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eniemo Jun 22. 2020

‘임원들의 퇴직’, 그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서비스의 시작(2)

“별 다는 거… 모든 직장인들의 꿈이잖아. 그 꿈을 이룬 대한민국 1%인데, 무슨 걱정들이 있으시겠어? 노후 준비도 모두 끝나신 분들 아닌가? 평범한 99%의 마음을 아시려나…”


서비스를 준비하면서 만난 ‘대기업 임원들’ 중에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본인이 원하는 삶보다 타인의 기대로 살아온 분들이 많았다. 부모님의 기대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성공의 길을 혼신의 힘을 다해 이루어 낸 분들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보다 부모님, 가족, 사회가 원하는 일에 스스로를 맞춰 살아왔다고 이야기한다. 그 과정이 녹록했을 리 없지만, 소위 ‘대한민국 50~60대 성공한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은 타인에게 속마음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안겼다. ‘임시직원’이라서 임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당사자들에게는 절절한 현실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내일’은 미지이므로, 언제 그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지는 본인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12월이면 인사팀 전화는 받지 않으려고 도망 다닙니다.”
“임원인 친구들에게는 12월에 연락하지 않아요. 결정되면 연락이… 옵니다.”


씁쓸한 웃음을 더하는 진실이다.




구자복, 정태연 연구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기업 임원들 비자발적 퇴직 이후 단계별로 급격한 심리적 변화를 경험한다. ‘본 연구는 Williams(2009)의 욕구위협모델을 근거로 사회적 배제 상황에 직면한 개인의 심리를 단계별로 설명하고 있는데, 1단계 즉각적 단계에서 퇴직 직후 ‘인지적 공황’과 ‘정서적 공황’을 강하게 경험한다고 한다. 이에는 퇴직 통보라는 예기치 못한 충격적 경험으로 인해 사고의 마비를 가장 먼저 경험했으며, 그다음 나타나는 부정적 정서를 인지적으로 억압하여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2단계 숙고적 단계에서 퇴직자들은 ‘과거 자신이 가장 잘 나가던 모습으로 완전한 복원’을 꿈꾸지만, 이런 기대가 좌절되는 상황에서 ‘비현실적 사고’, ‘자기기만’과 ‘책임전가’로 인해 현실에 더욱 부적응하게 되었다. 마지막 체념 단계에서, 장기간의 욕구 충족 실패는 그들에게 패배감과 무력감을 경험하게 했다.’


구자복, 정태연, [대기업 임원들이 비자발적 퇴직 이후 겪는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질적 연구 (2019)]에서 발췌 (한국심리학회지: 문화 및 사회 문제 Korean Journal of Culture and Social Issues 2019, Vol. 25, No. 4, 249∼277)



본 연구는 15인의 비자발적 대기업 임원 퇴직자를 대상으로 수행한 질적 연구이지만, 서비스 준비 과정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의하면 심리적 단계에 따른 회복 기간이 상이할 뿐 자발적 퇴직자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사회적 역할 단절과 공적 기대의 부재로부터 생기는 상실감은 조직 내 직급이 높을수록 컸으며, 이런 현상은 기업 임원뿐만 아니라, 공공기관, 국가기관 등의 상위 직급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개인의 성격, 성향 및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단계별로 거치는 기간이 상이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회복할 때까지 대개는 1년 이상, 길게는 몇 년 이상의 기간을 거치기도 한다.


1단계 즉각적 단계는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므로 필수 불가결하게 거쳐야 하는 단계로 보이지만, 숙고적 단계와 체념적 단계는 개인의 성격, 취향 및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따라 새로운 환경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이 부분이 새로운 서비스의 필요성을 인지한 지점이다.) 더군다나 이어질 서비스의 시작(3)에서 다룰 내용이지만, 2단계 숙고적 단계의 ‘과거 모습으로의 완전한 복원’은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고용 구조 상에서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경쟁사 및 동등 기업의 유사한 포지션으로 이직을 목표로 두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목표 달성 실패는 3단계에서 좌절 기간이 길어지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 단계에 오면, 인생에서의 새로운 방향을 만드는 것에 소극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퇴직/은퇴 임원들이 가정에서 지내는 비율이 생각보다 높고, 이로 인해 가족들과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방향


서비스의 시작(1)에서 제시된 인터뷰 일부가 퇴직 후 심경에 관한 내용이었다면, 아래에는 퇴직 직후 임원들의 내재화된 니즈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맥락을 자세히 보면, 퇴직이라는 큰 변화를 겪은 후의 니즈 크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인터뷰 내용을 보자.


“일단, 당분간은 조금 쉬어야죠. 그동안 고생한 가족들과도 시간을 보내고요.  편안하게 눈치 보지 않고 갈 수 있는 여행도 좋고, 좀 오래 한 곳에서 지내보고도 싶습니다.” – 퇴직 직후


“솔직이 퇴직한 후 집에 있기가 힘듭니다. 새벽부터 꽉 짜인 일정으로 바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갑자기 나갈 곳이 없어진 거예요. 그동안 회사 일만 생각하느라 아내나 자식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고요. 허무합니다.– 퇴직 후 6 개월


“이번에 같이 퇴직한 계열사 동료 몇 명과 강남에 오피스텔 하나 계약했습니다. 근데, 할 일이 뚜렷하게 있지는 않아요. 우리끼리 만나 책을 읽거나 한잔하고… 집 밖을 나가는 게 익숙하니까.” – 퇴직 후 1년


“회사에서는 비서가, 집에서는 와이프가 그동안 많은 일을 해 주었어요. 고맙죠. 당분간 노트북 하나 사서 그동안 경험을 모아 책이라도 쓰고 싶어요. 그런데 장소가 마땅치 않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 퇴직 후 4개월


“그동안 한눈팔지 않고 최선을 다해 쌓아 온 경험과 전문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 같습니다. 이제야 그동안 회사 명함과 저를 동일시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 퇴직 후 1년



휴식, 관계, 새로운 일상...

그리고, 다음 목표


그분들이 인터뷰에서 내던지듯 하는 말에 답이 있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퇴직의 충격과 뒤섞여 극심한 불안 상태로 이끈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일상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한 분야에서 성공한 분들이라도, '내일'은 누구에게든 새롭다. 30년 이상 나의 정체성을 모조리 차지한 자리에 새로운 내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 앞으로 어떤 일상을 만들 것인지... 내려오는 그 시점이 언제이든, 준비는 이를수록 좋다.


취직 준비는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서, 퇴직 준비는 왜 그만큼의 온도로 하지 않는가?


(성공한 퇴직/은퇴자들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