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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eniemo Jun 19. 2020

"괜찮지가 않았습니다."

서비스의 시작(1)

작년 12월, 오랜 지인의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만나자 하셨다.


“회사에서 정리하라고 하네. 그리 되었네.”

하고 싶은 말씀이 많아 보였지만, 이유를 여쭈지는 않았다.


“그래도 법인카드도 당분간은 그대로 쓰라고 하고… 차도 그냥 타도 되겠어. 2년 정도 회사에서 고문 월급이 나오니까 다음 일을 찾아봐야지. 아무거나 할 수는 없고…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회사만 다녀서…”


모든 직장인의 꽃, 1%의 성공을 위해 달려온 대기업 부사장님이 퇴직을 앞두고 내게 털어놓는 속내는 무거웠다.


“소주 한잔을 앞에 두고 오랜 친구가 괜찮으냐 묻더군요.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괜찮지가 않았습니다.”


그 만남이 새로운 서비스를 구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성과를 얻은 1% 경영진들은 퇴직과 은퇴 후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서비스 준비 초기에 열 분의 전직 경영진들을 찾아뵈었다. 대부분 속내를 이야기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의 안부, 성공했던 흥미진진한 일들, 원망과 분노, 관계, 회사를 나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지금 내 마음'을 꺼내셨다. 지금까지 타인에게 마음을 꺼내 보일 기회가 없었다고 하셨다. 


한 분은 “내 이야기를 먼저 좀 해도 될까요?”라고 물으셨다.

“네, 물론이에요.”

두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내가 홈쇼핑에서 유럽 15박 여행을 예약했다는데... 모르는 사람들과 가는 것이 좀 부담이 됩니다. 심리적으로도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요.” – S그룹 김OO 전무


“퇴직하니 편하게 연락할 곳이 없어요. 이전 회사에 연락하면 후배들에게 혹시 부담이 될까 봐 안 하게 됩니다. 평생 한 직장에만 있어서 그게 참 서운해요.” – A그룹 최OO 상무


“사실, 좋은 회사에서 인정받았고 이만큼 이루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많이 울적하고…

어디에 털어놓을 곳이 없습니다.” – H그룹 변OO 부사장


“회사의 예우도 있고 바로 전직할 이유는 없어요. 하지만, 갑자기 명함이 없어지니 외부 활동에 큰 제약을 느낍니다. 모임은 물론, 결혼식, 장례식에도 못 가겠습니다.” – L그룹 이OO 전무


“그간 비서가 스케줄 관리를 다 해줘서, 혼자 뭘 해 본 적이 없었어요. 정기 뉴스레터도 끊어져서 이제는 어디서 정보를 찾아봐야 할지 난감합니다.” – H그룹 이OO 부사장


“회사에서 마련해 준 사무실이 있지만, 예전 상사가 사장으로 퇴직하셔서 이제와 또 후배 역할을 해야 하나 싶습니다. 전직자 모임에는 당분간 가고 싶지 않습니다.– D그룹 정OO 전무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뭐 하고 싶으세요?”

임원을 대상으로 한 ‘퇴직 이후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서 ‘계획 없다(25%)’, ‘재취업(30%)’, ‘자영업 및 창업(29%)’, ‘귀농/귀촌(8%)’, ‘기타(8%)’의 응답이 나왔다*. 재취업과 자영업/창업에 대한 성공 여부를 생각한다면,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갖고 퇴직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결론이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임원 퇴직이 비자발적이라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현직에서부터 퇴직을 구상할 기회는 많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퇴직을 위해 필요한 것이 돈, 투자 기회, 부동산뿐일까?


모든 이별은 아프다. 몇 달을 사귄 연인 사이에서도, 관계가 나빠진 사업 파트너와의 이별에도 치열하게 잠을 뒤척이는 기간이 있다. 마음을 다독여 다음을 모색할 시간이 필요하다. 하물며 30년 넘는 시간 동안  정체성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해 온 회사와의 관계가 끊어졌다면, 우선 그 이별의 마음부터 챙겨야 하지 않을까.


‘모든 이별에는 애도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것도 충분히 괜찮아질 만큼의 시간 동안,

다음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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