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서

영화의 밖, 삶의 안

by 전해리

그 감독은 유명하나 그의 영화는 유명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언급된 기사는 읽어도, 그가 만든 영화는 좀처럼 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개봉할 때면 난 안도가 되면서 긴장이 된다. 이번에는 관객이 또 얼마나 적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게 될까?

일부러 영화가 바로 시작하는 제시간에 맞춰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광고는 꺼지고 영화가 켜졌다. 그 찰나의 깜박임 속에서 관객은 나 이외에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스크를 써서 세세한 용모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영락없는 아저씨였다. 침침한 색감의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는 아무도 없는 옆 좌석에 회색 등산 가방과 우중충한 빛깔의 겉옷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팔자 좋은 관객처럼 앉아 있었다. 이따금 콜라 같은 걸 마시기도 했다. 주위에 누가 있건 말건 신경 쓰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소리를 안 내고 입장했어도 그렇지, 사람 기척이 안 느껴지나? 그 잠깐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보이고, 나는 스스로에게 피로해져서 언짢았다.

어차피 그의 영화는 관람하는 당장에는 모른다. 영화가 막을 내리면 알쏭달쏭함은 절정에 달하는데, 정작 무엇에 알쏭달쏭한지는 한참 뒤에나 안다. 그런 개운하지 않는 여운이 참 요상하게도 살다가 불쑥불쑥 떠오르고 때가 되면 그 ‘무엇’을 퍼뜩 깨닫는다. 그러니 이번 영화를 보며 정신이 드문드문 저기 앉아 있는 아저씨에게 빼앗겨도 그러려니 했다. 아저씨는 영화 내내 꽤 자주 웃었다. 낄낄거리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건 쾌소(快笑)였다. 그 웃음은 단전에서 올라오는 탄산 같은 데가 있었다. 영화관 안에 관객이 본인 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아예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도 그저 영화에 온 신경을 쏟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으나 일단 시샘이 났다. 저렇게까지 영화를 알 수 있다니. 남을 의식하지 않는 저 호탕한 웃음은 영화와 진정 같은 맥을 하고 있었다. 귓가에 아저씨의 웃음소리가 종처럼 울릴 때마다 영화가 다시 보였다.

멋대가리 없는 세상, 치사한 인간관계와 비루한 삶,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꾸만 비틀거리고 비틀어지고 틀어지는 인간 본성을 신랄하게 까발리던 그 감독의 영화는 최근 몇 년 사이 두드러지게 유해지고 후해졌다. 나는 그런 변화가 딱히 달갑진 않다. (이제는 예전이라고 불러야 할)예의 그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던 달관은 영화일 뿐인데도 너무 생생하여 보기만 해도 나 자신 인간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영화가 너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해서 도리어 심술이 솟는다. ‘어쩌라고’와 ‘어쩌자고’ 가운데에서 유연하게 힘을 조절하던 그의 옛 영화는 요즈음 ‘어쩌든지 말든지’ 하면서 힘을 완전히 빼고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 그럴싸한 세상사의 허물을 과감하게 들어내고, 드러내고, 도려내던 그 예리한 칼날은 도대체 어디에 버렸는지, 원. 나는 그의 거북한 옛 영화가 더 편하고, 한만한 새 영화가 더 불편하다. 그리고 슬프다. 여기는 아직도 바뀌어야 할 것들이 산적한데, 허수해진 그의 영화는 저 멀리 홀로 가 버렸다.

그러므로 아저씨의 웃음소리는 그의 영화에 대한 나의 하잔한 감정 속에서 새삼스레 공명한다. 새로워진 그의 영화에는 텅텅 빈 곳이 많았고, 스크린 바깥의 관객이 뭐라도 소리 치면 꼭 메아리가 울릴 것 같았다. 아저씨는 그 공백에 기꺼이 웃었고, 그 웃음은 내 마음의 벽에 부딪쳤다. 그러니까, 어찌되든 웃어버리고 마는 것. 그의 영화는 단순히 영화가 아니었다. 삶 하나를 뚝 떼어놓은 것이었다. 그가 고발한 인간의 비겁한 본성과 그런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하잘것없는 삶을 보며 나는 늘 마음이 요란해지곤 했다. 벌컥 화를 내고, 덜덜 떨다가, 씩씩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지만 삶은 바뀌지 않았다. 정작 바뀐 건 그의 영화였다. 인간과 인생의 단면은 그대로인데 고발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냥 심심하게 보여주고, 삼삼하게 내버려둔다. 바뀌길 바라고,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뀌는 세상이나 삶이 아니기에 어쩌면. 그래, 차라리 그렇다면. 아저씨는 실없는 하소연, 구차한 눈물, 그리고 간절하게 오고 가는 대화에 미련 없이 웃었다. 세상에는 아직 웃어야 할 것이 많고, 웃어 넘길 수 있는 것이 허다하다. 하하하! 따라 웃다 보니 주인공은 가차없이 닥치는 매서운 겨울 바다의 파도에 기꺼이 혈혈단신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파도에 포옥 안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감독은 이렇게 날카로운 삶을 포옹하게 되었고, 나는 그의 영화를 보며 에라 웃어 버린다. 거지 같고, 싫고, 무람없는 짓을 하는 대신 뭐 어쩌라고 그냥 웃는 보는 거다, 이래저래 안 바뀔 지질한 세상과 고집스런 생이라면. 문득,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보면 늘 삶을 다시 보는 것만 같다.

영화가 끝나고 아저씨는 웃음을 멈추고 턱을 괸 채, 텅 빈 스크린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영화가 끝나도 자리를 쉬이 떠나지 않았고, 나는 저 아저씨가 그의 다음 영화를 또 보러 올까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의 스물세 번째 장편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안에서 가장 아끼는 반지를 잃어버렸다. 그 반지는 누가 주워 갔으려나. 그의 영화를 보러 갈 때마다 나는 바닥을 살핀다. 매번 다른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는데도 말이다.


보이지 않는 걸

보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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