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라디오 신춘편지쇼 사연 소개글 원문
<라 돌체 비타! : 달콤한 인생을 굽는 쌀 디저트 가게 이야기>
제 인생은 달콤한 인생과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 인생조차도 달콤한 인생이라고 일깨워준
한 쌀 디저트 가게가 있습니다.
대학교 3학년 가을,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그 가게를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생활 내내 식비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점심으로 집에서 챙겨온 고구마와 샐러드를
혼자 강의실에서 먹으며 공부를 했기 때문에
친구가 좋아하는 에그 타르트나 마카롱에 관심을 둘 심적, 경제적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디저트를 쌀로 만든다는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디저트 가게에 들어서는 자체가 그다지 내키진 않았습니다.
그저 바쁜 대학생활 중 잠깐이라도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동행한 것뿐이었죠.
하지만 그곳에 처음 들어선 순간, 제가 갔던 수많은 식당, 가게, 빵집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했습니다. 그때 그 느낌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가게의 문을 여는 찰나 따스함이 밀려들어 왔어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 인사하는 사장님께서
혼자 만드셨다는 마카롱, 쿠키, 휘낭시에와 같은 고운 빛깔의 디저트들이
탁자 위에 오밀조밀 모여 있었고, 가게 안은 빵 냄새로 가득하여 아늑했습니다.
고심하여 겨우 하나 고른 얼그레이 크림 쉬폰 한 조각을 계산할 때,
크고 검은 눈동자의 사장님은 저와 눈을 마주치며
맛 좀 보시라며 종이 봉지에 마카롱을 하나 넣어 주셨어요.
그런 친절은 처음이라 얼떨떨하며 재빨리 밖으로 나와
얼른 디저트를 한입 베어 먹었고, 맛은 정말이지 놀라웠어요!
인공적인 단맛은 없고, 부드럽고, 무엇보다 속이 불편하지 않았어요.
연신 “이게 뭐야?” 감탄하며 어느새 디저트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만
제 자신을 발견했을 때 묘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사실, 저는 단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먹는 행위를 즐기는 편도 아니에요.
아토피 때문에 평생 음식 하나하나를 조심하며 먹었고,
소화 기능이 약해 틈만 나면 잘 체하는 데다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 스트레스가 심해 아토피에 좋지 않은 단 간식을
무의식적으로 찾고 자꾸 입에 넣으려는 스스로의 모습에 더더욱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따라서 무얼 먹든, 먹는다는 건 언제나 괴로웠어요.
그런데 생존을 위해서 음식을 먹던 저에게 그 쌀 디저트 가게가 신세계를 열어줬어요.
먹기 전에 기대가 되고, 먹는 내내 즐거우며, 먹고 나서도 기분이 좋은 경우는
그 쌀 디저트 가게의 디저트가 처음이었어요.
그 이후, 저는 그 쌀 디저트 가게, <방앗간>의 단골이 되었습니다.
<방앗간>의 쌀 디저트를 먹는 건 단순히 먹는 재미 그 이상으로
‘달콤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는 하나의 기회였어요.
<방앗간>에서 내놓는 디저트는 소박하지만 하나하나 기억이 날 정도로 특별했어요.
밤 스콘, 쑥 파운드 케이크, 유자 마들렌이 평범할 정도로
콩가루에 굴린 마카롱, 팥크림을 얹은 녹차 갸또, 고구마 무스 크림이 들어간 티라미수 등
어느 하나 독특하지 않은 디저트가 없었어요.
심지어 다른 빵 가게에서도 낼 법한 무난한 스콘이나 브라우니도
<방앗간>은 신기하게도 다른 맛을 냈어요.
그런 <방앗간> 디저트 맛의 비결은 쌀입니다.
쌀로 만든 디저트는 밀가루로 만든 디저트와는 다르고
마치 떡처럼 폭신폭신해요. 씹을수록 진하고 고소한 맛이 올라와요.
또한, 전날 미리 사두었다가 다음 날 학교에서 점심으로 먹을 정도로
먹고 나도 속이 편안하고 든든하기까지 합니다.
덩달아, 마음까지 든든하고 따뜻했어요.
사장님은 본인처럼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고 소화불량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쌀가루로 디저트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셨어요.
<방앗간>의 디저트를 먹을 때면
‘맛과 건강, 그리고 남을 위한 마음씨가 이렇게 달콤한 것이구나’ 생각했어요.
게다가, 사장님의 어머님과 할머님께서 만드셨다는 과일잼이나 콩가루가 들어간
디저트를 먹노라면 더더욱 큰 온정을 느낄 수 있었지요.
설탕에서 날 법한 맛 대신 과일 맛이 온전히 느껴지는 딸기잼 마들렌과
코코아 가루 대신 콩가루가 가득 올라간 티라미수 케이크는
사람이 사람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는 정성에 정성이 더해져
뭉클하고 포근한 맛이 났어요.
그리고 이런 디저트를 먹기도 전에 제 마음은 항상 달달했어요.
그 이유는 온통 사장님 덕분이었습니다. <방앗간> 디저트는 사장님을 닮았어요.
음식을 만드는 재료는 먹는 사람을 위한 배려와 마음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사장님은 항상 거북하고 허한 제 속을 달래 주셨어요.
대학 시절이라면 제가 학교 생활을 하는 동시에
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다니며 여행 에세이를 책으로 내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지독하게 노력하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상처가 많았고 마음은 지쳐 있었습니다.
뭐든 녹록치 않았고 혼자서 고군분투하는데도 늘 부족했어요.
또,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불안했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가게 마감 전까지 허둥지둥 오곤 했던 저에게
사장님이 하나 더 준 쿠키와 파운드 케이크는 실은
맨날 고구마와 샐러드를 먹는 저에게 색다르고 든든한 한끼가 되면서도
꿈을 향한 발걸음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힘이기도 했습니다.
대회 우승으로 받은 상금과 힘겹게 벌고 아낀 돈을 모아서
카메라를 사고 여행을 다녀온 후, <방앗간>에 들려
사장님께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선물로 드렸을 때 저의 심정은
단지 ‘뿌듯하다’는 말로는 모자라요.
드디어 그 친절에 보답을 해드렸다는 마음이 굉장히 컸습니다.
제가 자력으로 자그마한 사진 전시회를 열었을 때도
사장님께서 놀러 와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그 이후로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느라 바빠 종종 들리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계속되는 실패에 괴롭고 답답한 나머지 조심스레 고민을 털어 놓기도 했어요.
“왜 저는 안 될까요?”
사장님은 온화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저도 그랬어요. 이 가게를 열기까지, 또 열고 나서도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단골 분들도 생기고 정말 행복해요. 꼭 잘 될 거에요. 응원하고 있어요.”
저는 사장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사장님처럼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는 걸 만들고,
사장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꿈에 악착같이 매달렸습니다.
사람들이 나의 책을 즐겁게 읽고 진정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글쓰기에 모든 힘을 부었습니다.
마침내 글을 탈고했을 무렵 코로나가 찾아왔고
10년의 노력은 당장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저는 허무함과 충격으로 약 6개월 정도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우울함을 이겨 내야겠다는 엄두도 못 냈습니다. 끼니도 잘 챙겨 먹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문득 <방앗간>의 디저트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찾아 간 <방앗간>은 전과 같이 운영 중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저를 정답게 맞이하며
속사정을 듣고 격려해주는 사장님과
여전히 달콤한 쌀 디저트 맛에 저는
좌절에 굴복하며 이 시기를 무의미하게 보내면 안 되겠다고 깨달았어요.
여러 가지 글을 쓰고, 다시 그림도 그리고 피아노도 쳤어요.
그 어느 때보다 창조적인 일상을 살면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어요.
비단 여행 에세이뿐만 아니라 나의 창작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고 도와주고 싶다는 꿈이에요.
새로운 꿈 소식과 함께, <방앗간>의 디저트와 사장님이
그때나 지금이나 용기가 되어 고맙다고 인사하기 위해
<방앗간>에 들리려고 했는데 참 아쉬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방앗간>이 문을 닫았어요.
갑작스러운 폐업에 후회가 밀려 들어왔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자주 들릴 걸,
꿈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방앗간>이 고난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만 말씀드려도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지 않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저는 꿈이 전부라고 믿었기에 꿈의 실패가 고통스러웠지만,
<방앗간>이 문을 닫게 되면서 저의 생각이 부족했음을 통감했어요.
우린 그저 살아 숨쉬어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 있었어요.
마스크 없이 가족과 친구를 만나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꿈을 이루는 것 그 자체보다 꿈을 이루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돌이켰더니,
꼭 무엇을 성취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우린 전부 <방앗간>의 디저트처럼 각각 다르고 특별하며
그 자체로 다른 이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존재였던 거에요.
그 사실만으로 이미 참 달콤한 인생이었어요.
<방앗간>의 디저트를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것도 너무 슬프지만,
이 이야기를 직접 사장님께 전할 수 없는 것도 몹시 서글픕니다.
대신 그 마음을 이렇게 글로나마 담아내는 바입니다.
사장님, 그 시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했어요.
배고픈 저에게 마들렌, 휘낭시에 하나 더 챙겨준 것,
속상한 저를 공감하고 위로해 준 것,
저의 꿈을 응원해 준 것 전부 감사했어요.
사실 꼭 출판한 책을 들고 의기양양하면서 <방앗간>을 방문하고 싶었어요.
그래야만 사장님의 친절에 보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비록 그 계획은 이루지 못했지만,
달보드레하고 건강한 <방앗간> 디저트와 같은 글을 쓰고
또 어린 어른이었던 절 마음으로 보듬어준 사장님과 같은 작가가 되어
책을 들고 다시 연 <방앗간>에서 사장님을 만나 뵐 날이
훗날 반드시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눈물에 절어 상처로 따끔따끔했던 저의 인생도
달콤한 인생이라고 일깨워 줘서 고맙습니다.
항상 용기를 낼게요.
사장님, 많이 그리워요. 항상 건강하세요.
꼭 다시 만나요.
이 글은
2021년 3월 30일
양희은, 서경석의 여성시대 라디오 신춘편지쇼 사연으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
http://www.imbc.com/broad/radio/fm/womenera/podcast/index.html
약 16분 정도부터 들으실 수 있습니다.
양희은, 서경석 님 목소리로 제 글이 읽힌다는 건
굉장히 생경하고 뭉클한 경험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제 목소리로 직접 읽는 것도
이 글이 지닌 마음을 전달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이 들어
녹음본을 올립니다.
물론 저는 글을 눈으로 읽는 걸 가장 선호하지만,
때때로 목소리로 듣는 글도 참 매력있습니다.
또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온도가 느껴지는 듯해
작년부터 글을 목소리에 담아내는 개인 작업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너그러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방송되는 시간 mini를 통해서
많은 분들의 관심과 응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 글과 이야기에
따뜻한 공감과 응원을 보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잊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