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매카트니와의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에게는 엄청난 유산이 있습니다. 당신이 만든 유산에 주눅 들지 않나요?”
그의 대답은 “나는 내 이름을 딴 별도 가진 사람이지만, 대중적인 스타와 나를 분리시켜 왔어요. 사람들은 그걸 잘 못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난 여전히 리버풀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웅현 [여덟 단어]에서 재 발췌 -
부회장, 대표, 전무, 사장… 지금까지 조직을 위해 짊어진 그 무게를 내려놓는다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임원들을 위한 서비스를 구상하기 시작한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 대략 60人의 전/현직 경영진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꿈, 1%의 성공을 이룬 분들과 ‘커리어의 정점과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마음의 부담도 크다. 그러면서도 계속 이어가는 이유는 누구든 한 번은 퇴직을 하고, 가장 성공했다고 인정받아 온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며, 이제는 퇴직이 언제 다가올지 모를 일이 아닌, 언제든 내 눈앞의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입학, 취업, 결혼과 마찬가지로 순간의 이벤트는 짧고 이후의 여정은 긴…
삶, 그 자체인 것
갑작스러운 퇴직 경험은 개인과 가족의 일상에 커다란 변화이자,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기도 하다. 이제 ‘정년퇴직’과 ‘평생고용’은 사전에서 삭제해도 좋을 만큼 오래된 단어가 되었기에 누구든 맞이하게 될 퇴직 이후의 생활을 현명하게 준비해야 할 필요가 더욱 커지고 있다.
‘대한민국 50대, 성공한 남성’들로 대표되는 임원들에게 갑작스러운 퇴직은 짧게는 25년, 길게는 서른 해 넘는 사회생활에서 가장 큰 시련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퇴직 이후의 일상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쉽게 꺼내지 못한다.* 극심한 경쟁과 비교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은 오랜 성공 경험 때문에, 이제와 속내를 털어놓는 일은 승부에서 지는 일이자 평생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다. 본인이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그 사건으로 입은 내상이 크지만 으레 그랬듯이 혼자 이겨낼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타인이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올해는 모두에게 극심한 상실과 소외, 불안과 허무를 안긴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퇴직자 스스로의 복잡한 심경을 다독일 여행과 사색의 기회도, 오랜 친구들과 소소한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사회적 성공’만을 위해 달려온 시간 동안 어쩌면 가장 어색한 공간이었던 ‘집이란 곳’에서의 새로운 일상이 대책 없이 무료하고 불안하다.
(* 인터뷰 대상자는 주로 대기업 및 공공기관, 외국계 기업의 전/현직 임원들이며, 남성 대 여성 비율 9:1 임. 본 글에서는 개인의 성격, 취향, 목표 등 퇴직에 대한 다양한 정서와 반응이 존재함을 전제로 하며,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파악된 내용을 주로 설명하였음)
퇴직을 실감하는 순간
2019년 한 연구에 따르면, 50대 이상 퇴직자들이 실감하는 퇴직의 순간으로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뭐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라는 답변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와 함께 ‘공식적인 명함이 없어진 상태에서 타인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할지 망설여지는 순간’에 퇴직의 현실에 직면한다.
함께 제시된 답변들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퇴직 이후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는 것과 갑작스럽게 닥친 ‘역할의 부재’와 ‘공적인 통제력의 박탈’이 커다란 상실감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매일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이 약일까?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면 모호해진 정체성과 상실감에서 회복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한 인터뷰 대상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묻어두는 것이지, 잊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상에서 문득,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그때의 상황을 꺼내어 본다고 대답했다. 동일한 연구에서 ‘상실감’과 ‘작아진 기분’은 1년이 지나더라도 크게 개선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고, 퇴직 직후의 ‘후련한 감정’도 다른 정서와 뒤섞여 1년 이내 급속히 줄어든다. 다시 말해, 퇴직 순간의 즉시적인 해방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1년 이내 ‘후련함’이 다시 증가하는 현상은 현실에 대한 포기 혹은 인정에서 나오는 정서라고 보이지만, 측정한 변수 별로 원인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은 제시되지 않았다.
해당 연구는 50세 이상, 직급과 상관없이 5년 이내 퇴직자 7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결과인데, ‘임원들의 비자발적 퇴직 이후의 심리와 적응 과정’에 집중한 또 다른 연구**에서도 유사한 결과를 보이고 있다. 연구자에 따르면, 조직에서 임원 직급으로 퇴직한 이후, 현실을 인식하고 복합적인 부정적 감정들에서 회복되기까지 짧게는 3~4년, 길게는 7~8년 이상 소요되기도 한다는 인터뷰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 [한국 대기업 임원들의 비자발적 퇴직에 대한 적응과정 연구 (2020)] (구자복, 중앙대학교 대학원, 심리학과 사회 및 문화심리학 전공 박사 논문)
퇴직 이후, 어떤 생활을 기대할까?***
그동안 고생한 나와 가족에게 주는 여유
정기/비정기적으로 찾아갈 공간
그 안에서의 일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교류
필요할 때 얻을 수 있는 일상에서의 소소한 도움
내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꿈의 실현
‘나’를 소개할 새로운 명함
내 경력과 경험을 확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일
즐거운 일과 약간의 보상
*** 인터뷰 결과이며 항목별로 상대적인 중요성은 고려하지 않음
이러한 니즈들로부터 두 가지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집에서 나가고 싶습니다.’
대개 연말에 이루어지는 퇴직자 발표 이후, 갑작스럽게 시작된 퇴직자들의 변화된 일상은 생각보다 오랜 기간 동안의 정서적, 감정적 혼란으로 이어진다. 특히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가족 내에서의 관계 형성에도 새로운 시행착오를 경험하지만, 이미 고착된 가족 내 관계는 퇴직을 계기로 악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집에서 나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변화된 일상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구체적인 해법들은 많지 않다. 대기업들의 경우, 퇴직한 고위 임원들을 위한 공간과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마련해 두고 있지만 재직 시의 불편한 관계를 고려하여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편,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까운 지인들과 공동으로 사용할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활이 단조로와진다. 게다가 지금까지 최고의 업무 성과를 내기 위해서 회사에서는 비서의 업무 보좌를, 집에서는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왔기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어디에서 최적의 정보를 찾아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는 스스로에게도 큰 도전이다.
오히려 아주 소소한 생활 속 불편들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집 밖을 나서는 것 자체를 주저하기도 한다. 대개 퇴직 후 6개월에서 1년까지는 정서적 혼란과 인지적 충격 상태가 계속되지만, 정작 자신의 심리적 상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상당하다. 이는 정작 가장 불편한 장소가 되어버린 집에서의 일상이 더욱 길어지는 패턴을 보인다. 또한, 지금까지 '실수 없이 살아온' 사람으로서, 아주 소소한 일상에서의 실수에 당황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져서 스스로 행동반경을 제한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러나 변화된 일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하면, 즐겁게 집을 나서 새로운 Lifestyle을 만드는 것도 쉽지가 않다. 세상이 변했고,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 것이 지금 나의 현실이다.
‘새로운 명함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니즈의 방향은 바로 명함. 대부분의 임원들은 대한민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한 순간도 명함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짧게는 25년에서 30년 이상 명함이 나를 대신했고, 직함과 직급에 기대어 나의 정체성을 설명해 왔다. 가로 세로 10cm도 되지 않은 종이 한 장이 나를 대표해 온 현실이 우리 모두가 교육받고 추구한 목표였기에, 사회에서 요구한 대로의 성공가도를 달려온 임원들에게 갑작스럽게 명함이 없어진 상황은 능력의 상실, 사회로부터의 거부, 관계의 단절 등 거의 모든 상실,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올해만 해도 계절이 두어 번 바뀐 지금까지 퇴직의 현실을 부정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면서, ‘어서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조급함을 크게 느끼고 있는 퇴직 임원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성격, 취향 및 새로운 직무를 찾았는지의 여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데, 퇴직 후 1~2년이 경과하면서까지 새로운 역할을 찾지 못한 퇴직자들은 퇴직 직후보다 더 큰 불안감과 우울감 등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익숙했던 공적인 관계와 멀어져 있는 시간이 길수록 정서적인 어려움을 크게 느낀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가장 익숙했던 ‘퇴직 이전의 역할’을 되찾길 바라며 재취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만, 변화하는 고용 구조와 시장 환경은 50대 이상 최고의 경력을 자랑하는 임원들께도 비껴가지 않는다. 10% 미만의 재취업률이 현실적인 통계이다.
‘내 자리’라고 생각한, 과거와 유사한 포지션으로의 복귀는 현실성이 없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 대신, 새롭고 다양한 가능성을 구상하는 일로 일상을 보내다 보면, 가장 최적의 자리가 다가올 가능성도 커진다. 내가 원하는 역할을 반드시 재취업에서 찾을 필요가 없도록, 지금까지 쌓아 온 경험과 지식이 '새로운 업(業)’으로 확장될 수만 있다면, ‘눈을 낮춰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지…’라는 서운함 가득한 재취업의 여정 대신, 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퇴직 임원들의 평균 나이 53세, 앞으로 '스스로 만든 전성기'를 맞이하기에 더함도 모자람도 없는 때가 아닌가.
퇴직의 경험에서 얻는 충격은 깊이 묻어두는 것이지, 잊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면서도 과연 그 과정이 변화될 수 없을까 되 묻는다. 언젠가 닥칠 일이라면, 미리 준비할 일과 새로운 목표를 챙겨 두는 것은 넉넉한 자산 규모만큼이나 퇴직 이후 '잘 먹고 잘 살거리'를 찾는 일이 될 것이다.
☞ 임원 퇴직성공기(1), (2)에 이어, 세 번째 이야기는 니즈 편입니다. 즐겁게 가출(家出)할 수 있는 일상, 새로운 업을 찾는 New-UP(業)의 여정을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