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밖 삶의 안
나도 놀이기구를 정말 잘 타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바이킹은 잘 타지 못했지만, 롤러코스터를 연속해서 다섯 차례 타는 정도는 맨 땅을 걷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만 가속될 뿐이었다. 그렇듯, 나는 무언가가 재미있다고 느껴지면 끝을 모르고 반복하는 사람이다. 그 대상은 놀이기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한때는 붕어빵이 너무 좋아 한 달 동안 매일 먹었다.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아플 때마다 찾아서 먹는 브라우니도 있었고, 그토록 마음이 아플 때는 잦았다. 미친 듯이 좋아하는 대상이 무엇이 되든 간에 다행히 그러다가 질릴 때가 왔다. 아, 이젠 됐어. 그때는 미련 없이 관두었고, 그런 순간도 나름 좋았다. 아무래도 마음을 쏟는 건 힘드니까. 후련해지는 순간까지 반길 만큼 나는 참 처절했다.
한 영화가 좋으면 그걸 지겹도록 보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자기 전, 보고 싶을 때, 심지어 보고 있지 않을 때조차 그 영화만 보았다. 횟수가 한두 번만 넘어도 장면을 하나하나 외우기 시작했다. 이 즈음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뜀박질을 하고, 몇 초가 지나자 소리를 빽 지르고, 이 다음에는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거의 모든 장면을 알게 되어도 또 보았다. 차 밖으로 볼펜을 휙 던지는 그 손목의 스냅과 꺾인 각도가 몹시 경쾌해서 구속감에 마음이 조일 때마다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화사한 햇살 속에서 억지로 울음을 찾으려다가 기어코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의 모습은 몇 번을 보아도 마음이 요동쳤다. 게다가, 감상이 대여섯 번이 넘자 처음 볼 때는 차마 알아채지 못했던 요소요소가 차츰 눈에 들었다. 고양이는 저기 앉아 있고, 조명의 밝기는 이 정도, 벽지는 저런 무늬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럼 나는 약간 우쭐해졌다. 동시에 안도했다, 내가 나를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는 점에서. 나는 이런 취향이고, 이런 성향이고, 이런 경향이라는 확신은 사람을 조금은 덜 외롭게 했다. 영화의 반복 관람은 재미보다는 위로였다. 내가 아는 장면이 나오고, 그 장면에서 겪은 감정을 또 고스란히 느끼고, 그렇게 마음이 차오르는 듯했다. 더군다나, 외국어 공부라는 명목도 있었다. 많이 볼수록 많이 알아듣겠지. 기쁜 마음으로 영화 열 편을 볼 수 있는 것을, 한 편의 영화를 열 번씩 보았다. 그런 영화가 너무 많다. 한 편을 통째로 보기가 껄끄럽거나 내키지 않으면 별도의 장면만 따로 떼어 보았다. 영화 한 편으로 몇 시간을 쓰는 것보다 한 장면으로 몇 분을 쓰는 것이 조금 더 간편하기도 했다. 그런 장면은 더 많다. 그만큼 마음이 아프고,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시간들이 많았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그 영화들밖에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적어도 그때는.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볼 때마다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표정과 목소리, 대사, 장면 속 미장센은 오직 순간이었다. 영화에 시선을 압정처럼 고정하고 있어도, 근사한 것들은 금세 마음을 훔쳐 도망간다. 난 앉은 자리에 묶여 정신이 팔린 사이 마음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거다. 그럼 다음 차례에서 나는 잠시 마음을 되찾았다가 그 순간이 지나가면 또 빼앗겼다. 재빨리 결론을 말하자면, 연민이었다. 내가 겪고 있는 감정과 상태가 싫으면서도 스스로 그것들을 알아준답시고 같은 영화를 되풀이하는 건 같잖은 연민이었다. 내가 연민을 반복 재생할 동안만큼 다른 영화를 볼 시간을 잃었던 것이다. 세상에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나는 몇 안 되는 영화에 감정적으로 단단히 매여 있었다. 붙박여 놓고 더 많이 안다는 것? 무엇을? 자잘한 디테일? 무엇보다도, 알아서 무엇 하게? 그건 비생산적인 자기만족이었다. 앞으로 가지 못하고 좁은 구렁텅이를 깊게 파고 그 안에 꾸역꾸역 들어가 가느다란 햇살이 좋다고 앉아 있었던 형국이다. 감정 중독이었고, 나중에는 중독된 감정이 무엇인지 아예 잊었다. 같은 영화의 같은 장면을 보고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자 드디어 영화까지 물렸다는 것을 깨우쳤다. 아, 이젠 됐어. 그런데 이번에는 놀이기구나 붕어빵, 브라우니의 경우처럼 후련하지 않았다.
결벽적인 ‘프렌치 디스패치(The French Dispatch)’를 보는 내내 나는 동동거렸다. 자리를 잘못 앉았는데 또, 자리를 옮길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하필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의 영화를 사다리꼴로 보고 말았다. 상영 시간이 흐를수록 이 감각적인 영화에 대한 애정은 더더욱 짙어졌고, 그럴수록 불편과 안달은 더해졌다. 에이, 또 보러 오지, 뭐. 무심결에 다음을 다짐하자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완벽은 반복하고 싶고, 완벽하지 않은 것은 만회하고 싶었던 나는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매사를 피상적으로 살았을까? 모든 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질척였던 셈이다. 즐거움, 기쁨, 흥미, 안심, 총애는 겪어도 겪어도 또 겪고 싶은 것이어서 반복하는 것은 단순했다. 반면, 서러움, 슬픔, 괴로움, 불쾌, 혼란, 분노를 겪으면 그에 대한 보상을 늘 받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연히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영화 속 주인공은 나와 같은 감정을 겪으면서도 종국에는 해소했다는 면에서 나와 달랐고, 그래서 그러한 영화를 주구장창 보았다. 그건 문제 해결 방법이 못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아물 수 있는 것을, 긁어 부스럼이었다. 감정을 느끼면 느끼는 대로, 매사가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가만히 흘려보내도 나을 상처는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들추지는 말았어야 했다. 결국은 그러한 버릇이 온몸에 배어 만사를 제대로가 아니라 적당하게 보냈다. ‘프렌치 디스패치’도 하마터면 그렇게 보낼 뻔했다. 그러나 웨스 앤더슨 영화답게 도도하고 냉랭하고 엄격했다. 예외나 군더더기는 사정없이 거절하며 아쉬움과 후회에는 무정하게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들에 손키스를 보낼 줄 알지만 손을 붙잡고 매달리지 않는 영화의 외관은 굉장히 통제적이다. 대칭에 예민하고, 완벽에 관대하고, 좋은 의미로 ‘폼생폼사’였다. 영화의 내면은 그와 정반대다.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하나도 없고, 주인공들은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방정맞은 듯 고상한 듯 고군분투한다. 사랑이 끼어들고, 협박이 오고 가며, 애써 괜찮은 척하기도 한다. 인공적인 미장센에 대비되는 인간적인 서사와 전개에도,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떠오르는 단어는 어찌 된 것이 ‘완벽’이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인물들은 통제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도 언제나 본인의 역할에 지극정성이다. 그림을 빼 와야 하면 빼 오고, 원고를 받아야 한다면 받고, 사람을 속여야 한다면 속였다, 목숨이 달릴 지라도. 웨스 앤더슨의 영화가 완벽하게 느껴지는 건 뜻대로 흐르지 않는 운명 속에서도 기어코 초지를 관철하고 마는 인물들의 행동력 때문이다. 좌충우돌 끝에도 발행하는 폐간호보다 놀라운 건,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다. 아쉽고, 기쁘고, 그립더라도 그것이 과거라면 깨끗하게 보낸다. 한번 가면 끝, 그게 바로 완벽하게 사는 법이었고, 즐기는 법이었고, 사랑하는 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영화는 제 스스로 재생하지 않는다. 떠나간 영화를 역류시키는 건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리하여 이번이야말로 더더욱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사실 웨스 앤더슨 영화를 극장에서 본 것은 이번 ‘프렌치 디스패치’가 처음이었는데, 나는 사다리꼴로 관람했고, 쉴 새 없이 흐르는 전개와 빈틈없는 대사 탓에 중간에 놓친 부분도 좀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부터는 영화의 첫 감동을 고이 간직하기로 한 터라 당장에 또 보러 갈 수는 없다. 떠나간 영화는 붙잡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은 아니다, 사랑을 표출하는 사람이지. 고로, 같은 영화를 주야장천 보는 대신 ‘뉴요커(The New Yorker)’에 실린 ‘프렌치 디스패치’와 관련된 글을 읽기로 했다.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지는 방법을 조금 더 건강하게, 이성적으로 바꾸는 것뿐이다. 이제 그만 사랑하기엔, 이 영화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지 않고도 사랑할 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찾고 있다. 주어진 시간에만 철저하게 사랑하는 방법 말이다. 거기에 더해, 마음을 축내지 않는 건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