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됩니다
노랑은 좀 기이한 구석이 있다. 어려서는 노란 개나리가 그렇게 귀여웠는데, 다 크고 보니 그만큼 징그러운 것이 없다. 어려서 읽은 이국의 전설 속, 어머니의 살갗을 찢고 나왔다는 아기, 괴물 같은 느낌이 든다. 대체로 맑고 연한 색감의 순한 꽃 이파리가 뽀로로 난립하는 봄에 노랑은 더없이 기묘하다. 노랑은 아무리 투명해도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지 않고, 무구하지만 도무지 순진해 보이지 않는다. 꼭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걸 영영 알 수 없겠지만.
노랑은 세간에서 유치원복과 같은 어린 아이의 옷에나 앳된 느낌을 강조하고 싶을 때 쓰인다. 어울리지만, 특유의 묘한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 굳이 개나리가 아니더라도, 노랑이 나타나면 그 존재 자체도 주변과 낯설어지며 이상한 기운을 갖는다. 이를 테면, 노래진 얼굴, 노래진 잎사귀, 노란 말뚝, 노란 선이 있다. 노랑의 상태는 딱히 맞다고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잘못되지도 않음을 의미한다. 노랑은 정상과 이상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노랑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끼고 싶지 않은 경계이다. 경계에 서서 경고한다, 당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퍼스널 쇼퍼(Personal Shopper)’인 모린은 샤넬을 입으면 특별해진다. 중요한 건, 본인도 그걸 잘 안다. 퍼스널 쇼퍼로 일하면서 클라이언트의 옷을 탐내면 안 되지만, 모린은 탐욕을 곧잘 숨기지 못한다. 예쁜 옷을 알아보는 눈이 있는 한편, 본인을 영매라고 여기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자신이 찾고 있는 정체를 줄곧 의심하면서 유튜브 시청이나 인터넷 검색을 멈추지 않는다. 즉, 모린은 자신이 알아본 옷을 잠시 입을지언정 가질 수 없고, 본인이 누구인지 안다고 말하면서도 믿지 않는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모린을 샤넬 없이도 특별하게 본다. 모린의 평소 옷차림으로 사진 모델을 세우고, 퍼스널 쇼퍼인 걸 알고도 시착을 권유한다. 화장기 없는 퀭한 얼굴, 검은색 라코스테 피케 셔츠나 기름진 머리가 스타일리시하게 어울리는 사람은 드물고, 그 사람이 자신인 것을 모린은 모른다. 자신의 꾸밈없는 본연이 남을 끌고 있음을 모른다. 모린을 만나는 사람들은 죽은 오빠의 존재에 매달리며 물증이 없는 것을 믿으려고 애쓰는 그녀를 내치긴커녕 그녀의 말에 귀도 기울이고 걱정한다. 그러나 정작 모린은 그러한 걱정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가시적인 외적 상황에 휩쓸리고 자신의 비가시적인 내면에 동요하기에 골몰한다. 본인이 남의 도움 없이도 깨닫기 전까지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 기어코 머무르려는 모린에게 잘 어울리는 색깔은 노랑이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존재에 혼란을 느끼면서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채로 열차에서 잠에 들고, 가질 수 없는 탐스런 옷을 고르는 모순적인 퍼스널 쇼퍼로서 노란색 장갑을 낀 채 바이크를 탄다. 그러한 중도에서 벗어나려기보다는 충실한다. 남들처럼 문제를 망각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모린의 문제 해결 방식은 그 속에 머무르며 직시하는 데 있다. 마치 터널을 벗어나려면 그 속을 물리적으로 걸어 나가야 하듯이 말이다. 어두운 터널을 간소하게나마 비추는 불빛의 색은 노랑이다.
‘20세기 여인들(20th Century Women)’은 노란색 옷을 입을뿐더러 노란색에 둘러싸여 있다. 노란 옷을 입은 도로시아, 줄리, 에비는 각각 문제를 안고 노란색 부엌에 앉아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토론을 한다. 한 명은 사랑을 너무 믿고, 한 명은 사랑이 의심스럽고, 한 명은 사랑보다도 다른 감정들이 더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의 골치가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문제다. 뭐 저런 걸로 고민해? 그러나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스스로 입증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본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서슴없이 설파하고, ‘행복인지 아닌지 따지지 말라’, ‘생리가 왜 암묵적인 금기어냐’ 역설하거나, 절반은 후회하더라도 절반은 후회하지 않기에 행동부터 하고 깨닫는다. 이 세 명의 20세기 여인들은 문제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치열하게 실험하며 살아간다. 자신들의 줏대에 때로는 오해 받고 실수하고 쓸쓸해진다. 게다가 기존의 세상에 의문을 던지는 이들의 생애는 특별히 세상을 바꾸진 않는다. 그렇지만 노란색 옷을 시도 때도 없이 입어도 색안경은 절대 끼지 않고, 노란색 부엌에 앉아 뜨겁게 논쟁하지만 서로에게 상처는 주지 않는 이들로 인해 제이미는 노란 햇살 아래서 반짝반짝 빛난다. ‘인생은 절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 것’처럼 노란 햇살을 내뿜는 태양도 언제든 구름 뒤로 가려질 수 있다. 하지만 ‘최고의 자질은 강함’이듯 언제든 구름 뒤로 가려지더라도 태양은 언제나 빛난다.
태양이 내리쬐는 캘리포니아 꿈을 꾸는 페이는 캘리포니아에 가본 적은 없다. 항상 가게가 떠나가라 노래를 틀어 놓는 페이는 몽환적이고 딴 세상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다.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을 좋아하는 페이는 경찰 663을 만나고 나서 노란색 티셔츠를 자주 입는다.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음을 알게 되자 차가운 파란색 하트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더니, 여자친구가 떠났음을 알게 되자 다시 노란색 티셔츠를 입기 시작한다.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경찰 663의 집을 몰래 정리하고, 우연인 듯 마주치려고 무거운 식자재 바구니를 질질 끌고 일부러 그와 부딪쳐 인사한다. 그동안 둘의 머리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태양의 열기에 속수무책으로 더위를 느낀다. 한편, 아무리 좋아하는 마음이라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페이는 더 이상 경찰 663의 집을 청소해주지 못하지만 그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는다. 경찰 663은 당연히 약속 장소인 술집 캘리포니아에 가지만, 페이는 진짜 캘리포니아로 훌쩍 떠난다. 그날은 홍콩에 비가 잔뜩 쏟아졌다. 경찰 663은 비에 젖은 페이의 편지를 온열 기기에 말리고, 이윽고 페이에 대한 마음을 깨닫는다. 사랑은 따뜻하다. 1년 뒤 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온 페이에게 경찰 663은 캘리포니아가 어땠냐고 묻는다. 그저 그랬다. 그럴 수밖에. 사랑을 하는 한, 캘리포니아는 따로 없다. 그 마음이 곧 캘리포니아다.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마음이 가는 사람에게 태연한 척 말을 걸고, 노란 햇살 아래 마음이 쓰이는 사람의 짐을 들어준다. 그리고 같이 햇살 가득한 노란 집에서 캘리포니아 노래를 듣다 잠에 든다. 사랑의 색깔은 노랑이다.
남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은 아무 옷이나 입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