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놀라고 싶다

영화, 꿈과 현실, 현재, 그리고 인셉션과 놀란 감독의 영화들에 관하여

by 전해리

*이 작품의 모든 글은 해당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문 대사의 경우,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번역을 존중하되

독자적 영화 해석에 따른 필요로 인해 필자 본인이 되도록 직접 번역합니다.

*또한, 조금 더 원활한 설명을 위해 때론 직역하거나하

원래 대사의 의미를 차용했음을였음을 감안해주세요*

*작품 제목과 작품에 나오는 대사, 작품 속 고유명사에는 작은따옴표를 달았습니다*

***해석은 얼마든지 바뀝니다.

고로, 절대적이고 완벽한 해석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놀라고 싶다 : 영화, 꿈과 현실, 그리고 현재에 관하여>


- 중점적으로 다룰 영화

영화 ‘인셉션’ Inception : 영화관_6차 관람, 총 N차 관람, 시나리오 2번 염독念讀

- 언급될 영화

영화 ‘메멘토’ Memento : 영화관_1차

영화 ‘프레스티지’ The Prestige : 왓챠플레이_1차

영화 ‘배트맨 비긴즈’ Batman Begins : 영화관_1차

영화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 영화관_2차, 영화 채널_파편적 관람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 The Dark Knight Rises : 영화관_3차, 영화 채널_파편적 및 수차례 관람

영화 ‘인터스텔라’ Interstellar: 영화관_1차, 영화 채널_파편적 및 3차례 감상

영화 ‘덩케르크’ Dunkirk : 영화관_2차

영화 ‘테넷’ Tenet : 영화관_1차

(이상으로 2020년 11월까지 기록, 횟수는 추후 얼마든지 증가할 수 있음)

영화를 이해하기까지 걸린 시간 : 10년

글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 : 약 11개월 ; 뇌리_8개월, 문서화_3개월


영화가 곧 인간의 삶이고, 인간의 삶이 곧 영화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삶을 이해하게 되었기에 이 신념은 흐릿해지기는커녕 갈수록 견고해졌다. 그리고 이에 관해 논설할 수 있는 작품의 시초가 되어 줄 글이 나에게 다가오길, 떠오르길 약 4년의 시간을 기다렸다. 영화 ‘인셉션(Inception)’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 ‘그 영화를 살고, 그 영화를 쓴다’는 시작될 수 없었을 것이며, 내가 10년 만에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연거푸 5번 보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은 전적으로 불가능했다. 이 작품을 영화 ‘인셉션’으로 개시할 수 있어 영광이다.

‘인셉션’을 언제라도 영화관에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관람하고 싶었다. 그게, 내가 하루라도 꿈을 꾸지 않는 날이 없기 때문이다. 기회가 찾아온 무렵에 나는 나의 첫 책이 될 글을 쓰는 데 여념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도저히 집중을 못하고 있었다. 뭘 해도 마음이 둥둥 떠있는 것처럼 불안한 심경과 타오르는 열의를 구별하기 힘들어 괴로웠다. 깨어 있는 시간엔 그러하였고, 자려고 눈을 감으면 고질적으로 과거의 기억이 세세히 반영된 꿈에 시달렸다. 내게 잠을 잔다는 건 쉼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눈을 떠도 생활 곳곳에 그 꿈이 난립했다. 늘 도저히 개운할 수 없는 정신으로 펜을 잡아야 했다. 작품 특성상 과거의 기억을 계속 마주해야 했는데 그 과거가 내겐 어떤 의미에서 지옥이어서 글을 쓰면 쓸수록 그때의 고통이 마치 현실처럼 아파 현재의 난 속절없이 피폐해졌다. 글을 쓰는 순간의 기쁨만큼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었으나, 한 편의 글을 쓰고 현실로 돌아오면 그 현실이 너무 낯설었고, 이 작품을 내가 임의적으로 끝낸다 하더라도 그후에 생길 일들에 겁이 나 혼자 부심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글을 안 쓸 순 없었다. 10년의 시간과 그 안의 보람차고 고생스런 여행이 고스란히 걸린 꿈, 모든 걸 감내하더라도 이루고픈 꿈, 전부 실패하고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꿈, 그러니까 여행책을 내겠다는 마지막 유년시절 꿈을 이루고 싶었다. 이루려면 써야 했다. 써야 했고, 사실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 쓰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렇지만 쓰고 싶었고, 쓰지 않는 것 자체도 고통이었다. 이 총체적 난국을 한 마디로 설명하면, 현실을 꿈에 걸고 꿈이 현실에 걸쳐져 있어 현실 분간이 절실했다. 나는 ‘인셉션’이 10년 만에 극장 개봉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막연하고 얼토당토않지만 왠지 ‘인셉션’을 보면 내가 당장 글에 집중해도 괜찮을지,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종잡을 것 같은 직감에 휩싸였다. 영화의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영화를 제대로 다시 보고 나면 꿈에 대해 아주 약간이라도 통달하든 아예 달관하든 둘 중 하나는 가능하겠거니 판단했다. 맑은 정신으로 살아본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해서 나는 정말이지 이번에도 영화의 힘이 간절했다.

그 어떤 영화도 ‘인셉션’만큼 관람한 적은 없었다. ‘인셉션’을 이미 첫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1번 보고, 그후 이곳저곳에서 수도 없이 보았지만, 재개봉하면서 영화관에서 5번을 보고도 원문 시나리오까지 찾아서 연달아 2번을 읽었다. 그렇게 ‘인셉션’에 몰두하면서 얻은 답은, 정답이 아닐지라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젠 상관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젠 상관하지 않겠다. 나는 그저, 예의 그 세상이 뒤집히는 장면을 영화관에서 다시 보게 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올랐던 환희만을 안고 가고 싶다. 나는 왜 자꾸 잊었던 걸까, 이 삶이 얼마나 놀라운지.

이 삶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삶을 처음 살아보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와 법칙을 전혀 모르는 채 태어나 오직 살아감으로써 체득하고 있다. 그러니 당연지사 서툴 수밖에! 이 ‘인셉션’이란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도 이와 같다. 게다가, ‘인셉션’ 속 세상은 꿈을 심거나 훔칠 수 있는 기술이 존재한다는 면에서 우리가 알고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르다. 하물며 내 삶의 원리와 법칙 그 일부의 일부도 모르는데 그쪽 세상을 단번에 이해할 리 없다. 그러나 이해하고 싶다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다. 우리가 인생을 시간의 순행적 흐름에 따라 살고 있듯 이 영화도 같은 방법으로 따라가 보자. 다행히 등장인물들이 친절하게 매 순간 일일이 설명도 해 주며, 한편으론 그들도 우리와 처지가 다를 바 없다. 그러니까 ‘인셉션’은 우리의 삶에 닿아 있다는 얘기다. 이를 숙지하고 이제 영화를 따라가자.

영화는 해안가에 기진해 누워 있는 주인공을 비추며 시작한다. 아이 둘이 놀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지만 주인공은 이내 다시 쓰러지고, 그런 그를 일본어를 하는 경호원들이 일본식 고성으로 끌고 간다. 주인공은 의식이 혼미한데도 고성 주인의 이름을 말하는 데다가 특이하게도 총과 팽이를 소지하고 있어 주인인 일본인 노인 앞으로 연행된다. 노인은 그에게 ‘자신을 죽이러 왔는지’ 묻는다. 또한, 팽이가 눈에 익고 그 소유자를 ‘아주 오래 전’ ‘꿈에서 보았다’고 말한다. 순간 주인공이 얼굴을 들자 화면은 바로 전환된다(Cut To). 이때 관객은 깔끔하고 젊어진 주인공을 통해 같은 장소 속 시간이 이전과는 조금 더 과거일 것임을, 혹은 최소한 다른 시간대와 상황이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반면, 노인의 대사에 비추어, 전환된 장면이 노인의 꿈 속이라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어쨌든 장면이 바뀌자마자 일본인 남자에게 ‘급진적 사상’을 역설(力說)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보인다. 주인공은, 자, 이제부터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쓰도록 하자, 아무튼 코브(Cobb)는 ‘생각(an idea)이란, 없애기 어렵고 전염성도 강하며(resilient, highly contagious)’,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에 박힌 이상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Once an idea’s taken hold in the brain it’s almost impossible to eradicate)’고 주장하고, 아서(Arthur)는 ‘꿈을 꾸는 상태에서는 의식적 방어 기제가 약화되어 생각을 훔치기 쉽고, 그런 행위를 추출(extraction)이라 한다(In the dream state, conscious defenses are lowered and your thoughts become vulnerable to theft. It’s called extraction)’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훈련된 추출자들(extractor)인 자신들이 잠재의식(subconscious)를 지켜주겠으니 그전에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사이토(Saito)를 설득한다. 그러나 사이토는 고려해 보겠다며 자리를 물러나자 아서가 말하길, “눈치챘어.” 갑자기 고성이 흔들리자 그가 덧붙이길,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What’s going on up there?)” 이번에 화면은 아예 다른 장소, 다른 시간대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불안한 기색으로 인물들을 살피고 있고, 남자가 있는 건물 바깥에는 폭동이 일어나 있다. 화면은 다시 돌아오고 코브는 아서를 안심시키는데 한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코브는 멜(Mal)에게 ‘당신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녀는 아이들이 본인을 보고 싶어하는지 묻는다. 멜은 코브의 말을 개의치 않아 하고, 코브는 멜의 말에 은근히 동요한다. 멜은 코브에게 협조하지 않고 자리를 뜬다. 그러곤 임무를 어떻게든 완수하려는 그의 앞에 멜이 아서의 머리에 총을 들이밀며 사이토와 함께 나타난다. 일은 틀어졌다. 사이토가 ‘우리가 사실 지금 꿈속이라는 것’을 말할 때 관객인 우리는 한 번 놀라고, 멜이 ‘죽으면 꿈에서 깨지만, 고통은 꿈에서도 느낄 수 있다’고 말할 때 두 번 놀란다. 다리에 총을 맞아 고통을 느끼는 아서가 머리에 총을 맞고 깨어나고, 고성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즉 꿈이 무너진다. 깨어난 아서가 꿈에 침투한 그들을 살펴온 내쉬(Nash)에게 코브를 깨우라고 하자 그는 코브의 몸을 거세게 흔드는 것도 모자라 뺨을 때리는데 이때 아직 꿈에 있는 코브가 하릴없이 쓰러진다. 코브는 도무지 깨질 않고, 아서는 내쉬에게 ‘킥(kick)’을 쓰라며 물에 담그라고 한다. 그러자 연달아 코브가 있는 꿈에서 갑작스레 물보라가 일고 드디어 코브가 꿈에서 깨어난다. 일단, 여기까지 우리는 그동안 꿈 속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곧바로 거세진 폭동에서 음악 소리와 함께 또다른 화면으로 전환되며 또 하나의 충격이 우릴 덮친다. 일본 고성에서의 사건은 꿈속의 꿈이었다. 그러고 보면, 두 번의 장소 변환을 나타내는 화면 전환 때마다 시계가 비춰지는데 초침 바늘의 움직임이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는 점이 굉장히 수상했다. 그렇게 임무 완수에 실패한 코브가 호텔에 돌아왔을 때의 세 가지 모습까지 살펴보자. 첫째, 팽이를 돌리며 총을 마치 본인에게 쏠 것처럼 들고 팽이가 끝내 쓰러지자 그제서 총을 내려놓는다. 둘째, 통화 내용과 우리가 맨 처음 보았던 해변가 장면의 아이들의 모습이 회상됨을 미루어 보아 그는 아이들을 본 지 오래된 것만으로 모자라 마음대로 만나러 갈 수 없는 처지다. 셋째, 아들이 엄마 얘기를 꺼내자 코브는 ‘엄마는 여기 없어’라고 말하곤 죄책감, 슬픔과 같은 감정을 드러내며 격동한다. 자, 여기까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아주 기초적인 힌트가 나왔다.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1. 생각은 없애기 어렵고, 전염성이 강하며,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에 박힌 이상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2. 꿈을 꾸는 상태에서는 의식적 방어 기제가 약화되어 생각을 훔치기 쉽고, 그런 행위를 ‘추출(extraction)’이라 한다.

3. 꿈 속에서 죽으면 꿈에서 깨어나지만, 총에 맞거나 하는 고통은 현실과 똑같이 고스란히 느낀다.

4. 현실과 꿈 속에서 시간 흐름의 속도가 다르다.

5. 꿈 속에서 또 꿈을 꾸는 것이 가능하다. 즉 꿈에서 층위가 생겨난다.

6. 상층의 꿈이 하층의 꿈에 환경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7. 죽음 외에도 꿈에서 깨기 위한 방법으로 떨어지는 충격을 가하는 요법인 ‘킥(kick)’과 일반적인 기상처럼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수가 있다.

8. 꿈에서 깨기 30초 전 신호로 음악을 튼다.

9. 아내인 멜은 실제 세계에서 이미 죽었고, 꿈에 출현해 코브의 일을 방해했다.

10. 교토의 기차에서 꾼 꿈은 폭동이 일어나던 공간, 그곳에서 한 번 더 꾼 꿈의 장소는 일본 고성이다.

나는 이쯤에서 이 영화의 관객이자 이 글의 독자인 당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그러나 뒤로 미루겠다. 여하튼 이미 나와 있는 힌트를 잘 명심하고 우선 영화를 감상하자.

호텔에서 이어지는 장면, 사이토는 코브와 아서에게 생각을 훔칠 수 있으면 심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냐며, 이른바 ‘인셉션(inception)’을 제안한다. 아서는 불가능하다며 이유를 설명한다. 그 이유를 집중해서 보자.

아서 : “자, 한번 생각을 심어 볼게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뭘 생각하게 돼죠? (Here’s a planting an idea: I say to you, Don’t think about elephants.)“

사이토 : “코끼리”

아서 : “그렇죠, 그런데 그건 당신의 생각이 아니죠. 왜냐하면 그건 내가 주입한 생각이란 걸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요. (But it’s not your idea, because you know I gave it to you.)”

“마음은 항상 생각의 기원을 추적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조작할 순 없어요. (The subject’s mind can always trace the genesis of the idea. True inspiration is impossible to fake.)”

조금 더 거뜬한 이해를 위해 설명을 간단히 곁들이자면, 이 영화에서 이르는 아이디어(idea)란 곧 착상(着想)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생각하다’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생각의 씨앗, 골자, 실마리에 가깝다. 풀어서 말해, 생각의 시초다. 아서의 예시를 다시 한번 들자면, 누군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 ‘코끼리’라는 단어가 이미 내가 아닌 상대방으로 하여금 언급이 되었기 때문에 ‘코끼리’는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씨앗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나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는 모습을 봄으로써 이 생각이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내가 자각하지 못해도 나의 무의식이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심는 건 순수한 착상이 아니라는 요지다. 그런데 이는 그저 아서의 견해에 불과하다는 걸 코브가 ‘할 수 있다’며 반박한다. 하지만 코브는 웬일이지 망설이고 있다. 그러자 사이토는 코브를 단순히 떠보는 것이 아니라 자극한다, 집에 갈 수 있다면, 아이들을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이때 코브와 사이토의 대화를 유심히 보자.

코브 : “만약 내가 그걸 해내면, 만약 내가 그걸 할 수 있다면… 내가 당신이 약속을 지키리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If I were to do it, If I could do it… how do I know you can deliver?)”

사이토 : “넌 모르겠지, 하지만 난 지킬 수 있어.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뛰어들겠나, 아니면, 후회로 가득 차 홀로 죽는 날만 기다리는 노인이 되겠나? (You don’t. But I can. So do you want to take a leap of faith, or become an old man, filled with regret, waiting to die alone?)”

코브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코브와 아서는 꿈을 설계할 ‘건축가(architect)’를 물색하러 파리로 향한다.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속사정은 있다. 이는 특수한 문젯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꿈과 엮일 때, 잠잠한 속사정은 비로소 수선스러운 곡절이 된다. 삶은 한층 더 복잡해지고, 그런 삶이 더더욱 어렵게만 느껴진다. 수월찮은 삶을 타개하기 위해선, 꿈을 구별해야 한다. 꿈이 두 가지 의미에서 널리 인식된다는 건 자명한 이치나 다름없다. 그 두 가지 중 첫째, 꿈은 잘 때 꾸는 그것, 즉 잠재의식(subconscious)이다. 둘째, 이루고자 하는 목표(goal)를 말할 때 우리는 그걸 곧잘 꿈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상당수가 이 꿈은 인식하지 못한다. 바로, 환상(fantasy)이다. 꿈이 있는 삶이 순조롭지 않은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꿈은 현실 인식에 혼란을 야기한다. 따라서, 아이들의 할아버지이자 코브의 스승이기도 한 마일스(Miles) 교수와 코브가 인식하는 현실은 각자 다르다. 마일스 교수는 코브에게 ‘현실로 돌아오라(com back to reality)’며 현실을 지적한다. 마일스 교수의 눈엔 아내를 살인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배 당하는 삶을 살며 불법적으로 꿈을 훔치는 일을 하는 코브가 ‘환상’ 속에 살며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마일스 교수가 생각하는 ‘현실’은 코브가 입국해서 법적으로 돌파구를 찾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코브의 생각은 다르다 아니, 코브는 현실을 다르게 본다. 코브가 생각하는 ‘현실’은 아이들이 아빠가 오길 애타게 기다리는 현실이다. 현실에 이견이 있을지라도 마일스 교수와 코브는 적어도 ‘꿈’ 앞에선 이견이 없다. ‘현실’을 현실로 이루는 것이 ‘꿈’이다. 즉, 현실로 간절히 이뤄지길 바라는 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이 ‘꿈’을 위해서 꿈을 설계할 사람이 필요하다. 코브는 멜로 인해 꿈을 설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Ariadne)가 바로 그 ‘건축가’가 된다. 그전에, 코브는 ‘제안을 들으면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다. 꿈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다. 대성당을 짓고 하나의 도시를 창조하는 것과 같이 현실세계에서 존재한 적 없고, 또 존재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다. 영화에선 나오질 않는데 시나리오에선 이 대사 다음에 말 한마디를 더 주고받는다. 이 영화의 이해를 돕는 대화이기에 옮겨 적는다.

마일스 : “꿈은 누구나 꿔. 건축가는 그런 꿈들을 현실로 만들어야 하고. (Everybody dreams, Cobb. Architects are supposed to make those dreams real.)”

코브 : “그렇게 얘기한 적 없잖아요. 현실세계에선 기껏해야 다락방을 개조하거나 주유소를 지어야 하는데, 만약 내가 이 꿈을 공유하는 일을 익히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창조하고, 그 창조물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면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서요.

(That’s not what you used to say. You told me that in the real world I’d be building attic conversions and gas stations. You said that if I mastered the dream-share I’d have a whole new way of creating and showing people my creations. You told me it would free me.)”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건축가는 다락방이나 주유소처럼 현실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지어야 하지만, 사실 그 이상을 원한다. 지금 우리 주변을 둘러보시라. 건축가의 창의성, 상상력이 반영된 건축물이 얼마나 드문가. 건축가는 단순히 네모반듯한 아파트만 짓는 사람이 아니다. 건축가에게도 예술작품이라는 건축물을 짓고 싶은 마음이 왜 존재하지 않겠나. 같은 논리로, 모두에겐 꿈의 건축물, 한 마디로 이상이 있다. 그 이상은 현실로 옮겨질 때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내가 꿈꿨던 걸 현실적으로 수용될 수 있도록 고치느냐, 아니면 꿈꾼 상태 그대로 현실로 옮기느냐. 건축가의 경우이건 모두의 경우이건 간에 한 가지는 확실하다: 환상과 잠재의식, 목표 중 어느 꿈에서도 불가능은 없고, 그중에서도 목표라는 꿈을 현실로 이뤄내는 일은 한없이 까다롭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꿈을 꿀까.

우리는 꿈에서 자유자재, 전지전능이기 때문이다. 꿈에선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일들이 내 마음대로 이뤄진다. ‘우린 깨어 있을 때 두뇌의 잠재력 그 일부만을 사용하지만, 꿈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건축물을 상상했을 때, 면과 층이 의식적으로 축조된다. 때로는 저절로 발생하는 것 같은데’, 이것이 곧 ‘진정한 영감(genuine inspiration)’이다.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영감이 떠오른다’는 표현을 떠올려 보시라. 하여튼, 꿈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일제히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동시에 인지하는데, 우리의 두뇌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It creates and perceive a world simultaneously. So well that you don’t feel your brain doing the creating.)’ 그럼 현실성은 어떻게 살리는가. 현실성은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현실성이 곧 현실감이다. 현실처럼 느끼는 것이다. ‘꿈 속에서도 모든 게 현실 같지 않던가.’ 다만, ‘꿈을 깨고 나서야 이상했다는 걸 알아차릴 뿐이지. (It’s only when we wake up we realize things were strange.)’ 그러고 보면 ‘우리는 꿈의 시작을 기억하지 않는다.’ 애써 정신을 차렸을 때, 늘 어느 정도 진행된 꿈 속에 있다. 아리아드네 또한 그러하다. 지금 아리아드네는 코브와 첫 꿈 공유 수업 중으로, 이 대화가 꿈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들을 둘러싼 것들, 바닥이고 가판대 위의 과일이고 뭐고 다 갑작스레 폭파한다,고 하니 너무 심심하지 않은가. 이 장면은 CG가 아니라 실제 촬영본이니 독자께선 직접 영화로 이 대담한 아날로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감상하길 바란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꿈 속이어도 튀어나오는 파편에 얼굴을 가린 이유는 ‘꿈 속에 있으면 그곳이 현실이 되니 현실처럼 아프기 때문(Because it’s never just a dream)’이다. 이 점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서, 실제론 고작 5분밖에 되지 않은 꿈을 아리아드네가 1시간이라고 착각했던 이유는 ‘꿈에서는 우리의 무의식이 활발하게 작동해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When you dream, your mind functions more quickly, so time seems to pass more quickly)’이었다. 정리하자면, 현실에서 5분은 꿈에서 1시간. 이제야 앞서 사이토의 꿈을 훔치려던 사건에서 발견했던 시간 흐름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다. 자, 아직 5분 더 수업을 해야 한다. 꿈에서도 현실처럼 사람들이 길가를 오간다. 그들은 표적(subject)의 무의식의 투영체(projections of subconscious)다. ‘이들에게 말을 걸어 표적의 생각을 훔칠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론,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표적이 금고나 감옥처럼 안전한 장소에 자신이 지키려는 정보를 채우고, 추출자들이 그곳을 턴다.’ 그러한 ‘꿈 속 세상은 시각적(visual)이라고 생각했지만’, 겪어 보니 느낌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만약 물리적 법칙(physics)을 무너뜨린다면?’ 그러자 바로, 굉음과 함께 세상이 반으로 접혀 마치 거울에 반사되듯 건물의 옥상과 옥상끼리 맞닿고, 중력이 상하(上下)의 세상에서 각각 작용한다. 즉, 세상이 뒤집혔다. 이 역시 말로만 하면 그 ‘느낌’이라는 게 도저히 살지 않으니 그 압도적인 장관을 꼭 영화로,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시길. 이 과감한 변화로 사람들이 아리아드네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표적의 무의식이 변화를 알아차려, 병균을 막으려는 백혈구처럼 외부의 변화에 대항하기 위해서 공격한다.’ 그러한 무의식을 통제할 방도가 없다. 그 와중에도 아리아드네는 거울과 거울을 마주보게 함으로써 다리를 만들어 내는데, 이 다리에서 코브는 기시감을 느낀다. 멜과의 추억이 서린 실제 세계 속 진짜 장소다. 코브는 ‘기억에 의존하지 말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야 한다’며 아리아드네에게 날카롭게 주의를 준다. 하지만 사람이란 자고로 ‘자신이 알던 것으로부터 창조를 끌어낸다.’ 그러나 ‘그 일부를 세부 요소로 활용할 수 있을지라도 전체를 그대로 가져다 써서는 안 된다.’ ‘기억에 의존해서 꿈을 설계하는 건 꿈과 현실 구분이 불가능해지는 지름길이다’, 꿈에서도 그 꿈을 현실처럼 느끼는 우리이기에. 기억에 의존해서 꿈을 짓고 변화시킨 아리아드네를 향해 사람들이 점차 폭력적으로 덤벼들고, 멜이 그 틈에 나타나 그녀를 칼로 찌른다. 아리아드네는 기겁하며 꿈에서 깨어 아서로부터 ‘시간이 다 되기 전엔 죽지 않고서야 꿈에서 깰 수 없다’는 원리를 배운다. 경험했기에 강렬한 배움이었다. 꿈에서 깨자마자 사색이 된 코브는 팽이를 돌린다. 이 팽이는 ‘토템(toteme)’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코브는 ‘토템’으로 팽이를 쓰고, 아서는 주사위를 쓴다. ‘토템’은 단순히 언제어디서나 소지할 수 있는 작은 물체가 아니다. 예사롭지 않아야 하며, 고유의 무게감과 움직임이 있어야 하고, 그 존재 자체가 나만 아는 개인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 게다가 이 전부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알아선 안된다. ‘토템’으로 꿈과 현실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브는 팽이가 쓰러지고 나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이번엔 ‘위조자(forger)’를 섭외하러 몸바사(Mombasa)로 향한다. 그곳엔 임무 실패를 용납하지 않아 코브를 향해 이를 갈고 있을 코볼(Cobol)사가 진을 치고 있을 터, 코브는 위험을 감수하고 호랑이 소굴로 직접 들어간다. 하긴, 꿈이 간절하면 못할 게 없긴 하다. 코브가 찾는 ‘위조자’인 임스(Eames)는 ‘인셉션’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다만, ‘더럽게 어려울 뿐’(bloody difficult)이라고 덧붙인다. ‘아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고 코브가 말하자, 임스는 ‘너 아직도 그 ‘구닥다리(stick-in-the-mud)’랑 일하냐’고 응수하는데, 이때 임스가 아서를 일컫는 표현이 몹시 재미있다. 임스는 ‘인셉션’을 전에 시도했지만 실패한 전적이 있다. 따라서 ‘인셉션’에 있어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안다. 첫째, ‘상상력(imagination)’. 둘째, ‘꿈의 깊이는 관건이 아니’라는 점. 셋째, ‘생각의 가장 단순화된 형태(the simplest version of the idea)’. ‘그래야만 표적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자라날 수 있고(will grow naturally in the subject’s mind)’, ‘성공 여부는 표적의 편견에 달려 있으며 가장 바닥부터 다져야 한다(all that stuff’s at the mercy of the subject’s prejudice-you have to go to the basic).’ 코브가 맡은 ‘인셉션’의 경우 표적의 편견은 아버지와의 관계다. ‘위조자’를 구했으니 이젠, ‘조제사’(chemist)를 만나러 갈 차례다. 그전에, 코볼사와 숨막히는 추격전 좀 먼저 치르고. 잡힐 듯이 도망치다 막다른 골목에서 겨우 빠져나온 코브는 구사일생으로 사이토의 차에 탑승한다. 역시, 사람 죽으라는 법 없다.

한편, 자신의 문제를 마음 속에 그저 깊이 묻어두려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 수 없다며 휙 가버린 아리아드네가 코브와 아서의 작업실로 돌아왔다. 아리아드네는 오지 않으려 했지만 올 수밖에 없었다. 달리 말해, 꿈이 지닌 매력과 위력을 못 잊어서 왔다. 꿈을 꾸는 것만큼 그 무엇에도 거리낄 게 없는 건 없다. 이번 아서와의 수업에서는 ‘역설적 건축물(paradoxical architecture)’을 통해 3단계의 꿈을 설계할 할 기술(trick)을 익혀야 한다. ‘꿈에서는 불가능한 모양의 건축물이 없는데’, 가령, 영원히 오를 수 있는 계단이자 3차원의 세상에서 구현 불가능한 펜로즈 계단(the Penrose Steps)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계속 오른다고 해 봤자 같은 길을 도는 반복인 데다가, 실은 계단이 움직여서 가장 꼭대기 디딤판과 그 다음 디딤판 사이에 아찔한 수직 격차가 존재하게 되므로, 기술 즉, 역설이다. 이처럼 ‘폐쇄형 환형(環形) 회로(closed loops)’의 개념과 그 역설을 활용해 꿈을 설계할 수 있다. ‘설계될 꿈의 크기는 상관없지만’ ‘그 복잡함은 상대 무의식의 투영체로부터 숨을 수 있을 정도’, ‘마치 미로와도 같아야’ 한다. 코브가 아리아드네에게 테스트로 미로를 설계하라고 한 연유가 여기 있다. 꿈이 미로처럼 복잡할수록 투영체에게서 숨을 시간이 길어진다는 원리다. 그럼, 수업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질문: 역설과 건축이 애초에 공존이 가능했던가? 적어도 이 영화에선 가능하다. 그전에 건축에 대해 먼저 이해하자면, 층과 층은 연결되고 관련되어 있다. 지상층에 있어선, 1층이 없으면 2층이 없고, 2층이 없으면 3층이 없다. 저층이 먼저 존재해야 고층이 존재할 수 있다. 지하층으로 옮겨가면, 지하 3층 위에 지하 2층, 지하 2층 위에 지하 1층이 있어야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반대로 파고들려면, 지하 1층 아래 지하 2층이 있고, 지하 2층 아래 지하 3층이 있어야 한다. 이 영화는 꿈의 깊이와 축적, 몰입이라는 사고적 개념을 건축에 결부시켜 비유했다. 고로, 생각은 건설이 된다. 그렇다면 역설은 어떻게 설명될까? 역설은 언뜻 보면 타당하지 않다. 이 점에서 모순과 구별이 어렵다. 정리하자면, 모순은 창과 방패처럼 양립 불가능하며 이치상 어긋나는 존재들을 가리키는데 반해, 역설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존재들이 중요한 진리를 형성해 결국 일리 있게 받아들여지는 추론이다. 역설은 불완전하다고 논결할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요상하다. 실제 세계의 건축물에 오차나 결손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 일이다. 그런데 ‘역설적 건축물’이라니? 당최 무슨 말일까?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 자기자신을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런고로 ‘역설적 건축물’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가 기가 막히게도 역설적 존재임을 이해해야 한다. 우린 자신만의 논리를 갖고 사는 존재다. 게다가 그 논리가 지당하진 않아도 나름 꽤 합리적이라고 자부하고 산다. 실상은, 모순덩어리들을 한껏 끌어안고 논과(論過)하기 일쑤인 데다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쉽게 빠지고 정당화를 곧잘 행하곤 한다. 그러니까, 우린 잘 살아가려고 스스로를 번번이 살아가도록 속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괜히 논질(論質)하지 않아도 우린 어지간하면 어찌어찌 또 그럭저럭 살아간다. 마치 이음매가 없어도 멀쩡해 보이는 이동식 펜로즈 계단처럼,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역설 그 자체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도록 판단하는 작용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능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실제 세계에선 불가능하지만 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건축물이 이러한 발상을 대변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 이 꿈 속 세상엔 생각, 사고라는 관념이 실물로 구현되었다. 그렇지만, 또 질문: 뭐든 만들 수 있는 꿈 속이라면서 아예 미로를 직접 건설하지, 어째서 복잡함이라는 그 속성만 차용했을까? 미로의 용도가 정확히 뭘까? 산다는 건,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헤쳐 나간다는 건, 각자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미궁 속을 빠져나가는 것과 견줄 만하다. 이리 가도 막히고 저리 가도 막히다가 왔던 길을 왕복하길 몇 차례, 어느 순간 전진해 있고 결국 탈출구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 미로는 어지러운 길이다. 동시에, 우리가 한계와 장애, 과정, 지향과 목표에 막히고 따라가며 우왕좌왕하는 상태다. 이는 곧 이 영화가 꿈을 미궁에 빗대면서 정작 그 속에 실제 미로를 배치하지 않은 이유이다. 미로는 우리의 생각에 불과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복잡다단함을 미로에 비유한 것뿐이다. 우리 앞엔 미로가 실재(實在)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생각과 사고를 보여주는 꿈의 탈출은 횡적(橫的)이 아니라 종적(縱的)으로 진행된다. 사이토에게서 정보를 추출하려는 꿈 작전에서 보았듯, 죽음과 시간 초과를 제외하고, 건물이 무너지거나 사람이 추락하거나 넘어져야 꿈에서 깨는 점에 의거했을 때 세로 방향으로 꿈을 꿰뚫는다. 이는 층위가 존재하는 꿈, 관념이 체현된 건축물, 보이지 않는 미로 위를 누비는 무의식의 투영체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만의 특징이면서도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제안하는 문제해결의 방식이다. 간추리면, 허상이 아닌 실상을 마주하고 관통하라, 이상으로 상당히 철학적인 건축 수업이었다.

건축 수업을 다 들었다면 다시, 임스, 사이토와 함께 ‘조제사’인 유서프(Yusuf)를 만나러 간 코브가 있는 몸바사로 가자. 투자자인 사이토가 자신도 꿈에 들어간다는 동참 의사를 밝히고, 유서프는 자신이 만드는 진정제(sedative)가 쓰이는 양상을 보여주길 망설인다. 유서프를 따라간 방 안에선, 12명의 사람들이 연결되어 꿈을 공유하고 있다. 진정제를 맞은 이는 찰진 따귀에도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매일 서너 시간씩 꿈을 공유하러 온다는 말에 사이토와 임스는 의아해한다. 코브는 그 이유를 알고 또 공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코브는 알고 있다, ‘꿈을 꾸는 것’만이 ‘꿈을 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그렇게 ‘꿈’이 ‘현실’이 되고, 꿈을 ‘꾸는 것’이 곧 ‘깨는 것’이다. 이 안(案)에서, 당신은 어떤 꿈이 어느 꿈인지 구별할 수 있겠나. 목표, 잠재의식, 환상 중 당신은 어디에 무엇을 넣고 싶은가. 무서운 건, 그 어디에 무엇을 넣어도 답은 된다는 사실. 역설적이다. 코브는 이 역설 속에서 또 한 번 생생하게 멜을 보고 팽이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이 그저 꿈일 때는 편하다. 꿈을 현실로 옮기려는 노력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고달파진다. 혼자선 버겁다. 또, 혼자 모든 짐을 짊어야 하는 법은 없다. 나라는 사람이 해낼 수 있는 몫 이외를 도맡을 사람이 필요하다. 이 영화에선 아서, 임스, 아리아드네, 유서프, 그리고 사이토가 뜻을 함께한다. 그들은 전략을 세운다. ‘나는 아버지의 제국을 조각낼 것이다(I WILL SPLIT UP MY FATHER’S EMPIRE): 표적인 로버트 피셔는 일생을 아버지의 기업 후계자로 살아왔으니 스스로 이렇게 생각할 리 없다. ‘무의식은 이성(reason)이 아닌 감정(emotion)에 의해 좌우되니’, 코브의 팀은 ‘이 생각을 정서적 관념(emotional concept)의 형태로 옮겨야 한다’. 로버트 피셔와 아버지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임스는 이를 이용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가령, 회사를 쪼개는 걸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여기게끔 말이다. 코브는 ‘긍정성 감정이 언제나 부정성 감정을 능가하기 때문에(Positive emotion trumps negative emotion every time) 부정성 감정을 정화할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려면 긍정성 감정적 논리(positive emotional logic)가 필요하다’고 반론한다. 임스는 바로 의견을 제시한다: ‘아버지는 내가 나만의 길을 걷길 바라지 자신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건 원치 않으신다(MY FATHER ACCEPTS THAT I WANT TO CREATE FOR MYSELF, NOT FOLLOW IN HIS FOOTSTEPS)’. 코브가 괜찮다며 반색하자, 아서가 구체적이지 않고서는 안된다며 다소 회의적으로 반응한다. 그러자 코브는 ‘‘인셉션’은 구체성(specificity)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응하는 것(have to work with what we find)’이라고 응수한다. 이때 코브가 지적하는 게 바로 융통성이다. 싱거운 입씨름을 끝내고, 전술에 관해 협의한다. 정서적 관념은 세 단계의 정서적 계기(emotional triggers)로 상세화되고 심화된다. 그러니까, 1단계에선 아버지와의 관계와 감정을 이용해서 ‘나는 아버지의 길을 가지 않겠다(I WILL NOT FOLLOW IN MY FATHER’S FOOTSTEPS)’로 착수해, 다음 2단계에선 야심과 자존감을 파고들어 ‘나만의 무언가를 창조하겠다(I WILL CREATE SOMETHING FOR MYSELF)’로 도전심리를 유발하고, 마지막 3단계에선 ‘아버지는 내가 답습하지 않길 바라신다(MY FATHER DOESN’T WANT ME TO BE HIM)’로 최종적으로 못박는 것이다. 각 단계에서 임스가 로버트 피셔의 삼촌이자 회사에서 위력이 점점 커져가는 브라우닝으로 변장해 피셔에게 정신적 동기를 구축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 단계로 이루어진 꿈은 약간의 방해에도 쉽게 무너진다.’ 그럴 땐 ‘진정제를 사용하면 된다.’ 3단계로 갈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게 제조한 유서프의 특제 진정제는 ‘꿈의 공유(dream-share)를 명료화하고 뇌 활동을 가속시킨다.’ ‘꿈 속에서 뇌의 활동은 평소의 20배인데 꿈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효과가 배가 되어 시간도 그만큼 빨리 간다.’ 따라서, ‘현실에서 10시간을 꿈을 꾸면, 꿈의 1단계에선 1주일, 2단계에선 6개월, 3단계에선 10년’이다. 이 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킥’을 쓰기로 하는데, 이 세 단계를 전부 관통할 ‘킥’을 동시통합(synchronizing)하기 위해 음악으로 신호를 주기로 합의한다. 다행히 유서프의 진정제는 ‘아무리 깊이 잠들어도 떨어지는 충격은 감지하도록 조제’되었으므로, 마지막까지 뭐 하나 빠짐없이 모든 검토가 완료되었다. 다들 이로써 준비가 완벽히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인셉션’ 뿐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수립한 건 전략이지 계획일 순 없다.

사람은 계획적이어서 으레 계획을 세우지만 참 부질없다. 왜냐하면 막상 부닥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만사가 계획대로 흘러간 적은 없다. 세상만사 자체가 계획에 없던 일이다. 피차일반으로, 1단계 꿈에서 폭우는 합의된 사항이 아니었다. 유서프가 기내 음료로 샴페인을 마시고 화장실을 가지 않아 생긴 일이었지만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만했다. 로버트 피셔를 택시로 납치하기만 하면 일이 수월하게 흘러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 내리는 격으로 갑자기 총알이 날아오고 기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튀어나온다. 예상치 못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안심했던 일순(一瞬), 사이토가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다. 다들 당황하며 서로를 탓하기 시작한다. 철두철미한 아서가 조사 과정에서 로버트 피셔가 추출자로부터 방어법을 배워 그의 무의식이 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야 했으나 그러질 못했고, 다같이 급작스러운 총격에 대응하긴 했어도 그건 대비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으로는, 코브가 사전에 팀원들에게 ‘림보(limbo)’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통 꿈에서 죽으면 깨어나지만, 이 경우엔 진정제의 약효가 너무 강해 깨지 못하고 ‘림보’에 빠지게 된다.’ ‘림보’란 비조직적(unconstructed) 공간으로, 원초적이고 무한한 무의식(raw, infinite subconscious)이 자리잡고 있다. ‘‘림보’엔 과거 그곳에 갇힌 경험이 있는 팀원이 남긴 것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팀의 경우, ‘림보’의 주인은 코브다’. ‘‘림보’에 갇히면 스스로 그곳에서 벗어날 엄두를 못 낸다.’ ‘그곳에 갇히는 시간은 몇십 년이 될 수도, 무기한이 될 수도 있다.’ 그 ‘림보’에 빠질 위기에 처한 사이토의 상태가 심상찮다. ‘다음 단계의 꿈으로 내려가면 통증은 약간 덜하겠지만’ ‘그러다 죽으면 정신이 ‘림보’에 갇힌다, 평생.’ ‘그 상태에서 몸이라도 깨어나면, 그는 (속된 말로) 맛이 가 있을 것이다(could be completely gone).’ 그때 사이토가 힘겹게 ‘그래도 약속은 꼭 지키겠다(When we wake, I will still honor our arrangement)’고 입을 연다. 그 모습에 코브는 안타까워하며 사이토가 모르는 현실을 일깨워 준다.

코브 : “‘림보’에 갇힌 채 깨어나면, 우리가 약속을 했는지도 기억 못할 거에요. ‘림보’가 당신의 현실이 되고, 그곳에 너무 오래 갇힌 나머지 당신은 노인이 되어 있겠죠… (When you wake, you might not even remember that we had an arrangement. Limbo will be your reality. Lost there so long, you’ll have become an old man…)”

사이토는 코브의 말에도 이렇다 할 불안한 기색을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사이토 : “후회로 가득차? (Filled with regret?)”

코브가 자연스레 덧붙인다, 사이토가 ‘인셉션’을 제안하며 건넨 대사가 생각났다는 듯.

코브: “홀로 죽을 날만 기다리며. (Waiting to die alone.)”

사이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브의 비관을 단숨에 일축한다.

사이토 : “아니, 난 돌아갈 거야. 그리고 우린 다시 젊어지는 거지. (No, I’ll come back. And we’ll be young men together again.)”

사이토의 태도가 단호하다. 그러면서도 통증으로 몸부림친다. 인정사정없는 현실이 목을 옥죄어온다. 그러니 팀원 모두가 계획에 없던 온갖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심지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출구 없는 전쟁터에 갇힌 셈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다. ‘가만히 있다간 점점 조여오는 로버트 피셔의 경비대에게 총살당해 죽는다.’ 1단계 꿈에서의 시간은 1주일이니 버틸 수 없다. 이 꿈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다, ‘킥’. 꿈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전진하는 수다. 즉 진실(truth)을 대면해야 한다.

‘토템’은 믿음의 상징이고 나와 대상 사이 공통된 개성의 표상이다. 코브의 ‘토템’은 팽이다. 그 팽이는 꿈 속에서 돌리면 멈추질 않는다. 코브는 팽이처럼 어딘가로도 나아가질 못하고 같은 곳에서 계속 뱅뱅 돌기만 한다. 그는 꿈을 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니면, 멈출 수 없는 걸까. 코브가 꿈을 꾸면 그곳엔 매번 멜이 있다. 평범한 투영체와는 다르다. 예측할 수 없고 공격적이고 위협적이다. 이를 내면으로 어떻게든 꽁꽁 숨기려고 하지만 쉽게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코브는 ‘인셉션’ 임무 전 기억으로 만든 감옥에 멜을 가두려고 혼자서 꿈에 들어간다. 꿈이 곧 기억이고, 기억이 곧 꿈이다. 꿈을 꾸면 그는 멜과 함께 있다, 멜은 이미 죽었는데도. 이는 현실과 다르다. 과거이자 기억이다. 그는 기억으로 꿈을 꾸면서 멜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살려 둔다. 그에게 기억은 후회이기도 하다. 코브는 과거 실제 세계에서 누명을 쓰고 집을 떠나기 전 아빠를 등지고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기회를 날렸다. 그 기억을 꿈으로 바꾸면 덩달아 후회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아무리 애써도 꿈은 똑같다. 아이들을 보고 싶어 부르려는 찰나 아이들은 달려 간다. 뭘 해도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선 꿈이 아닌 실제 세계로 가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아리아드네로 인해 간파 당한다. 첫 수업부터 코브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챈 아리아드네는 코브가 진실을 털어놓기를 종용한다. 진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코브가 저도 모르게 느닷없이 기차를 불러올 수 있고, 멜은 언제라도 튀어나올 수 있으며, 피셔의 무의식에 깊이 들어갈수록 동시에 코브의 무의식에도 깊이 들어가는 것이므로 그 속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방심할 수 없다. 코브가 드디어 밝히는 진실은 이러하다: 멜과 꿈 속의 꿈을 실험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밀어붙이다가 마침내 다다른 곳이 해변가였고, 현실에서 몇 시간이 꿈에서 몇 해로 치환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곳에 갇혀 ‘무엇이 실제인지 생각의 노선을 잃은 것이다(lose track of what’s real).’ 그 둘은 ‘림보’ 속에서 세계를 창출했다. 무려 50년을 말이다. ‘처음엔 신이 된 것 같아 좋았지만 이내 실제가 아님을 깨닫고 나서’ 그렇게 살기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멜은 도리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실제가 아님(our world wasn’t real)을 잊기로 결심’했다. 그 둘이 다시 실제 세계로 돌아왔을 때는 ‘다 늙은 영혼이 젊음으로 내던져진 거나 다름없었다’. 멜은 처음엔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아주 단순하고 조그마한 생각 하나가 그녀를 차지하고 모든 걸 바꿔 놓았다. 그녀는 여전히 꿈 속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꿈에서 깨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코브가 아무리 설득하고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코브 : “지금 꿈 속에 있는 거라면 내가 왜 이 꿈을 통제할 수 없지? 내가 왜 멈출 수 없겠어? (If it’s my dream then why can’t I control it? Why can’t I stop this?)”

멜 : “당신은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니까! (You don’t know you’re dreaming!)”

멜은 결국 둘의 결혼 기념일마다 가는 호텔방에 ‘토템’인 팽이를 내팽개치고 코브가 보는 앞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멜이 세 명의 정신과 의사에게 정상 소견을 받아 놓은 탓에 코브로선 그녀의 광기를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코브는 달아날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로 끊임없이 가족에게 돌아갈 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사태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있다. 코브의 죄책감이 트라우마를 낳았고, 멜은 코브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죄책감에 갇히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같은 자리에서 뱅뱅 돌기만 한다. 그 꼭짓점의 이름은 ‘내가 왜 그랬을까.’ 뭘 해도 직선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원형을 그리면서 제자리를 벗어나질 못한다. 꿈속에선 팽이가 멈추질 않는다. 꿈이 현실로 이뤄지기를 실패하면 꿈은 그대로 꿈이다. 어떤 꿈이든, 그 꿈에 사로잡히면 현실세계가 요원해진다. 팽이는 지치지 않고 돈다. 이 팽이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꿈에서 빠져나가는 것뿐이다. 꿈은 하나의 미궁과도 같다. 그 미궁을 빠져나가게 해줄 자, ‘아리아드네(Ariadne)’다. ‘아리아드네’는 영웅 테세우스가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무찌르고 미궁(labyrinth)을 빠져나올 방법을 알려주는 신화 속 여인이다. 그 이름이 증명해주듯 아리아드네는 미궁을 벗어나는 법을 안다. 사실상, 아리아드네의 이름만 살펴도 코브의 인셉션 임무가 실패하지 않을 것을 헤아릴 수 있다.

아리아드네 : “당신은 멜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점점 심해지고요. 그런데 그녀의 파멸을 부른 생각에 당신은 책임이 없어요. (Your guilt defines her. Powers her. But you’re not responsible for the idea that destroyed her.)”

“우리가 이 일을 성공시키려면, 당신 스스로를 용서해야 해요. 그리고 그녀와 맞서야 해요. 하지만 혼자서 해낼 수 없어요. (If we’re going to succeed in this, you’re going to have to forgive yourself, and you’re going to have to confront her. But you don’t have to do it alone.)”

꿈을 이루는 길에 트라우마를 마주해야 한다면 마주해야 한다. 피할 수도, 가둘 수도 없다. 죄책감은 그 트라우마를 강화할 뿐, 내려 놓아야 한다.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 이 또한 혼자선 버겁다. 아리아드네가 다 함께 미궁을 빠져나가기 위해 코브를 도울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줄곧 코브의 상태를 꿰뚫어 본 유일한 팀원이기도 하다. 꿈을 이루는 과정에선 자신이 무엇과 투쟁하고 있는지 깊이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리아드네의 능력과 활약은 ‘토템’을 말미암아 유추가 가능하다. 아리아드네의 ‘토템’은 비숍이다. 비숍은 같은 자리에서 원형 궤도를 그리는 팽이와 달리 직선으로 움직인다. 또한, 승패의 관건 앞에 결정적인 저력을 발휘한다. 종합적으로 정리하자면, 아리아드네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며 미궁을 돌파할 인물이다. 그렇다면, 다른 팀원들도 살펴볼까? 아서는 어떠한가. 아서의 ‘토템’은 주사위다. 주사위의 여섯 면엔 1에서 6까지 숫자가 적혀 있다. 한정된 숫자는 그의 보수적인 면모를 상징한다. 임스가 아서를 두고 구닥다리(stick-in-the-mud)라고 표현한 것, 떠올려 보시라. 하지만 아서는 상상력이 부족한 대신 일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잘하는 일당백이기도 하다. 주사위 숫자의 한정적 성격은 막연하지 않고 분명함을 의미한다. 때에 따라 주사위의 숫자는 더해지거나 곱해진다. 아무리 적은 수라도 그로 활용할 수 있는 일은 무한하다. 따라서 아서는 관점이 회의적이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본인이 할 수 있는 바를 다할 인물이다. 그렇다면, 임스와 유서프는? 둘의 ‘토템’은 영화에서 아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역시 행동으로 그 둘의 성격이나 특성을 짐작해 봄직하다. 임스는 아서에 비해 의리가 부족하고 타산적이다.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고 본인이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몸바사에서 코브에게 걸린 현상금에 눈을 반짝이고, 코브가 미행자로부터 빠져나올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진 않는다. 더군다나 이 ‘인셉션’ 임무에 ‘림보’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걸 알자 자신은 빠지겠다고 한다. 그러나 임스는 ‘인셉션’이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주장할 정도로 진취적이며 심각한 상황에서도 농담을 할 줄 알 정도로 여유가 있기까지 한다. 본인의 ‘위조자’ 역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기하는 모습으로 보아 일단 하기로 했으면 하는 사람이다. 유서프에 대해선, 이렇다 할 두드러진 면모가 없지만 본인이 제조한 약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렇지만 꿈에 들어가기 전에 샴페인을 마셔 꿈 속에서 괜히 비가 내리게 한다거나, 약효가 강하면 꿈에서 죽어도 깨어나질 못하는 걸 코브처럼 알고 있음에도 다른 이들에게 언질해주지 않은 걸로 보아 다른 이들에 비해 자신의 임무 외의 것엔 조금 무신경한 편이다. 그럼, 사이토는? 우선, 이 ‘인셉션’이 걸린 꿈의 투자자다. 꿈이 이뤄지려면 자본은 당연지사다. 사이토는 다른 팀원들에게도 ‘인셉션’ 의뢰인이자 협조자이며 여객기 회사를 통째로 사버리는 부호 기업인이지만, 코브에게 있어서 멜이나 아리아드네처럼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단순한 원조자가 아니다. 이를 뒷받침할 요소가 영화 곳곳 위치하고 있다. 유달리, 꽤 암시적인 장면이 있는데, 몸바사에서 죽기살기로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서 인파가 가득한 넓은 광장으로 겨우 빠져나온 코브가 오히려 어디로 갈지 망연해지자 구세주처럼 차에 탄 사이토가 나타난다. 코브가 위험한 몸바사로 가게 된 빌미를 애초에 사이토가 제공하지 않았나. 위기에 빠뜨린 장본인이 되레 구한다는 것, 의뭉스럽고 심상치 않다. 더더구나 유서프의 솜씨 좀 보려고 들어간 꿈 속에서 생생하게 멜을 보고는 황망해진 코브가 습관적으로 팽이를 돌리려고 했을 바로 그때, 뜻밖에 떨어뜨린 팽이를 다시 돌리려는 찰나 사이토가 나타나 괜찮냐고 걱정한다. 코브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는 팽이를 돌리는 대신 그 자리를 벗어난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해주는 도구인 팽이를 돌리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도록 만드는 존재의 등장은 지나간 과거를 반복적으로, 또 번복적으로 되풀이하기를 일삼는 고착된 상태에서 코브가 탈피할 것을 시사한다. 사이토는 코브를 움직인다. 고로, 사이토는 코브에게 스트레스(stress)다. 정신상 스트레스로선 압박이지만, 영향력에 있어선 반응과 변화를 야기하는 자극이다. 코브에게 사이토는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 두 가지 전부에서 작용한다. 사이토로 인해 코볼사 임무에 실패하고, 또 덕분에 집에 갈 기회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코브가 주저하고 주춤할 때마다 사이토가 그를 밀어붙인다. 사이토는 그에게 의지로 작용된다. 코브가 사이토가 약속을 지킬지 의구심을 가질 때마다 사이토는 약속을 지킨다고 다짐을 두고 일을 성공시킬 것을 강조한다. 또한, 사이토는 코브에게 있어 도전의식이기도 하다. 자신이 건넨 임무, 그것도 보통 임무가 아닌 남들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할 정도로 아주 어려운 임무에 응하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제안은 곧 당신이 도전을 해야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도전은 일상에 상반된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지지부진한 일들에 지겹다 못해 신물이 나서 전복시키고 싶다면, 매일 하지 않았던 걸 해야 한다. 도전은 그런 의미다. 도전이라도 해야 꿈을 이룰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므로 1단계 꿈의 총격전에서 하필 총에 맞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사이토인 건 필연이다. 사이토는 코브에게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직면하는 힘을 주고, 그럼으로써 아이들에게 돌아가려는 코브의 꿈을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마 사이토가 총에 맞지 않았다면 일이 수월하게 흘러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이토가 총에 맞은 위기는 곧 코브가 성찰과 용서에 접어들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더불어, 위기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부른다: 계획대로 되는 건 없다. 그들이 원래 짐작하기론, 꿈에 들어가면 일이 후다닥 진행되니 몇 시간 안 걸려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사이토의 유혈사태, 무장한 로버트 피셔의 경호원들, 기차의 출몰, 폭우로 일은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할 때 있어 계획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전략에 착수해야 한다. 그들의 전략은 로버트 피셔와 아버지 사이를 캐내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전략을 견지하고, 밀고 나가야 한다. 가만히 있는다고 꿈이 현실로 이뤄지지 않는다.

1단계 상 전략: 마음을 열기 위해 친근한 모습을 갖출 것, 또 그러기 위하여 급박한 상황을 연출할 것, 그 와중에도 전략 전개에 유용한 정보를 시시때때로 획득할 것. 그리고 이 인셉션의 경우, 이 모든 것들이 설득될 만한 이야기를 바닥에 깔 것. 코브의 팀은 1단계 꿈에서 납치극을 꾸민다. 로버트 피셔에게 금고를 언급하고 그 금고를 풀 비밀번호를 알아내라며 그보다 먼저 납치된 듯한 브라우닝을 같은 방에 들여보낸다. 브라우닝은 그로 변장한 임스이며, 금고나 비밀번호는 실제 세계에선 없는 것으로 이 ‘인셉션’을 위해 날조한 것이다. 임스는 일찍이 브라우닝에 관해 정탐하러 기업에 잠입수사에 들어갔다가 피셔의 지갑 안에 있는 사진이 피셔의 아버지인 모리스 피셔의 병상 머리맡에 놓여 있는 걸 보았다. 브라우닝으로 변장한 임스는 이를 간파해, 또 이미 상의된 전략상 로버트 피셔로 하여금 아버지에 관한 악감정을 털어놓게 한 후, ‘실은 아버지가 표현을 안 했을 뿐이지 널 끔찍이 아꼈고, 그래서 따로 유언장을 남겨 두었는데 그게 그 금고에 있다’며 슬쩍 미끼를 흘린다. 물론 그런 건 없고, 따라서 피셔가 코브의 협박에 입밖으로 무작정 뱉은 숫자인 528491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코브의 팀은 그 숫자를 잘 활용하면 될 일이다. 희소식도 있다. 부자관계가 원래 조사했던 것보다 훨씬 나빴다. 이 ‘인셉션’에서 부정성 감정과 긍정성 감정이 화해되어야 하는데, 문젯거리가 타겟에게 미치는 영향이 강력할수록 그 카타르시스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브의 팀은 피셔의 아버지에 대한 악감정을 브라우닝에게 돌려야 한다. 기술을 쓸 때가 왔다.

2단계 꿈에선 ‘미스터 찰스(Mr.Charles)’가 등판하게 된다. ‘미스터 찰스’란 마치 초판에 우세를 선점하기 위해 놓는 수인 체스의 갬빗(gambit)처럼, 본인을 지키기 위해 침입자들에게 달려드는 무의식 투영체들에 피셔가 등을 돌리고 코브의 팀에 협조할 수 있도록 내세우는 일종의 방패막이인 셈이다. 무의식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도리어 정체를 표적에게 드러내야 한다. 이는 표적이 꿈에 있음을 눈치채면 안된다는 원칙을 어기는 것이다. ‘미스터 찰스’가 된 코브에게 피셔가 심적으로 의지할 수 있게끔 바람잡이(decoy)가 먼저 판을 깔아 둔다. 바람잡이이자 이번엔 미녀로 변장한 임스가 피셔에게 지루하면 연락하라며 번호를 남기고 가는데 그 번호는 1단계 꿈에서 피셔가 무턱대고 뱉은 숫자인 528491이다. 뿐만 아니라 지갑까지 훔치는데, 코브가 이를 피셔에게 일러주고, 지갑의 가격까지 알고, 자신의 수하들이 찾아올 거라며 안심시키자 피셔가 그제야 코브에게 관심을 갖는다. 코브는 자신이 꿈을 훔치러 온 추출자들로부터 피셔 당신을 지켜줄 무의식의 존재인 ‘미스터 찰스’라고 소개한다. 과연 피셔는 코브가 말하는 내용들이 생소하지 않다는 반응을 보인다. 때마침 1단계 꿈에서 유서프가 잠든 팀원들을 태운 차를 몰고 아주 힘겹게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불안한 운전 실력의 영향으로 2단계 꿈엔 지진이라도 난 듯 간간이 진동이 일고, 밴이 커브를 돌자 호텔이 기울고, 빗줄기가 차 안에 들어오면 무난했던 기후에 급우가 몰아친다. 덕분에 ‘미스터 찰스’가 신뢰를 얻지만, 현재 꿈 속에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무의식의 투영체들의 시선이 일제히 꿈의 주인에게 쏠리고 피셔의 경호원들이 코브와 그 팀원들을 미행하며 호시탐탐 습격할 기회를 노린다. 코브는 피셔를 데리고 바에서 빠져나와 그들에게 점점 따라붙는 경호원들을 화장실로 유인한 후 총살한다. 이에 기겁한 피셔가 배운 대로 자살을 시도하려 하자 코브는 ‘놈들이 아마 진정제를 놓아 죽어도 깨어나지 못하고 더 깊은 꿈 속으로 빠질 것’이라 그를 진정시키고, 죽은 경호원들의 품 속에서 총을 꺼내고는 ‘이들은 당신을 납치하러 왔다’는 걸 증명하고 협조를 당부한다. 그런 다음, 이 꿈 속으로 들어오기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할 것을 권하자 피셔는 납치 사건이며 금고 이야기며 1단계 꿈 속에서 있었던 일들을 줄줄이 말한다. 코브는 역시 그랬다는 식으로 적당히 맞장구 치며 ‘놈들이 꿈 속에서 당신의 비밀을 훔치려 한다’는 걸 거듭 부각시키고는 ‘금고의 비밀 번호가 이 꿈에서 호텔의 객실 번호일 것’이니 피셔로 하여금 그 숫자를 재차 스스로 내뱉도록 부추긴다. 숫자에 의미가 시나브로 생기고 있다. 본디 아무 의미 없는 숫자라 피셔는 단번에 떠올리기 힘들어 하며 그 일부만 말하고 코브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며 함께 객실의 5층으로 향한다. 5층 복도엔 미리 528호 아래층의 491호에서 폭탄을 설치한 아서와 아리아드네가 대기하고 있고, 문을 박차고 들어간 뒤 그 안에서 꿈 공유 기계를 찾아 보여주며 ‘미스터 찰스’의 주장에 설득력을 높인다. 연이어 이번엔 임스가 아닌 피셔의 무의식 속 투영체인 브라우닝이 방 안에 들어오려 하자 아서와 코브가 그를 제압한다. 무의식 투영체인 브라우닝의 손엔 528 객실의 카드키가 들려 있다. 코브가 ‘같이 납치되었다면서 놈들이 브라우닝을 고문하는 것을 보았냐’고 피셔에게 결정적 한 방을 먹이자 피셔는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는 듯 브라우닝이 놈들과 한통속이라고 믿게 된다. 피셔는 기가 막혀서 브라우닝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 묻는다. 이 브라우닝은 현실의 브라우닝이 아닌 피셔의 무의식 속 브라우닝이다. 즉 이 브라우닝은 피셔의 브라우닝에 대한 평소 인상과 감정에, 1단계 꿈에서 브라우닝으로 가장한 임스가 ‘인셉션’의 바탕으로 깐 금고와 유언 이야기가 결합된 하나의 생각 산물이다. 삼촌에 대해 신뢰하면서도 설마설마하며 의심했던 마음에 코브의 팀이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사랑, 이중적 감정이라는 기름을 부어 불을 지른 형편이다. 그러므로 이 2단계 꿈 속 피셔와 브라우닝의 대화는 피셔 내면과 내면끼리의 문답이자 일종의 자기합리화이다. 그래서 브라우닝이 말하지만 사실상 피셔가 내린 판단은, ‘아버지가 실망하신(disappointed) 이유는 내가 나만의 무언가를 건설하지 않아서였다’는 쪽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종이 바람개비를 갖고 노는 사진을 아버지의 병상 머리맡에 놓고 지갑에 품고 다니는 피셔이기에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브라우닝이 ‘네 아버지가 틀리셨다. 넌 네 아버지보다 회사를 훌륭하게 경영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피셔의 브라우닝에 대한 심정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코브는 이를 두고 거짓말이라고 바람을 넣고 브라우닝의 꿈 속에 들어가 무슨 꿍꿍이인지 파헤쳐보자고 하자 피셔는 이젠 전혀 동요하지 않고 코브의 팀이 의도했던 대로 꿈 속으로 들어가기를 자처한다. 피셔에겐 브라우닝의 꿈이라고 해두었지만 이 브라우닝은 무의식의 존재이니 결국 피셔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이전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이 2단계 꿈에서 피셔를 완전히 포섭했으니 3단계에선 피셔는 협력적일 터. 코브와 팀원들은 뒷일을 아서에게 일임하고 3단계 꿈으로 내려간다.

3단계 꿈엔 설원 위 요충지가 있다. 정확히 무엇이 있을지 모를 그곳엔 경비대들이 한가득이다. 사이토와 피셔가 그곳으로 침투하는 사이, 꿈을 설계한 아리아드네와 코브가 그 둘을 엄호하고 임스가 경비대들을 멀리 유인하기로 한다. 단단히 무장한 경비대들을 상대하는 건 비단 3단계 꿈만의 고충이 아니다. 1, 2단계의 꿈에서도 마찬가지다. 꿈이 3단계까지 당도하고 나자 이로써 각 단계의 꿈에 있는 팀의 일원 모두에게 경비대의 무력 행사에 대적하는 일이 배당되었다. 이는 단지, 1, 2단계의 꿈에서 표적을 수비하기 위해 지독하게 들러붙는 경비대들을 대적하는 시간이 길어짐과 동시에 수비 공격의 강도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세짐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이상으로, 사람의 자기방어적 무의식이 얼마나 끈질긴지, 더불어, 사람이 꿈을 이루는 과정은 오히려 처음보다 그 끝에 다다를수록 가혹해짐을 의미한다. 피셔의 무장 요원들은 총을 들고 유서프의 밴을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유서프는 꽤 버겁게 그들을 공격망을 피하는 듯 쫓긴다. 추격전에서 유발된 아슬아슬한 빗길 운전의 여파로 바로 아래 2단계 꿈이 요동친다. 밴이 급커브를 돌자 아서와 경호원들이 격투를 벌이는 호텔의 복도가 마치 파도에 흔들리는 배처럼 한쪽으로 기우뚱하고, 밴이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비탈길을 구르자 호텔의 복도도 따라서 흡사 드럼 세탁기처럼 빙글빙글 돌며 뒷자리에 안전벨트를 맨 채 잠든 팀원들의 몸이 붕 떠오른다. 그 과정에서 아서가 난투극을 벌이는 호텔 복도가 무중력 상태에 처한다. 덕분에, 인셉션의 명장면이 여기서 또 하나 탄생된다. 아서의 몸놀림은 공중 기예 같다가도 스파이더맨의 동작이 연상되는데, 이 세련되고 독창적인 장면이 CG가 아니라 호텔 복도를 구현해 놓고 직접 촬영되었다고 하니 그 실체감이라는 게 사뭇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 비범한 곡예는 밴이 비탈길을 굴러떨어지다가 겨우 중심을 잡자 끝이 난다. 1, 2단계의 꿈 둘 다 위태롭게 위기를 모면하자마자 또다른 위기에 직면한다. 차 한 대가 악착같이 유서프의 밴을 추적한다. 승개교(昇開橋)의 통행 차단물에 걸려 밴을 쫓는 차의 바퀴가 빠졌을지언정, 그들을 노리는 총알은 지칠 줄 모르고 날아온다. 요원 한 명이 총을 쏘며 밴을 향해 점점 다가오자 유서프는 도무지 피할 길이 없어 결국 ‘킥’을 위한 노래를 튼다. 2단계 꿈에서 그 노래가 들리자 아서는 경악한다, “너무 일러! (Too soon!)” 약속보다 이른 ‘킥’ 예고에 돌발 사태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인셉션’의 성공에 턱도 없다. 코브가 어떻게든 회피하려 했던 것, 그러니까 자신이 꿈의 설계를 알아야 하는 것만큼은 막아보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원칙을 깨야 한다. 코브의 옆에서 아리아드네는 피셔와 사이토가 향하고 있는 미로 형태의 요충지의 금고실로 관통하는 방도를 일러준다. 아서도 2단계의 꿈에서 경비원들을 따돌리는 데 여념이 없다. 아서는 비상계단으로 경비원을 유인한 후 아리아드네에게 전수했던 ‘역설적(paradoxical)’ 건축의 기술을 친히 선보인다. 분명 다른 층이었는데 아서가 계단을 타고 회귀한 것만으로 모자라 제자리에 있던 경비원은 어느새 낭떠러지 앞에 서 있다. 잘 익힌 기술 하나, 열 잔재주 안 부럽다. 겨우 하나 해치웠건만, 전호후랑(前虎後狼)의 격으로 아서에게 다음 고비가 찾아온다. 그건 바로, 무중력 상태로의 돌입이다. 유서프의 밴이 ‘킥’을 위해 후진 상태로 돌진하면서 교량 가드레일을 들이받는다. 그 충격으로 복도를 내달리던 아서가 몸이 급격히 공중으로 빨려든다. 그 파급력이 3단계의 꿈에도 도달해 돌연 어마어마한 산사태가 인다. 예정보다 빠른 유서프의 ‘킥’에 아서가 기존에 준비해 두었던 ‘킥’이 수포로 돌아가고, 뭔가를 눈치챘는지 설원의 경비대들이 피셔가 있는 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밴이 강의 수면 위로 떨어지기 불과 몇 초 전이니 아서에게는 그래 봤자 고작 2분 정도, 3단계의 꿈에서는 20여분가량 남았다. 영화는 장중한 음악과 함께 밴이 떨어지는 순간을 슬로모션으로 나타내고 2, 3단계의 꿈을 교차 편집함으로써 꿈과 시간의 비례에 대해 다시금 관객에게 친절하게 보여주고 강조하는 동시에 긴박감을 자아낸다. 분초를 다투는 시각, 무중력 속 유영과 설원 위 격전이 이어지고, 피셔와 사이토는 아리아드네가 알려준 대로 환풍구를 타고 올라가고, 코브는 멀리서 그 둘을 향해 다가가는 경비원들을 총으로 사살한다. ‘인셉션’의 성공이 눈앞에 있다. 피셔가 금고실에 들어갈 일만 남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침입자가 있다. 멜이다. 멜이 피셔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간다. 코브가 멜을 쏘기만 하면 된다. 멜은 무의식의 존재다. 그런데 코브는 총알을 차마 당기지 못한다. 그사이 멜은 가차없이 피셔의 심장에 총격을 가한다. 그 모습을 보고 코브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엉겁결에 반사적으로 총을 쏜다. 멜이 총을 맞아 쓰러졌다. 1단계에선 밴이 여전히 수면 위로 추락 중이고, 2단계에선 기껏 설치한 폭탄을 도로 모은 아서가 층층 쌓아 전화선으로 칭칭 두른 팀원들을 끌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참인데, 피셔가 죽었으니 이 ‘인셉션’은 이제 어쩌나? 실패인가? 피셔는 그냥 죽은 게 아니다. ‘림보’에 빠졌다. 제세동기를 써도 소용없다. 육체를 끌어 올리더라도 정신이 그곳에 갇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끝난 건가? 아니다, 그 어디에도 길은 항상 있다. 코브와 아리아드네가 ‘림보’에 내려가면 그곳에선 시간이 충분하므로 피셔를 찾은 다음, 아서의 음악 신호를 듣고 임스가 제세동기로 피셔에게 충격을 주면 그 둘이 피셔에게 ‘킥’을 쓰면 된다. 피셔가 돌아오면 금고를 열게 하고, 음악이 끝나는 대로 임스가 병원을 폭파하면 모두 다 같은 타이밍에 ‘킥’을 타고 돌아갈 수 있다. 희망은 항상 있다. 희망은 희망적이라고 느끼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시도해보지 않으면 그 희망의 존재를 모른다. 아리아드네가 해답을 제시하고 코브를 격려한다. 그래, 포기하면 거기서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끝을 볼 수 있다. 그 끝인 ‘림보’로 아리아드네와 코브가 내려 간다. 파도가 치는 해안가에서 깨어난 아리아드네의 귀엔 폭파음이 들리고 눈엔 처참하게 부서지는 고층빌딩들이 보인다. 원초적 공간이라지만 황량하고 불완전하다. 디스토피아적이다. 코브의 마음의 밑바닥이 하염없이 낡고 있다. 과거 멜과 함께 코브가 설립했던 세상의 현재다. 실제 세계와 달리 어떤 건물이든 지을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들이 선호하는 마천루가 그득하다. 하지만 절대적인 이상만 존재하고 있진 않다. 추억의 모습도 존재한다. 처음엔 신이 났지만 그 의욕이 시들자(stale) 추억에 의존해서 옛날에 살았던 건물을 짓고 말았기 때문이다. ‘인셉션’과 얽힌 일화들은 코브의 불행이 시작되기 전 시절의 건물과 관련이 없으므로 멜은 그곳에 없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번에도 여지없이 등을 돌린 채 노는 아이들이 나타난다. 아이들이 달아나는 방향으로 간다. 아이들이 보인다는 건 간절함의 상징이다. 이 시각에도 밴은 성실히 떨어지고 있고, 아서는 비상브레이크 선을 끊고 엘리베이터에 폭탄을 설치하고 있으며, 임스는 폭탄 설치하랴 경비대들 상대하랴 동분서주하고 있다. 코브와 아리아드네는 한 고층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다. 멜과 마주하기 전, ‘킥’을 고안해야 한다. 아니, 이는 애초에 계획에 없던 일, 더 이상 예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필요한 건, ‘임기응변(Improvising)’이다. 임기응변이란 무엇인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것. 그럼 대처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그 주체자, 곧 본인이다. 그런데 그전에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생각(an idea)은 ‘바이러스와도 같아(like a virus)’ ‘없애기 어렵고 전염성도 강해(resilient, highly contagious)’, ‘생각이라는 씨앗이 자라면 하나의 세계를 규정하거나 파괴할 수 있다(The smallest seed of an idea can grow to define or destroy your world)’. 다시 말해, ‘생각은 모든 걸 바꿀 수 있다(A simple little thought that changes everything)’.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코브와 아리아드네가 향한 곳엔 멜이 있다. 그것도 칼을 만지작거리는 멜이다. 멜은 코브를 회유한다. 스스로도 현실을 믿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자신과 함께 있자는 감언이설로 꾄다. 트라우마는 사람을 이렇게 세뇌시킨다: 영원히 주저앉아도 문제될 것 없다; 그만두면 편하다; 뭐라도 이루려고 움직여 봤자 괴로울 뿐이다. 코브는 계속해서 자신은 무엇인 진짜인지, 진실인지 안다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결코 결연하지 않다. 멜이 몰아붙인다.

멜 : “당신은 계속 안다고만 말하는데, 당신이 믿는 건 뭐야? 뭘 느껴? (You keep telling yourself what you know, but what do you believe? What do you feel?)”

코브 : “죄책감. 내가 뭘 해도, 아무리 절망적이고 혼란스러워도, 죄책감을 항상 느껴. 죄책감이 진실을 알려줘. (Guilt. No matter what I do, no matter how hopeless I am, no matter how confused, that guilt is always there, reminding me of the truth.)“

마침내 진실의 밑바닥을 마주했다. 코브가 ‘인셉션’이 가능한 줄 알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본인이 직접 멜의 마음 속에 생각을 심었기 때문이다. 과거 ‘림보’에 갇혔을 때, 그곳을 벗어나야 하는 걸 멜은 받아들이지 못했고 ‘자신이 한때 믿던 걸 더 이상 믿지 않기(a truth that she had once known, but had chosen to forget)’로 결정했다. 멜은 자신의 ‘토템’을 비밀장소에 두었다. 팽이가 있어야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데, 그런 팽이를 소지하지 않겠다는 건 그 분별력을 포기하겠다는 의사이다. 코브가 멜의 죽음을 본인 탓으로 돌려선 안될 소이연이 여기 있다. 임스가 말한 대로, ‘인셉션’은 편견에 좌우된다. 만약 멜이 코브처럼 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다면, ‘인셉션’이 아예 작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멜이 먼저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분간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그렇게 이미 마음을 굳힌 멜을 설득시킬 수 없던 코브는 멜의 비밀장소를 찾아내 연 다음 생각을 심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실제가 아니다. (Her world was not real)’ 코브는 팽이를 돌리고 금고를 잠근다. 팽이를 돌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팽이가 꿈 속에서는 영원히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게 문제다. 즉 마음 속에 팽이가 영원히 돌아가게 되면서 본인이 팽이가 쓰러지지 않는 꿈 속에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된다. 코브의 ‘인셉션’으로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실제가 아니라고 믿게 된 멜은 코브와 함께 기차의 선로 위에 눕는다. 코브는 멜을 안심시킨다.

코브 : 당신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어. (You’re waiting for a train.)

당신을 멀리 데려가 줄 기차. (A train that will take you far way.)

가고 싶은 곳은 있지만 (You know where you hope this train will take you,)

어디로 도착할진 몰라. (you can’t know for sure.)

그런데 상관없어. (Yet it doesn’t matter.)

멜 : 왜냐하면 당신이 함께일 테니까! (Because you’ll be together!)

그렇게 둘은 ‘림보’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그런데 처음 해본 ‘인셉션’에 코브가 전혀 알 수 없었던 건, 몰라서 코브가 간과했던 건, ‘인셉션’한 생각이 암처럼 자란다는 것이다. 멜이 실제 세계에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실제가 아니’기에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믿게 될 거라고 코브는 예상하지도 못했다. 꿈에서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실제’가 아니어서 ‘죽으면’ ‘현실’로 ‘돌아오지만’, 현실에서 똑같이 믿으면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멜은 ‘현실’이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코브의 ‘인셉션’은 유감스럽게도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코브가 멜의 죽음을 자초했다고 보면 안된다. 코브의 의도는 멜과 함께 꿈에서 깨는 것까지,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한낱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모든 일은 그저 일어날 뿐이다. 비로소 진실이 드러나자 멜은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면서 꿈에 같이 남자고 부추긴다. 순간, 화면이 전환된다. 온 사태가 촉박하다. 밴은 수면 위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고, 사이토는 마지막 힘을 다해 경비대들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죽고, 아서는 음악을 틀어 신호를 보내고, 그 신호를 듣고 임스는 피셔에게 제세동기를 가동한다. 그리고 그 신호가 ‘림보’에도 닿았다. 피셔를 잡아둔 멜에게 코브가 남으면 그를 보내줄 거냐고 묻자, 멜이 반색하며 바로 피셔가 어디 있는지 말해준다. 아리아드네는 코브에게 멜과 함께 있기 위해 남으면 안된다고 경고하고 피셔의 상태를 확인하러 베란다로 향한다. 코브는 아리아드네의 걱정과 달리 남지 않겠다고 확언한다. 멜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눈빛에도 냉철함이 돌기 시작한다. 멜이 잔영이 아니라 진짜라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러나 현실이 없는 꿈은 환상이다. 환상 속에선 현실의 복잡함(complexity)과 완벽함(perfection)이 느껴지지 않는다. 꿈 속의 멜은 실제 멜의 그림자(shade)에 불과하다. 그러자 멜은 급기야 코브를 칼로 찔러 버린다. 트라우마는 기어이 그 주체자를 해친다. 복부를 잡고 코브가 쓰러지자 총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멜이 쓰러진다. 아리아드네가 멜을 총으로 쏜 것이다. 코브가 말했던, 하지만 결국 아리아드네가 해내는 ‘임기응변’이다. 아리아드네는 코브를 베란다 밖으로 밀어 버려 ‘킥’까지 해낸다. 아리아드네는 그 이름에서도 알려주듯 해결사다. 아리아드네가 다시 한번 멜을 향해 총을 쏘려고 하자 코브가 쏘지 말라고 외친다. 공교롭게도 화면은 전환된다. ‘림보’에서 3단계의 꿈으로 올라온 피셔에게 임스는 얼른 금고실 안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한다. 동시에 밴은 수면 위로 닿을락말락 거의 다 떨어졌고, 시간을 재던 아서가 드디어 기폭장치를 누른다. 피셔가 들어간 그 방엔 실제 세계에선 이미 죽은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있다. 코브의 팀원들은 내내 그 방은 피셔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던 바 있다. 원초적 무의식인 ‘림보’ 바로 이전 단계이자 꿈 속의 꿈 속의 꿈인 3단계는 사고(思考)의 가장 기초의 격이니 단순히 누군가가 침범해서 꾸민다고 해서 납득될 수 없기에, 3단계의 금고실은 가장 비밀스럽고 자주적이며 자발적인 이해가 이루어지는 공간에 가깝다. 앞선 2단계 꿈을 통해서 코브의 팀이 끊임없이 상기시켰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피셔의 금고실에 운명(殞命) 직전의 아버지를 출현시킨 것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또한, 코브가 후회막심으로 자꾸 꿈에서 아이들을 보고, 무의식으로 내려갈수록 진실의 밑바닥을 마주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피셔가 3단계 속 다른 이들이 들어가면 아무 의미 없는 금고실에 아버지와 그 병상을 무의식적으로 배치한 건 피셔의 아버지에 대한 마음에서 기인했다고 여길 수 있다. 아버지는 말을 더듬으며 피셔에게 실망했음을 피력하려고 한다. 피셔의 눈빛엔 유순하고 애처로운 기운이 감돌고,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가 아버지처럼 되지 못해 실망하셨죠?” 그런데 아버지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온다: “아니야. 네가 나처럼 되려고 해서 실망했다.” 이건 실제 상황이 아니라 피셔의 꿈이므로 피셔의 눈 앞에 있는 아버지는 실제가 아니라 피셔의 무의식이다. 욕망이다. 코브의 팀이 앞선 2단계의 꿈을 통해 세뇌하다시피 했던 ‘아버지는 내가 본인과는 다른 길을 가길 원하신다’는 생각이 끝내 피셔 본인의 주관(主觀)이 된 것이다. 화면은 전환된다. 무중력의 2단계 꿈, 엘리베이터가 폭발의 추진력으로 솟구치자 팀원들이 그 영향으로 엘리베이터 바닥에 닿게 되는 모습을 두고 화면은 다시 3단계를 비춘다. 아버지가 금고로 손짓하자 피셔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비밀번호로 528491를 입력하자 금고가 열린다. 금고 위 병상맡엔 피셔가 각별하게 여긴 사진이 깨지지 않은 액자 안에 잘 놓여 있고, 금고 안엔 최종 유언장이 들어 있고, 게다가 사진 속 그 바람개비도 있다. 피셔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향해 몸을 돌리지만 아버지는 죽어 있다. 피셔는 죽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흐느낀다. 코브의 팀이 피셔의 무의식에 끊임없이 주입시켰던 ‘인셉션’의 수사학적 조건인 금고, 번호, 유언과 그를 위해 꾸며낸 서사인 유언에 대한 비화(秘話)의 산물이 금고실에서 전부 나타났고, 피셔가 종내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손을 잡은 걸로 보아 아버지에 대한 긍정성 감정을 부각시킨 그들의 전략은 종국엔 성공적으로 통했다. ‘인셉션’이 완료됐다. 임스는 안도하며 기폭장치를 누른다. 1단계 꿈에서 밴은 수면 위를 통과하고 있고, 2단계 꿈에서는 엘리베이터의 충돌로 팀원들의 몸이 잠시 붕 떠오르다가 바닥에 쿵 부딪치고 있고, 3단계 꿈에서는 폭탄이 터지며 건물이 붕괴되고 있다. ‘킥’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아서, 임스, 피셔는 ‘킥’으로 인해 이전 단계에서 차례차례 깨어나고 있다. ‘킥’이 끝나기 전에 아리아드네와 코브도 돌아가야 한다. 코브는 자신은 멜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사이토를 찾아서 돌아가겠다고 한다. 아리아드네는 ‘킥’을 위해 건물 밖으로 몸을 내던지기 전 코브에게 사이토를 찾아서 돌아오라며 마지막으로 당부를 남긴다.

아리아드네 : 스스로를 잃지 마요! (Don’t lose yourself!)

그렇게 아리아드네까지 ‘킥’에 합류한다. 잇따라 2, 3단계의 꿈은 무너졌고, 슬로모션이 끝난 밴의 추락은 거대한 첨벙 소리를 내며 강물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강에 잠기는 밴에서 피셔가 실제로는 임스인 브라우닝을 끌고 빠져나와 뭍으로 올라온다. 브라우닝은 피셔에게 사과하고, 그런 브라우닝에게 피셔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자신의 길을 갈 것이라고 술회한다. 임스는 ‘인셉션’의 성사를 확인하고 미소를 짓는다. 밴에 탑승했던 나머지 일원들도 피셔의 시선이 닿지 않은 육지로 올라온다. ‘림보’에 있는 코브와 사이토를 제외하고 말이다. 아서는 아리아드네에게 자초지종에 대해 묻는다. 아리아드네가 코브는 사이토를 찾기 위해 남았다고 대답하며 그는 괜찮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꿈꾸는 자에 대한 믿음이자 신뢰다. 아리아드네의 확신대로, 코브는 정말 양호할까.

그사이, 코브는 멜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이 대목은 피셔의 금고실 장면과 같은 의의를 공유하고 있다. 바로, 스스로에 대한 용서, 무의식 간의 화해다. 이 꿈은 피셔를 위해 마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코브의 꿈이기도 하다. 코브 자신이 믿는 진실에서 발원된 죄책감을 내려놓는 과정이다. 1단계에선 아리아드네가 조력자로서 코브로 하여금 죄책감을 인식하도록 도왔다. 2단계에선, 아이들의 모습이나 멜과 결혼 기념일마다 가던 호텔에서 벌어진 사건의 흔적들을 남모르게 마주해야 했다. 인간은 후회로 남은 일들과 죄책감을 야기하는 일들을 저도 모르게 회고하는 법이다. 3단계에선, 멜을 정작 총으로 쏘아야 할 때 쏘지 못하다가 얼김에 쏘아 죽이고 말았다. 멜은 트라우마적 존재이기 전에 코브가 추억으로 꿈을 꿀 때마다 불러들일 정도로 그리운 아내다. 너무도 사랑했기에 죄책감을 더더욱 내려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코브가 멜을 차마 쏘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행동은 아내가 이미 죽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뜻한다. 아리아드네가 아무리 옆에서 설득해도 코브는 꿈속의 멜을 총으로 아무렇지 않게 쏴 죽일 무의식적 투영체가 아니라 여태껏 사랑하고 있는 실존적 존재로 분별했다. 그토록 애틋한 멜이 자신이 쏜 총을 맞고 쓰러진 모습을 목도한 코브가 얼떨떨한 모습을 보였던 건 어쩌면 멜이 실제 세계에서 이미 죽은 아내라는 현실 관념을 그때까지 잠재적으로 거부하다가 그제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데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림보’에서 코브가 멜을 죽이는 시나리오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멜이라는 대상을 상징적인 관점에 비추었을 때, 트라우마는 간단한 방법으로 없앤다고 해서 쉽사리 연멸하는 존재가 아니다. 극중 아리아드네는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미궁의 돌파구를 찾는 인물이며 코브는 트라우마에 맞서 꿈을 현실로 이뤄야 하는 인물이다. 아울러 꿈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는 두 명 모두에게 있어 그 성패는 멜의 존망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아리아드네의 앞엔 장벽이 놓여 있고, 코브의 입장에선 트라우마가 성취의 열쇠를 쥐고 있다. 따라서 아리아드네는 총을 쏨으로써 장벽을 허문 셈이고, 문제 해결의 역할이 끝나자 퇴장하지만, 코브에겐 꿈을 이루려는 자로서 마지막으로 끝마쳐야 할 일이 남았다. 바로, 성찰과 자각이다. 성찰과 자각은 인정(認定)과 직시에서 기인한다.

멜 : “나랑 같이 늙어가는 게 꿈이라고 당신이 그랬잖아. (You said you dreamt that we’d grow old together.)”

코브 : “그리고 우리 이미 그렇게 했지. (And we did…)”

사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미어지지만 긍정하지 않으면 괴로우니까 기어코 말로 옮기자면, 꿈을 꾸는 것만큼 중요한 건 현실을 살아내는 것이다. 멜이 사랑하는 아내 외에도 트라우마가 된 원인은 코브가 꿈만 쫓은 데 있다. 현실은 한계에 좌우된다. 꿈에 비하면 현실은 한없이 초라하고 곤궁하다. 그렇다고 해서 꿈이 현실의 대리만족이 되서는 안된다. 꿈은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생각의 반경에 자유를 부여하는 심상이고, 상상이고, 구상이다. 꿈에서 마음껏 시도해보고 얻은 교훈으로 현실에서 도전해야 한다. 이것이 곧 꿈이 주는 선물이고 보상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하고 자유자재임에 마음을 뺏겨 단꿈에 젖는다면 꿈은 공포가 되고 그 꿈의 교훈은 대가가 된다. 멜이 말한 대로, 코브는 멜과 늙어가기를 꿈꿨다. 그러나 한편으론, 시나리오 속 대사를 잠시 빌려오면, 건축자로서 그땐 현실이 불충분했고(But that reality wasn’t enough for me then), 그래서 꿈 공유로 충족감을 맛보았으리라. 결국 ‘꿈꾸기를 멈출 수 없게 되었다(I kept pushing things. I wanted to go deeper and deeper. I wanted to go further).’ 욕심이다. 자제력이 아닌 욕심이 가해진 꿈의 끝은 고립이다. 꿈이 생각이 아닌 공간이 되는 동시에 현실이 되었기에 그들은 ‘림보’에서 그렇게 늙어갔다. 그들의 기차는 뜻밖의 곳에 도착하고 말았지만 둘은 함께이니까, 씁쓸하게도 코브는 꿈을 이룬 셈이었다. 그리고 일장춘몽(一場春夢)에 빠진 대가로 실제 세계에서 끝내 아내를 잃은 현실을 살아야 했고, 아내와 늙어가는 현재는 없다. 이게 바로 꿈만 꾸는 것의 진실이다. 이를 인정하고 직시하며 멜을 떠나보내고, 현재가 없는 꿈이자 현실에서 깨어날 차례다. 성찰하고 자각할 차례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길래 꿈을 꿨는가.

우린 지금 혹은, 다시 영화의 첫 장면을 조우한다. 남루한 행색에 수염이 구중중하게 돋고 고생티가 물씬 나는 얼굴의 코브가 파도 치는 해변가에 쓰러져 있다. 그는 노인 앞으로 끌려 간다.

사이토 : “날 죽이러 왔나? (Have you come to kill me?)”

“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I’ve been waiting for someone.)”

사이토의 말에 코브가 반응한다.

코브 : “잘 기억나지 않는 꿈에서 만난 사람? (Someone from half-remembered dream?)”

사이토 : “코브? (Cobb?)”

사이토가 코브의 이름을 말한다. 연달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지난 시간들을 회억한다.

사이토 : “불가능해. 우리 둘 다 젊었는데 지금은 나만 늙어버렸어. (Impossible. We were young men together. I’m an old man.)”

그 말에 코브가 익숙하게 호응한다.

코브 : “후회로 가득차? (Filled with regret?)”

사이토가 자연스레 덧붙인다.

사이토 : “홀로 죽는 날만 기다리며. (Waiting to die alone.)”

사이토를 찾겠다는 그간의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은 거칫한 얼굴의 코브는 아주 오래된 것처럼 희미한 기억을 떠올린 건지 전율에 휩싸인 듯, 하지만 매우 확고한 어조로 대화를 계속한다.

코브 : “당신을 데리러 왔어요. (I’ve come back for you.)”

“상기시켜 줄 게 있어요. (to remind you of something…)”

“당신이 한때 알던 거에요. (something you once knew.)

화면이 도무지 쓰러질 기미가 없는 팽이를 비춘다.

코브 : “이 세상은 진짜가 아니에요. (That this world is not real.)”

사이토가 화답한다.

사이토 : “우리가 했던 약속을 지켜달라고 온 건가? (To convince to honor our arrangement?)”

코브 : “믿음을 가지고, 맞아요. (To take a leap of faith, yes.)”

코브가 호소한다.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코브 : “돌아가요. 그럼 우리 둘 다 다시 젊어질 수 있어요. 같이 돌아가요. (Come back. So we can be young men together again. Come back with me.)”

‘림보’에선 자신만의 성을 짓고 산 사이토는 함빡 늙어 있었다. 반면, 사이토와 마찬가지로 ‘림보’에 있었던 코브는 약간 나이 들어보이는 정도일 뿐 그처럼 아예 노인이 되진 않았다. 코브에게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경험이 있으면 타인의 말에 덜 흔들리게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경험이 있다는 게 유리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험이 생기면 새로움에서 멀어진다. 어떤 경험을 하든, 실패에 관련되건 성공에 관련되건, 모든 경험은 족쇄가 된다. 따라서 경험은 올바로 써야 한다. 새로움은 미지에 있다. 인간은 미지가 두려워 경험을 답습하려 든다. 하지만 경험의 용도는 되풀이하는 데 있지 않다. 경험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거나 줄이는 데 소용이 있다. 먼젓번 ‘림보’에 갇혀 노인이 된 경험은 이번 ‘림보’에서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작용해 코브는 노인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림보’에서 늙는 건 실제 세계에서 겪는 외면적 노화나 정신적 성숙과 상이하다. ‘림보’는 원시적 영역이다. 태초에 상응하고 자아의 근원이다. ‘림보’엔 바다가 있다. 바다란 지구의 양수이자 태곳적 비밀을 간직한 신비의 터전이요, 샘과 계곡과 강의 물이 모여드는 화합의 장이며 정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그리고 정립되지 않은 카오스다. ‘림보’는 바다에서 시작된다. 꿈에서 정신을 차리면 어느 상황의 도중에 속해 있지만, ‘림보’에선 마치 바다를 표류하다 파도에 떠밀려온 방랑자처럼 해변에서 눈을 뜬다. 생명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간다. 육지는 토대이다. 건립은 단단한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에 코브는 빌딩숲을, 사이토는 일본식 고성을 지었다. 왜 코브는 빌딩숲을, 사이토는 고성을 지었는지 그 어떤 논리나 상식, 수식으로도 알아낼 수 없다. 자아란 내재다. 하나의 씨앗이다. 어떤 재능과 잠재력, 관념, 개념, 인식, 감정, 배움이 무슨 이유와 무슨 원리로 그 안에 담기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설명을 초월한다. 그냥 일어날 뿐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씨앗은 하나의 세계다. 씨앗은 싹을 틔우고 줄기를 높인 후 꽃을 피운 다음 잎을 기르고 열매를 키운다. 그러기 위해선 세계를 탈피해야 한다. 씨앗의 껍질을 뚫고 땅속을 나와 바깥 공기를 마주해야 한다. 햇빛, 바람, 비, 그리고 나와 같은 생명체들을 만나야 한다.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세계이지만 좁고 작은 세계에 불과한 ‘림보’에서 늙었다는 건 폐쇄되고 경색되며 경직된 사고관을 뜻한다. 그곳은 막혀 있어 새로운 생각이 들어설 수 없다. 따라서 사이토가 스스로 ‘림보’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너무 멀리 와버려 더 이상 어디로 갈지 아예 모르는 형국이다. 두 가지가 긴요하다, 믿음과 자신감. 사이토는 코브를 보자마자 자신을 죽이러 왔는지 묻고 본인이 오래 전 직접 했던 말을 제입으로 다시 한다. 사이토의 본능과 직감이 말하고 있다, ‘약속을 지키려면(“honor our arrangement”) 꿈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이토는 아리아드네의 말처럼 ‘스스로를 잃지 않았다(“don’t lose yourself”).’ 코브는 사이토를 믿어준다,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도약하라(“take a leap of faith”).’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한 최후의 단계는 자기자신에게 믿음을 가지는 것.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잊지 않는 것. 한 마디로, 자신감. 코브는 아이들에게 돌아가려는 사람이고, 사이토는 실제 세계로 돌아가 다시 젊어지려는 사람이다. 멜은 꿈이 실제 세계가 아니라고 믿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데 반해, 코브와 사이토는 애초부터 꿈이 실제 세계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다. 이제, 생각에서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 다 왔다. 꿈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단계의 끝은 꿈을 끝내는 것. 끝은 곧 시작이다. 죽어야 깨어난다. 사이토가 팽팽 돌아가는 팽이 옆 권총으로 손을 가져간다.

코브는 기내 안에서 눈을 뜬다. 한바탕 꿈을 꾼 건지 기분이 아련하고 몽롱하다. 전부 지나갔구나, 이제까지 어디서 어떻게 보낸 시간이든 결국 과거다. 아리아드네와 아서가 코브를 기특하게 바라보고 있다. 사이토와 눈이 마주친다. 사이토는 퍼뜩 정신을 차려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이제 코브는 입국 소속을 밟는다. 여권을 건넨다. 조마조마하다. 그때 도장이 쾅! 찍힌다. 동료들과 눈인사를 마치고, 피셔를 스쳐 보내고, 입국장 밖에서 마일스 교수를 만난다. 그리고 이제 그토록 바라던 집이다. 실감이 나지 않는 걸까. 아직은 숨죽인 채 팽이를 돌려 본다. 아이들은 저기 있다. 마일스 교수가 아이들을 부른다. 이게 정말 오매불망 바라던 현실이 맞나? 현재가 맞나? 과거가 아니고? 현실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현실이다. 현실은 공간, 장소가 아니다. 매 순간이고, 상황이고, 상태다. 현재다. 사고가 작용하고 오감이 움직이고 숨을 쉬는 일련의 활동이 멈추지 않는 현재다. 나 자신이 살아있는 찰나이다. 고로, 아무리 꿈 속을 헤맸다한들 헤맨 주체도 나 자신이니,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바로 지금 당면하는 그 태도가 곧 현실이다. 현실은 초지일관 사는 것이다. 아주 오래 돌고 돌아왔더라도 오디세이의 여정도, 헤라클레스의 공적도 끝이 난다. 집이다.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아이들의 얼굴이 마침내 보인다. 아이들이 아빠를 향해 달려온다. 햇빛이 눈부시게 빛난다. 팽이가 돌아가건 말건 상관없다. 눈앞에 현실이 있고,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해석도 여기까지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데도 어떤 여운 때문인지 자리를 차마 뜨질 못하는 관객이 된 것처럼, 해석을 마쳤는데도 아리송한 기운이 가시질 않는다. 기분이 요상하다. 너무 떨떠름한 나머지 괜히 울적하다. 아쉽기 때문일까? 사력을 다해 추리하고 곱씹어도 아직도 몇몇 부분이 미심쩍다. 예를 들어, 1단계 꿈의 ‘킥’으로 밴이 수면 위로 떨어지는 것임을 코브는 어떻게 알았나, 멜이 칼로 코브의 복부를 찔렀는데 코브는 어쩜 그리 멀쩡할 수 있나, ‘림보’에서 코브는 사이토를 어떻게 찾았는가 등 의아한 부분이 군데군데 존재한다. 특히, 3단계 꿈에서 멜이 피셔를 총으로 쏘고 난 직후, ‘림보’에 떨어진 상태에서 실제 세계로 돌아오면 정신 나간 사람이 된다면서, 임스와 코브가 기업의 후계자인 피셔를 그대로 두고 꿈에서 나올 생각을 하다니! 너무 이상하다. 현실적으로 그 이후에 생길 모든 일들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고심도 전혀 않고 ‘킥’을 곧바로 하려고 들었는지 코브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게다가, 시나리오까지 읽고 나니 가장 의아한 부분은, 순서상 비행기에서 10시간을 확보했다는 대화가 먼저 나오고 10시간의 꿈속 시간 계산이 다음에 나와야 합당한데, 감독이 무슨 의도로 시나리오상 순서를 바꿔서 편집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10시간은 해석상 중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영화 흐름에서 나름 긴요한 정보인데, 시나리오와 다르게 편집하면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있어서 전개 오류에 해당되지 않나 싶어 의아하다. 관객 입장에선, 시간 계산을 할 때 왜 굳이 10시간을 예로 들어야 했는지 논리적으로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데도, 막상 영화를 볼 땐 전혀 개의치 않다가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야 실은 부자연스러웠다는 걸 발견했으니 이래도 저래도 이상하긴 매한가지다. 그리고 사실이자 물론, 나의 해석은 절대적인 정답이 아니다. 심지어, 나는 모르지만 해석 중 어딘가는 틀렸을 수 있다. 놓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해석 가능의 범위를 넘어선 부분은 슬며시 넘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련하긴 후련하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는지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정답인지 오답인지 진실은 그 둘 중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건 지나가서 고칠 수 없는 과거가 아닌 눈앞에 당도한 현실이기에.

당신은 아마 이 영화의 결말에서 이런 질문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코브가 마침내 아이들을 만나는 건 꿈인가? 현실인가?” 한 영화의 결말이 이렇게까지 당혹스러울 순 없다. 팽이는 야멸차게도 끝내 명료한 답을 주지 않았다. 당신은 정답을 확실하게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당신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건 단지 ‘이게 꿈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정답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궁금한 관객들을 위해, 일반적으로 나와 있는 결론이자 나도 동의하는 답을 말하자면, 코브가 아이들을 만나는 건 현실이다. 단번에 알아차리긴 쉽진 않지만, 한편으론 엔딩 크레딧이 증명하듯 결말 장면에선 아이들이 이전 모습보다 조금 컸다. 직접 대조해 보면 조금 더 분명하긴 한데, 머리 길이라던가 체구에서 차이가 난다. 결정적으로, 또한 자못 단순하게도 영화 속 코브의 반지라는 아주 사소한 것에 눈에 불을 키고 보거나, 혹은, 의구심을 가지거나, 단순히 흘려보내지 않고 의미를 두면, 어느 장면의 시공간이 현실이고 아닌지 아주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은 오직 정답을 아는 후련함만 위하여 이 영화를 끝까지 감상했나. 진심으로, 그게 전부였나.

코브가 비행기에서 깨어나기 직전 우리가 본 첫 장면이 다시 나올 때, 원론적으로는 여러 질문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늙은 사이토의 ‘오래 전 꿈에서 본 남자’라는 발언에 근거하면 지금까지의 일들은 꿈인가, 만약 꿈이라면 정확하게 어느 지점에서 꿈이 시작되는가, 만약 아니라면 이는 그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결과-원인-결과’로 시간 순서를 편집한 것뿐인가, 일본 고성에서 비행기로 넘어오는 장면은 또 다른 꿈 속으로 향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누군가의 꿈 속인가. 실은, 이 ‘인셉션’이라는 영화가 질문이 얼마든지 꼬리에 꼬리를 물 수 있는 영화다. 이 질문들의 답을 구태여 고안하지 말길. 그보다는, 내가 앞서 사이토가 ‘인셉션’을 제안하기 직전의 일들에서 발견한 단서를 정리하며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말한 것 기억하나.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늙은 사이토에서 젊은 사이토가 되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건 단순히 감독이 영화 전개를 위해 활용한 편집 기법인가, 늙은 사이토의 회상인가. 즉, 현재에서 꿈으로 넘어오는지, 꿈에서 꿈으로 넘어가는지 영화의 순행으로만 비췄을 때 당신은 구별할 수 있었나. 그런데 굳이 내가 질문하지 않아도 당신은 이 영화를 맨 처음 감상할 때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감상하였는가. 아니면, 신기하고 안타까워하고 놀라워하며 영화를 순행적으로 신나게 따라가다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아연해서는 “코브가 아이들을 만난 건 꿈인가? 현실인가?” 질문했나. 장담하건대, 이 영화를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본 관객은 없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영화를 만끽하는 동안 무의식 속에서 생겨난 질문들의 답을 나름대로 찾기 위해 첫 관람 이후 나처럼 영화를 도중에 중지시켰다가 재생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재관람한 관객은 있을지언정, 적어도 첫 관람 때 그렇게 보는 관객은 없다. 솔직해지자, 영화 보는 동안은 감탄하기 바쁘지 않나.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 것이 아니다. ‘이 영화를 즐겼느냐, 나아가 이 영화를 보는 현실을 잘 살아가고 있느냐’, 정리하자면,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다. 아, 어쨌든 그때 질문을 안 한 이유는 영화를 못 즐길까 봐, 나아가 이 글을 못 즐길까 봐 그랬다. 내가 만약 계획대로 질문을 던졌다면, 당신은 질문에 신경 쓰느라 영화의 재미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충분히 영화를 즐기고 있었기에, 또 나의 글을 즐기고 있었기에 질문의 존재 여부는 안중에도 없었으리라 장담한다. 어차피 당신은 아주 방금 밝힌 그 질문을 자세히 기억도 못할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조차도 여기까지 글을 쓰다가 질문이 뭔지 잊어버려 다시 기억하느라 애먹었다. 이렇듯, 도중에 즐거웠으면 된 거다. 그때그때 딴생각 없이 눈앞의 현실을 즐겼으면 됐다.

영화의 감독이자 발상의 주인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Christopher Nolan)에게 현실은 늘 중요했다. 놀란 감독은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는 학창시절의 종결을 선언하는 졸업식에서 ‘꿈을 쫓으라(Chase the dream)’는 전통 혹은 관례를 따르지 않는 대신 “현실을 좇으라(Chase your reality)”고 설파한 바 있다. 감독은 “우리가 현실을 꿈의 가난한 사촌 정도로 여기고 있다(I feel that over time, we started to view reality as the poor cousin to our dreams)”고 지적하며 “우리의 꿈, 가상현실, 우리가 누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추상적 개념도 결국 현실의 부분집합(I want to make the case to you that our dreams, our virtual realities, these abstractions that we enjoy and surround ourselves with – they are subsets of reality)”임을 주장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인셉션’의 문제적 마지막 장면을 예로 들자면, 코브가 아이들과 함께 있게 되면서 팽이에 더 이상 개의치 않는 모습에서 “주관적 현실(he was in his own subjective reality)”의 존재와 “여러 층의 현실의 유효 가능성(He didn’t really care anymore, and that makes a statement: perhaps, all levels of reality are valid)”을 읽어낼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영화는 그저 “픽션이고, 일종의 가상현실(it’s fiction, a sort of virtual reality)”인데, 관객들은 왜 그리도 모호한 끝맺음에 탄식하고 분개하는 걸까? 어차피 영화 속 이야기는 실제도 아닌데, 남이사 팽이가 쓰러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그러나 영화가 막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여전히 팽이가 쓰러졌는지 아닌지 알고 싶다. “그 문제가 사람들에게 중대한 이유는 현실에 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It matters to people because that’s the point about reality).” “현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하다(Reality matters).”

이즈음에서 나는 ‘인셉션’ 시나리오를 읽은 일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영화를 연속해서 5번을 보았는데도 의문이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아, 또 내가 흘려들은 대사를 확인하기 위해 읽은 원문 시나리오는 영화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자랑했다. 첫 정독에서 일부 의혹이 해소되자 나는 신이 나서 곧바로 재차 읽었다. 여전히 흥미진진했지만,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다행히도, 한편으론 굉장히 의외로 그 연유를 금방 간파했다. 시나리오가 소설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부분은 시나리오는 영화 창작의 기반이지만 소설은 그 자체로 원작이라는 데 있다. 시나리오가 재미있게 읽혔던 건 이미 영화를 보아서, 다시 말해, 시나리오의 지문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영화 속 장면을 무의식 중에 상기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나는 시나리오 그 자체를 ‘읽었다’고 믿었는데, 깨닫고 보니 그저 영화를 회상하고 있었다. 시나리오의 지문들은 영화로 태어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현실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현실은 실존이다. 이 세상에 실존하는 모든 존재는 현실에 기반하지만, 그 현실은 또 생각에 기초한다. 역으로, 하나의 생각을 실체로 옮기는 것, 즉 현실화도 중요하다. 구상만으론 모든 게 완벽한 것만 같다. 구상은 이상을 건설한다. 구상하는 당시만 해도, “부드럽고 매끈한 겉면의 브리 치즈를 완성한 기분이 들 터(We felt very much as if we had accumulated this whole wheel of Brie of knowledge)”이지만, 놀란 감독의 깨달음에 의하면, 우리가 생각만으로 얻은 건 “구멍이 군데군데 숭숭 뚫린 스위스 치즈(What I realize, it’s actually Swiss cheese – those gaps in there are the point)”다. 이상과 현실 사이엔 격차가 있다. 또, 아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 구멍이 핵심이다(They’re the important part).” “있는 줄도 몰랐던 그 구멍들을 세상 밖으로 나가 경험으로 채우게 될 텐데, 어떤 건 경이롭고 어떤 건 끔찍하겠지만, 그렇게 배우는 거다(because you’re going out there and fill those gaps you didn’t even realize you had, and you’re going to fill them with experience. Some of it marvelous, some of it terrible. And you’re going to learn that way).” 일찍이 갇힌 공간에서 “우리가 배운 건 지식 그 자체라기보다는 배우는 방법과 배움의 가치(You haven’t just learned a body of knowledge; you’ve learned how to learn, you’ve learned the value of learning)”일 뿐이니, 세상 바깥으로 나가 새로운 배움을 얻어 수많은 구멍을 채우는 것이다. “그중 일부는 가장 소중한 것들로 채워진다. 새로운 견해, 새로운 생각, 더 나아가 세상을 바꿀 것들로 말이다(Most importantly, some of those gaps will be filled with the most precious thing of all: new thoughts, new ideas, things that are going to change the world).” 세상을 바꾸고 채우는 건 실체이고, 그 실체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은 가장 작은 씨앗이다. 그 씨앗은 시간이 지나면 실체로 자란다(The idea that you can plant the seed of an idea that will grow into something more substantial over time.)” 놀란 감독의 ‘생각의 실체화’ 이론으로 ‘인셉션’에 왜 하필 미궁, 기차, 바다가 출현했는지 궁금증을 풀 수 있다. 머릿속의 인류 보편적 관념과 영어권 표현 어구가 영화를 통해 실제 모습으로 실현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궁에 빠지다’라는 표현이 쓰이는 만큼 미궁은 일반적으로 사유의 복잡다단함을 상징하고 있다. 기차는 맥락을 놓쳤을 때 쓰는 영어 관용구인 ‘lost one’s train of thoughts’에서 확인되듯 영어 단어상 연속, 일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림보’에서 코브와 멜이 탈출 수단으로 기차 선로 위에 눕고 그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건 외부로부터 단절된 생각이 다시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림보’ 속 바다(sea)는 혼란스러운 상태를 형용하는 영어권 표현인 ‘all at sea’에서 기인한 걸로 보인다. 결국, 뇌리 속 생각이란 1차원 존재들은 지면 위 활자인 지문들이 되어 2차원적으로 옮겨진 다음, 3차원의 존재인 영화로 탄생된 것이다. 코브의 사상은 놀란 감독의 사상이고, 놀란 감독의 사상이 코브의 사상이었다. 놀란 감독의 작품과 그 안의 세부 요소들은 감독의 일부이자 전부였다. 이 생각이란 씨앗 하나가 실체가 되어 세상에 경이를 전달하는 동시에 당면한 현실을 더 나은 현실로 꾀한다는 견해를 놀란 감독은 영화로 실현했다. 감독이 만든 작품들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행(行)에 해당된다. 일맥상통한 그 작품들을 보면 감독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생각들은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 드러나 있다. 감독은 초기 작품에선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기법을 이용했다. 영화 ‘메멘토(Memento)’는 현실 회피에 대한 강렬한 경고 그대로였다. 영화 ‘프레스티지(The Prestige)’는 ‘메멘토’에서 낸 경고의 목소리를 명성의 허무에 이입해 올바른 신념의 중요성을 유난히 부각시켰다. 이 초창기 작품들에서는 탄탄한 실력과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당시 신성의 주눅들지 않은 재기발랄한 출발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작품들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놀란 감독은 번뜩이는 연출 재주와 작가적 서사 전개 기량, 그리고 철학적 전언을 한결 세심하게 표현하며 최악의 상황과 분투적 인물을 통해 본보기의 미덕을 표출한다. 놀란 감독 작품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현실을 당면한다. 피하지 않는다. 모두 불리한 현실을 저마다의 신조와 방식대로 헤쳐 나가거나 아예 좋은 세상이 도래하게끔 일절의 타협도 없이 타개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배웠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인터스텔라(Interstellar)’의 대사 중(中) “Murphy’s Law doesn’t meant that something bad will happen. It means that whatever can happen, will happen”), 일어난 일은 일어났으니(‘테넷(Tenet)’의 대사 중(中) “What’s happened happened”)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재인 눈앞의 현실을 살아야 한다. 인터스텔라의 브랜드(Brand) 박사가 피력했듯, 우리가 아무리 대비해도 현실은 생각했던 이상과 다르다. 그러나 우린 살아있기에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현실 속 온갖 변수의 난립과 그로 인한 난항을 타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덩케르크(Dunkirk)’의 군사들처럼. 또한, 두려움으로 움직이고 한 개인인 동시에 얼마든지 영웅이 될 수 있다,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인 것처럼(‘Batman Begins’, ‘The Dark Knight’, ‘The Dark Knight Rises’). 그런 식으로, ‘인터스텔라’의 안내에 따라, 우린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나 그랬듯이 답을 찾을 것(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이며, ‘테넷’이 준 언질에 근거해, “우리의 무기는 무지(ignorance is our ammunition)”이므로 “이해하려 애쓰지 말고 느껴’(Don’t try to understand it. Feel it)”야 한다.

한 명의 감독, 어쩌면 한 명의 창작자, 예술가가 다작(多作)하며 줄곧 감탄스러운 작품을 내놓는 것도 모자라 예술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거두는 경우가 당연하지도 않으면서도 드문데, 놀란 감독은 이렇게 어려운 일을 곧잘 해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아예 예측조차 불가능해 신작의 소식이 들리는 매번 궁금하기를 멈출 수 없을 뿐더러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그의 재능에 탄복하기 바쁘다. 개인적으로, 한 사람이 내는 성취에 ‘역시’라는 수식을 붙이기를 망설이는데, 놀란 감독만은 예외로 둘 정도로 그의 작품에 거는 기대는 전혀 아깝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든 작품이 아쉬움 하나 없이 완벽하다고 치켜세우고 싶지 않다. 그러나 언힐(言詰)하는 따위의 감정(鑑定)은 무의미하다. 나는 영화 감상에서 순응되는 감정(感情)에 가치를 두고 싶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 놀란 감독의 모든 영화가 굉장하지만 ‘인셉션’이 차지하는 위상은 조금 남다르다. 아마 놀란 감독의 작품들 중 최고를 꼽으라면,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할 것이다. 워낙 훌륭한 영화가 많으니 쉽사리 선택하기가 망설여진다. 저예산 독립 영화의 진수를 보여준 ‘메멘토’? 히어로 영화도 철학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역사의 포문을 연 ‘다크 나이트’? SF 영화의 존재 이유라고 견주어도 무방한 ‘인터스텔라’? 솔직히 말해 나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 ‘덩케르크’를 최고로 친다. 이미 나올 대로 나온 전쟁 영화 장르에서 완전하게 새로웠으며, 기술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흠잡을 곳 없고, 놀런 감독의 편집 연출과 cg를 쓰지 않는 정통적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실화 바탕이란 한계에서도 영화는 충분한 것 이상으로 약여했다.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많았는데도, 또한 놀런 감독 작품들 중 유독, 모두의 감정선이 자연스러웠다. 그렇지만, 그의 대표작은 ‘인셉션’이라고, 그 어떤 작품도 ‘인셉션’을 넘어설 수 없다고 감히 단언한다. 앞으로도 기술적으로 더더욱 무결하고 철학적으로 한층 공고하고 심오한 수작, 명작, 걸작이 나올 것이다. 최고의 작품은 감독 본인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경신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졸업 연설을 토대로 헤아리자면, 그는 자신이 배워 온 대로 계속 해 나갈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어느 작품도 ‘인셉션’이란 젊음을 따라잡을 수 없다. ‘결과-원인-결과’ 구도는 ‘메멘토’와 ‘프레스티지’에서 더 큰 작품을 위해 실력을 절제한 일종의 포석으로 쓰이다 ‘인셉션’에서 경지에 이르렀다. ‘배트맨 시리즈’,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그리고 가장 최근작인 ‘테넷’까지 전부 장르에 있어 혁신적이었다. 반면, ‘인셉션’은 존재 자체로 혁명이었다. ‘인셉션’은 여러 장르에 넣어도 무방함과 동시에 특정 장르에 딱히 종속되지 않는다.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유일무이하다. ‘인셉션’이 개봉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그 어느 하나 비슷하거나 유사한 작품이 없지 않나. 진보적이기론 빼놓을 수 없는 희대의 작품인 ‘다크 나이트’의 경우, 개혁이고 변혁이었다. ‘다크 나이트’는 감독의 능력과 실력을 증명한 작품으로 수려하고 정교했다. 줄 세우기를 꺼리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를 둬야 한다면, ‘다크 나이트’는 많은 관객들의 히어로 영화 장르 1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다크 나이트’는 다른 장르 위에 놓아도 상위권에 머물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혁이고 변혁이라고 조심스럽게 기리는 이유는 ‘다크 나이트’는 만화 원작이 존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각색이자 재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를 일구는 순수한 창작과는 다른 차원이다. ‘인셉션’은 수려하고 정교하진 않았다. 대신 야심, 패기, 열망이 오롯이 반영된 작품으로 획기적이고 신박했다. 다시 말해, ‘다크 나이트’가 고심이고 사려(思慮)이자 존엄이라면, ‘인셉션’은 개성이고 야망이고 법열(法悅)이다. 섭리적으로, ‘인셉션’은 ‘다크 나이트’의 다음 작품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인셉션’이 능력과 실력을 더 이상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신뢰와 자유의 바탕에서 감독이 가장 먼저 내면에서 꺼내고픈 순수한 창작물, 진정한 영감(genuine inspiration)으로 느껴진다. ‘인셉션’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다. 인간의 젊음이란 게 그런 거다. 젊음은 순수성과 고유성의 중점이다. 나 아닌 남과 구별되고 독자적이다. 마음은 열의에 불타고 머리는 희망으로 움직인다. 젊음의 동반자가 바로 개성이다. 비단 ‘인셉션’에만 놀란 감독의 개성이 담긴 건 아니다. ‘인셉션’ 이전, 이후 작품에도 그의 개성이 담겨있다. ‘인셉션’ 이전 작품들은 치기와 신선미가 돋보였고, 이후 작품들부터 관록이 잡히고 있다. 그래서 그 작품들은 감탄스럽다. 그러나 ‘인셉션’은 실험정신과 도전의식이 뒷받침되어 백열(白熱)적이었다. 감독의 철학과 기술은 ‘인셉션’이란 젊음을 만나 고루고루 빛을 발했다. 감독의 개성은 이전 작품들에서 발굴이었고, 이후 작품들에선 특징이 되었다. 고로 시기 상, 개성이 개성 자체로 가치가 된 작품은 ‘인셉션’뿐이라고, 그래서 ‘인셉션’이 굉장히 소중한 거라고, ‘인셉션’은 앞으로도 여전히 놀라울 거라고 과감하게 주장하는 바다. 내가 드디어 ‘인셉션’의 위상인 그 젊음의 위치에 서게 되니 그 의미가 어느 때보다 온전히 와닿는다. 여기 젊음의 관점에 서서 관망하니 마음껏 도전할 수 있는 이 젊음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통감하고 있다. ‘인셉션’을 다시 보기 전까진 젊음을 느껴본 적도 없고 소중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인셉션’이 10년 전에 처음 개봉했을 때, 나는 이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영화에 사람들이 왜 그토록 열광하는지 추호만큼이라도 공감하지 못하는 와중에 결말이 꿈인지 현실인지 오직 정답만 궁금했다. 나는 이 영화가 그렇게 나에게 수수께끼로만 남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수수께끼로 기억되던 ‘인셉션’으로 인생을 알아내겠다고 홀연 덤벼든 건 그 어떤 영화보다도 불가해한 면모 때문이었다. 그래서 절박한 심경으로 10년 만에 영화관에서 다시 ‘인셉션’을 관람했다. 그리고 웅장한 선율과 함께 세상이 뒤집어지는 장면에서 내 마음 속 침전된 환희가 솟구침을 감지했다. 그 10년 동안 학교나 TV에서 수도 없이 보았을 텐데, 왜 이제서야 ‘인셉션’의 진가가 새삼 마음에 와닿은 걸까. 관람 내내 일희일경(一喜一驚)하며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맥박 아래 건강한 피가 펄떡펄떡 흐르고 있음을 단 한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감각했다. 경이로웠다. 생의 활기, 삶의 생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기대와 체념, 희망과 절망의 논제를 가볍게 뛰어넘어 놀라움이 전달되는 순간. 그런데 사람은 어리석음을 포기할 줄 모른다. 난 사는 기쁨을 알려준 이 영화를 또 보면 삶의 해법을 알 거라 또 믿어버렸다. 난 언제나 그랬다. 지금이 아닌 시간을 끊임없이 반추하고 썩어버린 뿌리를 습관적으로 들추었다. 반복하고 자책하고, 자책하고 반복했다. 그러면 당장 알고 싶은 것을 알 수 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모르는 걸 모르는 대로 두질 못했다. 무지와 미지는 옳지 못하다고 학습되며 자란 터라 알 때까지 나를 고문했다. 그런 식으로 천착하느라 젊음의 시기를 허비하는 것만으로 모자라 젊은 육체의 늙은 영혼이 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2번째 관람했을 땐, 첫 번째 때 놀라느라 놓쳤던 걸 잡아 내며 자만했다. 3번째 관람 때는 그간 쌓아온 정보와 그로 인한 믿음이 죄다 흔들렸다. 심히 당황스러웠다. 4번째에선, 어디에서 뭐가 나타날지 알아 지루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도 안 나고, 영화가 어떻게 진행되든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5번째가 되어서야 무언가를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는 허무함에 마음이 황량했다. 나는 거기서 멈췄다. 그리고 각성했다. 영화이건 삶이건 그 무엇도 들여다보길 되풀이한다 해도 알 수 없는 것. 무얼 알 수 없느냐, 그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 무엇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알게 된다고 해도 삶을 더 잘 살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을 미리 안다고 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고, 기쁨을 미리 알게 되면 기쁠 수 없다. 고통을 이기고 기쁨을 누리는 힘은 무지와 미지에서 오는 것이었다. 인간은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지금 눈앞의 현실을 충실히 살아야만 삶이 주는 놀라움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이 분명하다. 이로써 나는 내가 지금껏 잘못했음을 기어코 깨달았다. 이마저도 너무 놀라웠다. 나는 마침내 오랜 꿈에서 깨어났다.

잘못했다고 해서 잘못 산 건 아니다. 코브를 보라. 괴로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느라, 통제력을 잃은 채(“You don’t know you’re dreaming!”) 실제 세계가 아닌 꿈 속을 하염없이 헤맸던 코브는 가설적 인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 코브가 될 수 있다.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그 실수가 의도가 아니어도 잘못이 될 가능성은 상존한다. 결정적으로, 그 실수로 진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정체한 채 스스로를 얼마든지 파멸에 이르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다. 코브를 잊지 말라. 과실과 착오를 끊임없이 거듭하다 기회를 잡고는 한순간에 그간의 모든 방황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걸 바로 잡고만 코브를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억해야 한다. 실패만 계속한다고 해서 좌절하는 건 불필요하다. 다 잘되기 위해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틀린 줄 아는 게 지금 아는 전부여도, 틀리고 틀리고 또 틀리고 나서야 틀림없는 시간을 맞이한다. 그러니까, 자기자신을 포기하지 말라(“Don’t lose yourself”).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당신에게 만회를 위한 용서와 관용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기회를 주지 않는 환경적 한계에 갇히지 말라. 조건으로 작용하는 환경은 우리가 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았다. 따라서 꿈에서 깨어나고 나서야 마주한 세상에서 내가 느낀 배신감에서 배운 건, 이 세상이 그래도 크게 진보했다고 믿었는데 바로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거다.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소상히 언급할 용의가 없다. 놀란 감독의 말마따나, “인종 문제, 소득 불평등, 전쟁 등, 더 있겠지만 굳이 말하지도 않아도 여러분이 너무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기 때문이다. (Racism, income inequality, warfare – I could go on but you know this list, the reason you know it is because it’s exactly the same today.)” “지난 20년간 뭘 했나? (What have we been doing for the last twenty years?)” 했다, 다만 감독의 세대가 주장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but perhaps not as wonderful as we claim them to be”). 나의 세대, 젊은이들이 물려받은 세상은 감독의 세대가 다진 세상이다. 감독은 세상을 바꿀 기회의 바통을 젊은이들에게 넘겼다(“I just have to tell you it’s your problem now”). ‘인셉션’을 경험했다면 이제 그 세상을 뒤흔들고 뒤집어야 할 차례다. 배움을 얻고도 아직도 시선을 환상에 고정시킬 뿐이라면 그건 “현실에 대한 모독이다(It’s insult to reality).”

영화의 힘은 꿈의 힘에 비견될 만하다. 그리고 두 힘에 현실이 실릴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을 영위한다. 영화 ‘인셉션’에선 모두 꿈을 꾸고 나서 실제 세계로 돌아와 그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게 꿈의 힘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 꿈은 자신이 이미 아는 것으로만 구성된 공간이다. 그래서 새로움이 들어설 때면 꿈 속 세상은 급격하게 요동친다. 꿈에서 변화가 감지될 때마다 그 세상은 격하게 뒤흔들린다. 새로운 생각이 뇌리에 들어오기를 자연스레 꺼린다. 낯선 존재가 꿈에 나타나기 무섭게 방어 기제가 마치 해악을 물리치려는 듯 가동된다. 그게 현실이다. 현실은 무지를 깨닫고 미지를 마주해야 하는 상태다. 우린 현실로 인해 기지(旣知)의 안정감에서 벗어나고 이에 큰 불안감을 느낀다. 과연 불안감을 동반한 새로움은 오로지 불편하기만 할까? 그러기엔 새로움이 주는 변화가 기막히다. 아리아드네는 코브의 목전에서 세상을 뒤집었다. 내가 그 장면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별개로 영화 양식에 있어 여러모로 가치 있다. 그러나 그런 면면이 그 장면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 장면을 여러 번 감상하고 나서야 ‘rock the world’, ‘세상을 뒤집다’, ‘세상을 뒤흔들다’와 같은 언어 표현을 떠올렸다. 말이 씨가 된다는 식의 놀란 감독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분석은 불가피했지만 감상에 있어 부차적이다. 어쩌면 아리아드네보다 건축에 있어 선배이며 꿈 공유에 있어선 선수인 코브 앞에서 그녀가 보란 듯이 기성 세계를 뒤엎는 행동에도 놀란 감독이 졸업 연설에서 술회한 생각들과 같은 맥락 상으로 얼마든지 분석해 볼만 하지만 이조차도 한참 뒤에 연설문을 우연히 읽게 되어 뒤늦게 유추가 가능했던 것뿐이니 순간의 감각이 결여되었다. 게다가, 발상의 전환이 직관적으로 구현되었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해도 과언은 아닐 테지만 이조차도 지엽적이다. 그런 순간에는 논리가 필요 없다. 그저 그 상황을 믿고 느껴야 한다(“You keep telling yourself what you know, but what do you believe? What do you feel?”). 다시 말해, 코브와 아리아드네의 세상이 흔들릴 때 나의 마음도 흔들리는 거다. 이 점이 바로 영화의 힘이다. 영화 감상은 편히 앉아 눈을 화면에 고정시켜 영화를 보는 일이 아니다. 영화 감상은 온몸의 감각과 오감을 넘어선 육감, 그리고 사고의 기존 체계가 전부 새로운 형상과 생각에 격동하도록 내맡기는 의지적 행위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이름은 ‘인셉션’이 아니면 안된다. 왜 ‘인셉션’의 이름은 굳이 ‘인셉션’이어야 했을까. 그게 영화 이름이든 기술의 이름이든 상관없이, 혹은 연관적으로 동일하게 왜 인셉션(inception)이란 단어가 이름이 되어야 했을까. 영화 내용을 살펴보면 추출을 의미하는 extraction의 반대말을 찾아 이름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인셉션이어야 했을까? 인셉션의 뜻은 시작이다. 유의적으론, 개시, 발단, 시초도 뜻한다. 영화 ‘인셉션’도 기술 ‘인셉션’도 결국 관성적 사고관에 새로운 생각을 이식함으로써 파동을 일으킨다. 그로 인해 지각(知覺)이 변동하기 시작하면 타성의 세계는 이젠 없어지고 없다. 과거는 사라지고 오로지 현재만 남는다. 작몽에선 안위할 수 있어도, 현재의 현실에 산다면 그 자체가 진정 바라는 대로 바꿀 기회다. 고로, ‘인셉션’은 분석적 앎이 아니라 즉각적 믿음과 느낌에 관한 것이다. ‘인셉션’으로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풀어 말해,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는 곧 현실을 살아가는 데 부여받는 보상이다. 그래서, 편하게 앉아 스크린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영화를 보는 것도 참 좋지만, 스크린 밖으로 시선을 돌리기만 하면 몰랐던 경이가 펼쳐진다. 영화는 누구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바깥은 당신의 눈길이 닿는 곳곳 전인미답의 경지다. 그 현실은 새로운 시각을 선사할 것이다. (“When you’re flying in an airplane across this incredible country, you’re enjoying one of the great modern marvels, you’re getting a perspective on America, on our landscape and where we are that no one’s ever had before.”)

그렇다면, 놀란 감독이 말하는 대로 현실을 어떻게 좇을까? 감독은 그 방법을 말해주지 않는(“I don’t have to tell you how to do it”) 대신 씨앗 하나를 주었다: “근본을 보라(Look at fundamentals).” 깊이, 깊이, 또 깊이 내려간 곳에 무엇이 있는지 기억하는가. 바로 스스로다. 근본이 곧 자아다. 현실을 좇는 방법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놀란 감독이 창조한 코브는 문제를 해결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실제 세계에서 변호사를 고용하지 않았다. 코브는 꿈을 설계했던 사람이고 또 추출자이며 꿈 공유에 있어 전문가이므로 꿈을 이용하고 강점을 활용해서 현실을 타파했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 움직였다. 꿈을 현실로 이루는 과정은 순탄할 수 없지만, 엄한 데로 눈 돌리지 않고 스스로를 직면하는 것만이 실현에 요구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단축한다. 안타깝게도, 그 시간을 건너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의외로, 심적 통증의 주된 원인은 과정에서 만나는 외부적인 고초에 있지 않다. 스스로를 부인하는 데 있다. 그럴 만한 요인에도 여러 가지 있겠지만 결국은 한 곳으로 모아진다. 바로, 죄책감이다. 왜 나는 능력이 부족할까, 왜 나는 안될까, 왜 내가 아닐까, 그때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등 자책감이 시작되는 순간 ‘림보’보다 무시무시한 부정적 자기결정(自己決定)이 내면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코브가 죄책감의 존재를 인지한 후 내려놓음에 따라 일이 진척되고 꿈을 이루고 현실을 산다. 그러니 관건은, 후회하지 않는 거다. 우리는 의지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고, 아예 예상조차 못할 사건들이 의지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관여된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누구의 탓도 아니다. 후회하지 않아도 된다. 자기자신을 책망하는 건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그러므로 ‘킥’의 음악이 가수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의 ‘아뇨,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가 아니면 안된다. 꿈에선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꿈에서 보는 건 과거다. 과거는 지금 없는 시간이다. 현실에서도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과거와 다르게 새로 살 수 있다. 바로 지금 현실을 구가(謳歌)하자. 후회를 끝낼 때 인생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Car Ma Vie, Car Mes Joies / Aujourd’hui Ca Commence Avec Toi”).

사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나는 꽤 여러 꿈을 꾸었다. 여행책을 내고 싶다는 마지막 꿈의 앞선 꿈들은 모조리 실패했다. 모든 게 전부 내 탓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만 했어도, 그렇지 않아서 삶이 고통스러워진 건 차치하더라도 내가 나와 가장 소중한 사람의 행복까지 망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도저히 벗어날 재간이 없었다. 사람 인생이 거기서 거기라고 나는 남의 인생으로 삶의 유형을 공부하면서 나의 인생은 누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꿈도 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꿈을 꾸었다. 안정된 환경, 화목한 주위 사람들, 근사한 옷, 화려한 능력, 다국어 구사, 세계적인 무대를 꿈꿨다. 내 어린 시절 친구들의 평온한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 자아와 생활, 그 친구들은 환경 여건 상 천부적으로 타고난 그 하나하나의 요소들, 나에겐 결여되고 나와는 반대된 그 모든 것들로 나도 행복하고 싶었다. 내가 아는 대로 행복하고 싶었다. 평범하게 행복하고 싶었다. 일상에 고통이 찾아오기 앞서, 일상에 고통이 내재되어 있었다. 원래의 삶이 너무 아파서 꿈을 꿨다. 현실을 벗어나려면 꿈을 꿀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꿈에 내가 없어도 해낼 수 있을 거라고도 믿었다. 혼자서 외국어를 학습하고, 혼자 힘으로 여행을 가고, 신문을 읽고 잡지를 읽었다. 따라서 꿈을 꾸었기 때문에 내가 어느 정도 지성적으로 발전하고 넓은 세상을 맛볼 수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속엔 나라는 사람은 없는, 결국 속 빈 강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가치 있었으나, 가치가 남는 삶은 아니었다. 그러한 꿈들을 꾼 후유증으로 나는 현실 상 불편과 가족들도 잘 모르는 여러 질환을 떠안게 되었고, 그렇게 다시 돌아온 이 삶이 감당이 되지 않는다. 회복을 꾀하나 번번이 무너진다. 그중 이 글에서 우선 밝힐 수 있는 건, 내가 자꾸 현실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저 깜박깜박하는 것도 문제지만, 어떤 단어이든 기억이든 뭐든 생각하다 도중에 눈 앞에 커다랗고 까만 벽이 쿵! 떨어진 듯 사고 회로가 끊긴다는 것이 앞으로도 글을 쓰며 살고 싶은 사람으로서 가장 좌절스러운 문제다. 무릇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능수능란한 어휘와 표현법 사용이 중요한데, 내가 알던 어휘와 표현법을 기억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눈앞에 벽이 떨어져 어찌할 도리도 없이 이마를 찧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가장 끈질기고 고통스러운 탈은 내가 말 그대로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너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했던 과거는 현실이었는지 불분명해졌고, 불행했던 과거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꿈에 불행했던 과거가 나온다. 어떤 과거를 떠올려도 그 과거가 정말 일어났던 현실이었는지 나의 꿈 속에서 일어난 상상에 불과한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다. 또한, 여러 방면에서 생활도 잘 안 된다. 이런 일이 있었다: 꿈에서 영화를 예매했는데, 깨고 나서 ‘학교 수업이 있는데 내가 왜 영화를 예매했나’ 생각하며 예매를 취소하러 핸드폰을 켜는 순간 그게 꿈이었음을 퍼뜩 깨닫는다. 어떤 게 사실인지 모른다는 것, 겪어보지 않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영화 ‘인셉션’을 찾았다. 내가 코브와 닮아서 자구책으로 ‘인셉션’을 보았다. ‘인셉션’은 실화가 아니라는 점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남의 것에서 배울 게 있다며 습관을 따랐다. 그리고 ‘인셉션’을 다시 본 결과로 이렇게 살 게 될 줄 몰랐다. 출간 가능성과 상관없이 글을 탈고하게 될 줄 몰랐고, 이렇게 ‘인셉션’ 글을 쓰고 있을 줄도 몰랐다. 코로나 사태를 떠나 글을 탈고하더라도 당장 출판을 못할 걸 알았다. 스스로도 전통적인 글의 양식이나 표현법, 문장 구성 방식에 먼 다소 실험적이고 굉장히 개성 강한 글을 쓰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와 반대되는 식으로 쓰면 적어도 책을 내겠다는 꿈은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내가 없다. 나는 여행책을 내겠다는 마지막 꿈을 놓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추었다. 당장의 출판이 보장되지 않았는데 일단 원고를 탈고한 건 출판보다 내 안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나 자신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여행책의 출판이 아니라, 그 소란스럽고 신산한 삶에서 어떻게든 근원적 자아를 놓지 않았다는 그 의지와 용기를, 나라는 사람의 본연을 지켜냈다는 데 있다. 견지하느라 고된 과정이었고, 난 내면을 표현하는 날 이렇게 되찾았다. 오랜 꿈의 끝에서 난 나를 기억해내고 깨어났다. 이렇게 젊음을 만끽하기 위해, 또 나 자신을 살아가는 지금을 놓치고 싶지 않아 계속 여러 글을 썼고, 나의 내면에 귀기울여 영화와 삶에 관한 작품을 시작하기 위해 ‘인셉션’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인셉션’을 이해하고 나서야 과거를 반추하는 일을 멈추고 있고, 꿈에 뭐가 나타나든 마음 쓰는 일을 줄이고 있고, 트라우마를 떨쳐버리고 있다. 나만의 삶의 평범을 용납하고 있다. 이제야 젊음의 지평에 선 기분이고, 새롭게 생각하려 노력한다. 게다가, 죄책감을 버리는 중이다. 이것이 내가 ‘인셉션’으로 얻은 힘이다. ‘인셉션’에서 전달받은 격려는 바로 이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나는 내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글을 계속 쓰고 있다. 더불어 그림과 피아노로 잃어버린 날 되찾고, 사진과 영상으로 새로운 날 탐색하고 있다. 다시 예전의 나처럼 책을 읽고 있다. 코브가 아이들을 만난 것처럼 나도 언젠가 꼭 내가 간절히 원하는 바를 이루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린다. 지금의 현실이 너무도 힘겨운 걸, 누가 봐도 안쓰러워 보일 거라는 걸, 혹은 나의 믿음이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이젠 내가 뭘 알든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사는 날 믿고 느낀다. 이게 진실이다. 가만히 있어도 새로운 생각이 콸콸 흐르는 나 자신을 나는 더는 거스르고 싶지 않다. 이젠 날 잃지 않으려고 한다.

끝으로, 원래 이 글을 이렇게 쓸 작정은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쓰다 보니 이렇게 이르렀다. 꼭 쓰고 싶던 가장 마지막 문단을 제외하고는 여기까지의 문장과 문단 전부 나의 ‘임기응변’이었다. 나로선 도전이었다. 나란 사람은 당장의 미래의 형상을 고정해두고 그에 맞춰 지금을 조정하는 식으로 살았다. 바라는 게 많았고, 늘 삶이 뻔하다고 생각해 두려웠다. 그러다 보니 불행을 자초했다. 덕택에, 현재를 즐기지 못했고, 내가 그려낸 형상대로 미래가 현실이 되지 못하면 괴로웠다. 나는 코브에게서만 날 본 건 아니다. 난 마치 ‘메멘토’의 주인공 같았다. 지금 얻어낸 단서를 문신으로 몸에 새김으로써 과거를 끊임없이 증오하고 의심하며 그 어느 순간도 제대로 살지 못한 주인공에게서 나를 보았다. 그러나 ‘인셉션’에 녹아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철학을 경험하며 ‘메멘토’의 주인공이나 코브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그간 감상했던 감독의 다른 영화들도 다르게 바라보고, 그 속의 주인공들처럼 다가오는 현실과 당장 살아 숨쉬는 현재에 집중해도 괜찮다고 안심할 수 있었다. 나는 계속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문장들로 잇고 이어 이렇게 글을 완성한다. 글을 쓰는 매순간 몰라서 두려웠고, 몰라서 행복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울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본인의 철학과 그만이 지닌 이야기를 영화로 구현하였듯, 나 또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이로써 현실을 살면서 새로운 꿈을 꾼다. 더 이상 꿈이 이뤄질지 아닐지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모르겠지만, 이리 지켜질 것이다. 그러니 믿음을 갖고 뛰어든다. (“You don’t. But I can. So do you want to take a leap of faith, or become an old man, filled with regret, waiting to die alone?”)

나는 나의 다음 문장을 믿는다. 그게 어떤 건지 아직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좋은 문장을 마주치게 될 걸 알고 있다. 문장에 문장이 이어지고 언젠가 끝이 올 것이다. 그 끝을 사랑하리란 것도 안다. 왜냐하면, 독자인 당신이 그 끝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You know where you hope this train will take you, but you can’t know for sure. Yet it doesn’t matter… Because you’ll be together.”) 그래서 이렇게 이 글을 마친다. 이 글을 쓰면서 고통스러웠고, 이 글을 쓸 수 있어서 기뻤다.

나는 모르면서 가겠다.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않겠다. 삶과 같은 영화에서, 영화와 같은 삶에서, 계속해서, 나는 여전히 놀라고 싶다.


글쓴이의 코멘터리

이 글을 쓰는 동안 이마에 불구덩이를 얹은 줄 알았다.

(이 글을 쓰며 나에게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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