을 때, 나아가 상대와 친해지고 싶을 때 gossip을 이용한다. 살면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람과는, 악수를 거절한 사람을 상대할 때처럼 어색하다. 우리는 상대와 가까워지고 싶어, 내가 무장해체 상태라는 걸 알리고 싶어 아무 말이나 늘어놓게 된다. 젊었을 때 나는 ‘오늘 날씨가 좋네요’라는 인사를 서로 주고받는 게 어이가 없었었다. 장님이 아닌 다음에야 날씨가 어떤지 다들 아는데 왜 굳이 말로 떠들어야 하지? 이런 걸 요즘은 small talk이라 하고 이게 잘 안되는 성향은 결함으로 여기게 되었다.

아무튼 어떤 ‘이야기하기’는 narrative이고 어떤 ‘이야기하기’는 gossip인가?

내 글은 narrative이고 남의 글은 gossip인가요? 웃음이 터진다.

두 단어의 경계는 읽은이의 독후감에 달려있다. 그 글을 읽은 뒤 의미가 있다고 느끼느냐 아니냐 이다. 읽고난 뒤 그 글이 의미가 있었다고 느끼면 narrative라고 하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이야기라고 느끼면 gossip이라고 하게 된다.

인간은 의미가 있다고 느껴야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다. 공부할 때 목록이나 연대표 같은 걸 외우려고 해도 머릿속에 잘 입력되지 않는 것도 거기에 의미를 붙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같은 걸 보고난 뒤 별 의미없는 이야기였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시간낭비를 했다고 씁쓸해하거나, 심지어 화를 내기까지 하는 것이다.

한때 우리 사회에선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열풍이 새삼스레 분 적이 있었다. 오래전 내가 대학에 진학할 때 인문계열을 지원하겠다고 하면 어른들은 ‘거기서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하며 말렸었다. 사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2천년대에 들어서자 갑자기 인문학은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많은 이들이 설득되었었다. 나도 거기에 휩쓸려 그 난해하다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을 사고 독서토론을 기웃대기도 했었다. 그런데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데? 하고 물으면 산뜻하게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모르면 불안해진다. 내 경우 여행을 가면 처음 2,3일 정도는 화장실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 몸이 낯선 환경에 놓여졌다고 느껴 본능적으로 긴장해버리기 때문이다. 몸이 그렇듯 정신도 자신이 모르는 세상에 놓여있다고 느끼면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인문학은 자신이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알게 해준다.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등등에 대한 학문은 이 사회가 작동하고 있는 원리를 이해하려는 노력들이다.

굳이 따로 공부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사는 세상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은 괴테 시대(18세기)까지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그 시대에는 5살에 협주곡을 쓰고 따로 공부하지 않았어도 색채학을 쓰고 전공하지 않는 철학, 교육론을 집필하는 천재들이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시대는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알 만큼 단순했던 것이리라. 예를 들면 호미 같은 도구들이 고장 나면 손수 고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든 지금 내 주변을 둘러보면 그 작동방식을 내가 알고있는 도구들은 거의 없다. 고장이 나면 A/S기사를 불러 수리하거나 내버려야 하는 것들 뿐이다. 이렇게 세상은 복잡도를 증기해온 것이다.

이 세상이 어떤 원칙으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별도로 공부를 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모르는 낯선 세상에 내던져져 있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이 불안의 시작이다.

인문학이 자신이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를 논리, 이성의 수준에서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이라면 문학예술의 ‘이야기’는 가슴으로 느껴 이해하도록 해준다. 즉 21세기 한국이란 사회에서 나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가슴으로 알게 해주는 것이다.

팡세로 유명한 파스칼은 ‘심장의 논리’라는 말을 썼다. 살아가다 보면 이성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것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는 가슴으로 느끼고 체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심장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문학예술의 ‘이야기’에 기대하는 것이다.

일기나 수기가 아닌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서 글쓴이가 생각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주제를 작가의 인생관, 세계관이라고 한다.

자신이 사랑하던 개가 죽었다는 사연을 써오는 이도 있었다. 낭독하자(글을 잘 쓰려면 남들 앞에서 자기 글을 소리 내어 읽는 일은 꼭 필요하다) 이건 수필은 아닌 것 같다는 반응이 나왔다. 인간이 아닌 개가 소재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개든 햄스터든 그 이야기의 핵심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란 물음에서 비껴가서 그렇다.

유행했던 샹송 제목처럼 ‘이것이 인생이다(c′est la vie)’ 라는 의미가 느껴져야 한다.

문학예술의 ‘이야기하기’란 읽는이로 하여금 당대의 삶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걸 핵심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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