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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Dec 18. 2021

고니는 모르는 것

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고니는 코발트 블루가 잘 어울리더라’고, 그런데 고니는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겠지. 고니야 최후의 승자이면서 유일하고 사지 온전한 타짜니 말이다. 고니는 끓어오르는 혈기와 굽히지 않는 패기가 있고, 의리와 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 덕에 성하게 살아남은 것이다. 그렇게 고니에게는 젊음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패션이나 스타일은 영 모르는 듯싶고, 더 모르는 게 있다면 코발트 블루가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는 사랑이다. 

영화 ‘타짜’는 영화 이상으로 캐릭터와 스타일의 한바탕 잔치다. 리처드 기어보다 아르마니를 더 기깔나게 소화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귀는 단추가 두 개 달린 흰 아르마니 셔츠를 설렁설렁 입고 앞깃을 최대한 요염하게 풀어헤친다. 소맷부리를 가뿐하게 접어 올리고, 셔츠 자락을 거침없이 휘날린다. 그러고는 건들건들 춤추듯 걷는다. 셔츠의 자락을 바지 안에 넣어 입고, 단추를 목 끝까지 잠글 줄만 아는 사람은 많다. 흰 셔츠를 아귀처럼 저렇게 애교스럽게 입는 사람은 도무지 없다. 그래서 더 섹시하다. 만약 클래식을 견주어야 한다면, 아귀보다 역시 평경장이다. 크림색 페도라와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이나 트렌치 코트의 스타일은 험프리 보가트도 울고 갈 기세다. (실은 아가리판인) 화투판에서 신사적인 매너와 양반적인 격조를 지키는 평경장이 입는 의상은 고전적일 수밖에 없다. 말을 해야 할 때도 굵고 강렬하게 한 마디만 던지고 마는 평경장에 비해, 고광렬은 입담이 화려한 듯 장황하다. 타짜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일까, 수트와 넥타이를 갖추지만 영 세련되진 않다. 상대를 놀리느라 수시로 바쁜 그의 혀처럼 수트는 방정맞고, 넥타이는 경망스럽다. 저렴한 말솜씨지만, 덕분에 인생살이에는 유머가 묘미임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고광렬의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고니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함께 다닌 거겠지. 그렇다면 고니는 정마담은 잘 알았을까? 

정마담은 손끝까지 철저하게 치장되어 있고, 손끝으로 흘리는 움직임은 가히 치명적이다. 즉, 계산적으로 옷을 입고 손을 움직이며 사람을 속인다. 트임이 있는 치마나 가슴이 파인 드레스 전부 상대방을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철두철미하게 속이려는 미끼다. 사뭇 과감하면서 자못 천박한 옷을 프로페셔널하게 입는다. 정마담은 미끼로 호구 아니 그러니까 물고기를 곧잘 낚아채고, 낚아챈 물고기로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하는 데 외에 여념이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고니도 다른 타짜처럼 비즈니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 베거리할수록 마음이 조여진다. 고니가 떠나도 크게 애달프지 않았다. 그러려고 애쓴다. 정마담은 호구 한 명 잡아 새 판을 짜기 위해서 어울리지도 않는 딸기 우유 원피스를 입고 비위를 살살 맞춘다. 그리고 한숨처럼, 담배 연기처럼 속마음을 내뱉는다. 

“먹고 살기 힘들다, 고니야.” 

참 힘들게 먹고 살면서 큰 돈을 만지는 정마담은 한때 고니 앞에서 어떤 옷을 입기는커녕 맨몸을 보인 바 있다. 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여준 고니를 찾아내도, 고니는 더 이상 정마담에게 관심이 없다. 자신과 똑같이 돈, 돈, 돈 했던 고니가 자신보다 어린 여자를 옆에 두고 행복해 보이는데 꽤 열이 받는다. 결국 아귀가 벌이는 큰 판에 고니를 끌여 들이지만 정마담도 타짜이기에 감정을 ‘밑장 빼기’ 해 놓는다. 그러나 정마담이 간과한 게 있다면, 고니는 고니지만 타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정마담이 평경장의 죽음에 수를 쓴 것을 알게 되고, 아귀의 손을 자르고, 딴 돈의 절반만 가져가는 고니는 정마담의 판 바닥에 아예 미련이 없다. 순백색 홀터 톱과 바지를 입은 정마담은 그보다 탁한 색의 트렌치 코트로 그가 돈 무더기에 지른 불을 끄기 위해 허덕거린다. 순백은 절절한 색깔이다. 뭐가 묻어도 극명하게 티가 난다. 트렌치 코트는 캐시미어 코트나 울 코트와 다르다. 참혹한 전쟁과 잔인한 날씨 속에서 태어나 사람을 지켜주는 코트가 트렌치 코트다. 정마담은 그러한 트렌치 코트를 갈색이나 회색이 아니라 탁한 순백으로 갖고 있었다. 빨간 피를 빨간 피로 씻어낸 날, 아귀와 승부를 본 날, 정마담이 고니를 만나기 전까지 항상 우선이었던 돈을 잃은 날, 정마담의 고니에 대한 탁한 순백의 마음은 발각된다. 다친 고광렬을 부축하고 유유히 떠나려는 고니에게 정마담은 총을 겨누고 원망이 섞인 사랑을 다해 절규한다.

“쏠 수 있어!”

정마담은 덜덜 떠는 손으로 고니에게 총을 쏘고, 총을 맞은 고니를 보고 몸서리친다. 그 바닥에서 화려한 화투짝 좀 만졌을 정마담을 덮어줄 탁한 순백의 트렌치 코트는 불과 같이 타 버렸을 테고. 

어차피 우리 다 서로를 속고 속이면서 사는데, 순정 좀 간직하면 어때서. 이래도 저래도 가진 것 다 잃을 수 있는 건데, 순애보 좀 간직해도 좋잖아. 정마담은 고니를 총으로 쏜 날 입은 것과 흡사한 트렌치 코트를 몸에 꽁꽁 감고 물러난다. 고니를 가슴에 묻은 정마담은 아무 옷이나 입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걸 

보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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