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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eniemo Jun 26. 2021

퇴직하고 뭐하세요?

사회적 죽음에 맞서려는 당신에게

물론 예외는 있지만, 주요 기업 대부분의 임원들이 연말을 전후로 회사와 이별합니다. 대기업과 중견기업 임원들이 주로 그 대상인데, 회사로서는 새로운 회계연도가 시작되기 전에 신규 경영진 구성을 완성하고 새로운 전략 방향을 만들자는 취지이니, 조직의 입장에서 고하는 이별이 한편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사자에게는 아주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며,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생일대의 사건과도 같습니다.

 

‘예상했지만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최고 경영진급 퇴직 리더들을 만나면서 공통적으로 듣게 되는 ‘퇴직 당시의 심정’입니다. 이 말은 ‘언젠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에 퇴직 통보를 받으리라는 사실은 예측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상했지만 예측하지 못했다니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말 같은데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누구든 언제라도 죽음이 닥치리라는 것을 알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그렇기에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퇴직을 ‘사회적 죽음’이라고도 부르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맞이하게 될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퇴직 이후의 여정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미리 계획할 수도 없지요. 그런데 퇴직 이후의 삶을 위해 정말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는 것일까요? 퇴직을 상상하며 다니는 회사가 즐거울 리 없고 당면한 업무에 집중하느라 퇴직 이후는 생각할 틈조차 없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매일 죽고 싶은 심정으로 사표를 품고 출근길에 오르는 수많은 ‘우리’들은 과연 주어진 삶에 행복을 더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회사 다니기 싫어 죽겠어.”
“이 놈의 회사, 저 놈의 상사 때문에……”


그런데 말이죠. 이렇게 절망적으로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 조차 퇴직과 해고라는 절벽 같은 상황에 마주하게 되면 다양한 감정이 북받칠 것에 분명합니다. 그렇게 그만하고 싶은 월급쟁이 생활이 어쨌든 끝이 났지만, 어두운 심연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그런 시간을 부득이 당분간은, 혹은 사람에 따라 꽤 오랜 기간 거쳐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당연시했던, 퇴직하면 무엇을 할지 생각해본 적 없는 우리 모두가 늘그막에 겪는 애먼 성장통일 것입니다.

   

‘임원, 임시직원 아닌가요?’


다시, 임원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스갯소리라도 한 번쯤은 일상에서 주고받은 대화의 일부일 테지만, 그 뒤에는 정말 다양한 정서가 깔려 있습니다. 임원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성공의 보증수표를 얻은 그들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일 수도 있겠죠. 반면, 당사자들은 시한부의 현실을 알면서도 차마 내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시점에서 별안간 벼랑 끝에 서게 될 쓸쓸함, 허무함, 불안과 공포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30여 년간 이어온 일상이 하루아침에 깨어지는, ‘언젠가 올 것이라고 예측은 하였으나 오늘일 리 없고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적 정서가 우회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대기업 임원이면 돈은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인가요?’


맞습니다. 잘 나가는 연예인과 대기업 재벌 걱정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냉소가 있지요. 하지만 저는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한 리더들을 만날 때마다 평범한 우리들과 비슷한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직장인의 꿈인 1%의 성공을 실현한 사람들’이겠으나, 그들 역시 당면한 일에 최선을 다한 직장인일 뿐이었고, 타인이 원하는 삶을 자신들의 목표라 생각하고 달려온 ‘조금 더 운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역시 퇴직 이후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해 당혹감에 사로잡힌 시간을 거치고 있고, 세상은 가진 돈 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물론, 가진 것에 더 크게 집착하는 사람들도 만나왔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만난 리더들 중 많은 분들이 명징한 현실 인식 하에서 그다음의 삶을 구상하고, 지금까지의 운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더 나아가 사회로의 환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리더들이 새로운 역할을 해 주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퇴직하고 뭐하세요?’

저는 우리 모두가 이 한마디 주고받는 것에 주저함이 없길 바랍니다. 그 질문과 대답이 적어도 사표를 품고 매일을 견디는 고된 출근길에 한 줄기 가녀린 희망을 줄 것이란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퇴직하면 필요한 재무자산의 규모를 넘어 '사회적 죽음'의 고비를 직시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해가는 여운 가득한 의문 위에서 굳건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퇴직 리더들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새로운 역할>을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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