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됩니다 : 영화 '무뢰한'의 김혜경
_ 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됩니다 : 영화 '무뢰한'의 김혜경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 대사 한 줄이 있다면 단연
“나, 김혜경이야.”
이 대사 하나에 온갖 것들이 응축되어 있다. 몹시도 처연하고 서슬 퍼런 대사를 나의 입으로 옮겨 보아도, 구질구질한 인생에 대한 넌덜머리, 겁을 들키지 않으려는 센 척, 숨겨지지 않는 조바심, 카리스마, 속 여림, 약간의 자책감, 분노, 광기, 서러움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전해진다. 그런 말을 할 때 김혜경은 짙은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다홍빛 원피스를 입은 채 목에 앙상한 핏대를 세워 앙칼진 목소리를 내야 했다. 그때 김혜경이 수트를 입고 있었다면, 그녀를 이용만 하려는 비겁한 남자들과 같은 인간처럼 보였을 것이다. 김혜경은 섬약해 보여야 하고 그래야 섬뜩해 보인다. 남자들이 입는 옷을 입는다고 해서 동등해 보이지 않는다. 고로 영화 내내 김혜경은 꽃과 천연한 옷을 입고 나온다.
아스라한 꽃무늬가 들어간 원피스는 훤한 낮, 저무는 노을의 빛이 아니라 어슴푸레한 새벽 빛을 띠고 있고 이는 합당하다. 그녀는 현재 새벽에 처해 있다. 어둠은 가셨지만 밝은 아침은 언제 올지 몰라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원피스는 살랑거리는 꽃잎을 닮았다. 꽃잎은 바람이 세차면 언제 날아갈지 모르니 김혜경은 한껏 위태로워도 나른하고 주변인들만 그런 김혜경을 놓칠까 이래저래 발만 동동이다. 가늘어 이리저리 흔들려도 주위의 온 신경을 단박에 뺏는 담배연기를 김혜경이 피워낼 때 입었던 블라우스도 바람에 유유히 나부꼈다. 무뢰한들이 끝내 김혜경을 손아귀에 넣었을 때도 그녀는 꽃을 자수레이스로 빼곡히 채워 넣은 트렌치코트를 꼭 여며 입고 있었다. 그 자태가 이리 읽혔다: “너희가 날 움켜 쥘 수 있어도 날 꺾을 순 없다. 꽃을 꺾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꽃처럼 매섭고 초연하며 억센 여자, 김혜경은 아무 옷이나 입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