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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기 Feb 09. 2021

서른 하나, 일분기

근황

오후 세 시 반의 작업실. 커피가 내려지길 기다리면서 빛이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오는 창밖을 내다 보았다. 아무렇게 고른 플레이리스트도 마음에 들고, 꼭 기분이 봄 같아서 글을 쓴다. 밝은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싶은데, 현실의 나는 본래 물렁하고 온갖 것에 반가워하는 밝은 사람이다.


며칠 전에 3년 전 여름 모 어학원의 서점에서 일할 당시 써 둔 글을 읽고 나서부터, 종종 근황을 기록해두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퇴근 후 작업실로 출근하는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은 온라인 유통 업체로, 디지털 기기 관련 제품을 생산하고 중국에서 생활용품을 수입한다. 나는 온라인 판매에 필요한 이미지를 작업하는 일을 하는데, 주변에 이야기할 때 '포토샵 일용직'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예지씨. A씨가 부탁하는 것 먼저 하고, B 주임이 주는 것 하고 난 다음에 이거 하면 됩니다." 과장님은 나긋나긋하면서도 공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신데렐라가 된듯한 느낌이 살짝 들지만, 나는 업무시간이 짧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는 데다 모두가 친절해서 이곳이 좋다. 세어 보니 다음 달이면 일 년이 되는구나.


오후 두 시 반이 되면 업무를 보고하고 컵을 씻은 뒤 인사를 하고 조용히 나온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엄마와 통화를 하며 작업실로 걸어가는데, 문래동 5가에서 3가까지는 15분 정도가 걸린다.


오후 세 시. 나는 작업실 등을 켜고 콘센트를 꽂고 나서 난방기와 공기청정기를 켠다. 거품으로 손을 씻고 와서 핸드크림을 듬뿍 바른 뒤 커피를 연하게 내린다. 작업실 멤버가 먼저 와 있으면 짧은 대화를 나누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거나 바느질을 한다.


이제는 4명이 함께 사용하는 내 작업실은 문래창작촌의 한 오래된 건물 3층에 위치하는데, 멀리서 보면 꼭 가벼운 불이 났던 것 같이 거뭇해 인상 깊다. 나는 좁은 옆 계단을 자주 이용하는데, 오르내릴 때 종종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는다. '이런 생활이 어느새 일상이 되었구나.'


스무 살 중반부터, 무엇을 하게 될지도 모르면서 '작업실'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사람마다 기질과 자라온 환경에 따라 당연하다 여기며 사는 것이 모두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상경해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과 추후 작업실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면 길을 건너는 것이 당연하듯 머릿속에 깔려 있었다.


나는 대범하지 못해 자주 뒤돌아보는데, 올해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내 수많은 의도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우연들은 큰 항아리 따위를 가득 채운 물에 물감을 조금씩 타는 것과 같이 서로 스며, 내 상상과 불안의 한계를 넘는 새로운 날들로 날 이끌어 줄 것이다.



21.02.09  봄이 다가오는 작업실의 오후, 내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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