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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Mar 15. 2022

누룽지는 서툴어도 괜찮아

둥글게 둥글게 

음식 : 누룽지 (한식품 ‘우리쌀로 만든 구수한 누룽지’)

음악 : Bad Day(Daniel Powter 창작, 노래)


여행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웬만한 로망은 깨지고, 로망 따위가 의외로 별것 아니라고 허무하게 깨달을 즈음 누룽지가 사무치게 먹고 싶어진다. 나는 이국으로 여행만 가면 음식이 달아지고 느끼해지고 찼다. 환상을 실현하느라 위장의 비명을 씹었다. 아침에는 꼭 비건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었고, 길 가는 곳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으면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들렀고, 평상시 잘 먹지 않는 도넛과 수제 햄버거를 넙죽 사랑했다. 놀이터 가는 어린이처럼 편의점과 슈퍼마켓을 갔고, 장난감을 보는 어린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진열대 위 과자와 초콜릿을 보았다. 나름 양심적으로 군다고 끼니로 챙겨 먹은 음식은 쌀밥커녕 샐러드와 생선이었다. 여행만 갔다 하면 식습관은 그 모양이 되었다. 책과 영화로 보기만 했던 근사한 음식들은 고국보다 여행지에 널렸으니, 그것들은 유혹이 아니라 달가운 권리였다. 그러다 보니 브런치로 수플레 팬케이크에, 간식으로 헤이즐넛 잼을 바른 토스트를 먹는 식으로 단 음식에 찌들었다. 한편, 보복이기도 했다. 평소 아니, 아주 어렸을 적부터 군것질과 패스트푸드를 참고 살았고, 여행이란 명목으로 스스로를 마음껏 용납했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보다 ‘사람은 참고 살면 병난다’는 쪽에 더 납득이 갈 정도로 정신을 못 차렸다. 이 초콜릿은 한국에서 안 파니까, 이 케이크는 살면서 처음 보니까 구실을 들먹이며 너그럽게 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고팠다. 아니, 배가 고프다기보다 허했다. 양이 적든 많든, 영양가가 있든 없든, 방금 식사를 마쳤든 아니든 마치 입에 아무것도 넣은 적이 없는 것처럼 허했다. 하루 종일 끊임없이 입에 뭘 넣어도 무언가 차는 느낌, 하다못해 뱃속이라도 찬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시드니에서는 아침에 요거트, 크루아상과 커피, 점심으로 호주식 월남쌈, 저녁으로 소고기에 돼지 고기, 게다가 사이사이 초콜릿이나 과일, 빵, 과자를 흡입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물까지 시도 때도 없이 마셨다. 입에 넣은 음식마다 신기하고 기분에 만족스럽고 달았던 만큼, 내장에 들어가는 음식에 체하고 거북하고 불편한 빈도가 늘어나고 그 간격도 좁아졌다. 그럼에도 스스로 도무지 제어가 안 되었다. 그 전날 체해서 기어이 손을 따고 여직 어지러워도 니글니글하고 달아 터진 식사를 관둘 줄 몰랐다. 연이은 단맛의 폭격에 입 안은 양치를 해도 껄끄러웠고, 속은 체기의 상흔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실성한 듯 저작운동을 하다 어느 순간 짙은 안개가 걷히듯 퍼뜩 정신을 차린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고픈 건 배가 아니다. 내가 배를 채우고 싶은 건 음식이 아니다. 이걸 먹으면 남들처럼 평범할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음식들이 나와 맞지 않을 때 느끼는 실망감과 좌절감이었다. 이런 음식을 마음껏이나 실컷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길 기대했는데, 아닌 것이다. 트렌디한 식당에서 혼자가 아니길, 왁자지껄한 밥상에서 혼자라 느끼질 않길, 무얼 먹든 몸과 마음이 불편하지 않길 바랬는데, 철저히 아니었다. 내 친구들은 가족과 이미 가 보았다던 여행지로 홀로 떠나 말로만 들은 음식을 외로이 먹으며 타인의 삶과 나를 일치시키려 하자 곧바로 체감되는 괴리감으로 뱃속이 뒤틀렸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억지로 자리를 지키다 끝내 느끼는 허망감에 뱃속이 거덜났다. 배고픔이 가짜였던 만큼 맛있다고 여긴 것도 착각일 테다. 어떻게 온 여행인데 맛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우격다짐이었을 테다. 스스로 억지를 부린 통에 속내는 제풀에 지치고 말았다. 신음하는 속내는 이윽고 뱉어낼지언정 무엇 하나 씹고 삼키길 힘겨워지고 말았다. 그런데 아직 먹어야 하고 또 먹을 음식은 이제 더 이상 먹기 싫은 음식이었다. 카페에 가서 예쁘장한 케이크나 커피도, 레스토랑의 거창한 육식이나 브런치도 울며 겨자 먹기가 되었다. 그렇게 막막해질 때 나의 생됨이 괜히 원망스러워진다. 한낱 여행과 음식으로 생을 극복시키려고 했던 구상이 서툴기 그지없었다. 못난 스스로가 서러워, 집으로 돌아갈 그날까지 눈 앞이 그만 속수무책으로 부예지고 말았다. 눈가가 촉촉한 찰나, 간절해지는 건 단 하나였다. 누룽지. 

그 추억이 다른 추억들에 비해 안개처럼 자욱한 건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눈물을 펑펑 쏟았기 때문이다. 눈이 너무 맵더니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펑펑 쏟아졌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어찌할 줄도 몰라 고래고래 소리를 내어 울기만 했다. 눈은 점점 아파오고 무서웠다. 엄마는 어딜 가고 없었고, 내가 있는 곳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할머니 집이었고, 내 곁에는 할머니만 있었다. 할머니는 양파를 까다 화들짝 놀라, 까던 양파를 두고 내가 있는 방 한 구석으로 다가오셨다. 나는 말도 못하고 그저 자지러지듯 울고 할머니는 어르고 달래기보다는 쩔쩔매셨다. 할머니는 발을 동동거리며 우는 아이를 차마 안지도 못하시고 그저 손에 장난감과 과자를 쥐어 주셨지만 다 소용없었다. 커지는 울음 소리에 안절부절 못하시던 할머니는 방 안에서 날 데리고 마당의 평상으로 가셨다. 그러고는 말랑말랑한 누룽지를 내 입에 손수 넣어주셨다. 그게 나의 첫 누룽지였다, 기억하기로는. 미처 굳지 않은 탱글한 밥알이 잔뜩 붙은 누룽지는 말랑한 동시에 공깃밥보다 쫀득하고 고소함이 진득하였다. 무엇이 날 울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그 고통을 설명할 줄도 모르고 우느라 파김치가 된 나는 사뿐히 내리쬐는 햇살 아래 맑은 바람을 쐬며 어느새 눈물을 뚝 그치고 누룽지를 냠냠 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할머니는 그제야 안심하신 듯 내 옆에 앉아 누룽지를 떼어 건네며 내 등을 토닥여 주셨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잠시 외출하였던 엄마와 이모가 돌아와 할머니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이모는 바로 알았다. 양파의 매운 기가 아이에게 독했을 거란다. 엄마는 날 꼭 안아주고 이모는 눈가에 아직도 송골송골 맺혀 있는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안개는 언제라도 걷히게 되어 있고, 그곳에는 햇살이 기다렸다는 듯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이 추억은 눈물과 누룽지 맛이 난다. 누룽지만 떠올려도 할머니가 떠오른다. 엄마가 덤덤히 말하기로도, 할머니는 나 이전에 앞서 자식을 셋, 손주를 셋이나 키웠는데도 아이 돌보기가 그래도 서투르시다고. 할머니의 네 번째 손주인 나도 솔직히 할머니가 재미있게 놀아준 기억이 없다. 정다우시지만, 살갑기보다도 무뚝뚝한 편이시다. 다시 말해, 표현이 서툰 편이시다. 그날 혼자서 잘 놀다가 오열하는 네다섯 살 손녀를 능숙하게 타이르긴커녕 혼비백산하셨을 할머니가 당시보다 도리어 나이가 들수록 눈에 선해지고 애틋해진다. 자식 셋, 손주 셋을 키운 경험이 있어도, 또 할머니가 되어서도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점이 왠지 모르게 귀엽고 미소가 지어지기까지 한다. 정확한 까닭도 알지 못하고 당황하다가 덜 굳은 누룽지를 먹이자 울던 아이가 겨우 잠잠해진 순간 한시름 놓았을 할머니를, 할머니의 수많은 모습 중 꼭 그때의 할머니를, 할머니가 간절하게 손녀의 손에 쥐어 주셨을 누룽지를 나의 서툶이 실패할 때마다 상기한다. 

누룽지는 완성된 음식이라기엔 애매하고, 음식이 아니라기엔 도대체 무엇으로 구분할 것인가? 누룽지는 고효율을 찬양하는 현실에서 비효율의 표상이라 불릴 일이다. 쌀만 씻어 안치면 알아서 다 해주는 전기 밥솥을 굳이 두고 물 양, 불 조절, 시간까지 온 신경을 쏟아야 하는 냄비밥을 지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시간이 소금 아닌 돈인 세상에서 찾기 어렵다. 물 양이 조금만 덜 적당해도, 불이 조금만 더 세도,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가도 누룽지는 까딱하면 타 버리기 십상이다. 누룽지는 애를 써도 그 마음을 좀체 몰라준다. 완벽에 완벽을 기해도 탈 듯 말 듯, 미치겠다. 잠시나마 한눈을 팔아도 아니, 냄비를 올려둔 사이 집안일을 하겠다는 잠시 홀딱 타는 냄새가 나니 냄비만 불 위에 올려두어도 은근히 애간장이 탄다. 그런데 뭐, 좀 타면 어떤가. 누룽지의 묘미는 들쑥날쑥한 맛이다. 바삭하다 싶으면 딱딱하고, 딴딴하다 싶으면 쫀득하다. 고소한가 싶으면 짭짤하고, 쌉쌀하다 싶으면 달곰하다. 그게 다 탈랑 말랑 하니까 나는 맛이다. 타지 않으면 누룽지가 아니다. 그건 뜩뜩한 밥이나 된다. 그슬림이 있어야 진정한 누룽지다. 노력해도 노력해도 누룽지가 그을린다는 건 노력해도 노력해도 나의 노력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함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력이, 그 실패한 노력이, 노력의 실패가 완성을 만든다. 누룽지는 서툴러도 괜찮다. 누룽지는 서툴러도 완성이다. 물 양이 조금만 덜 적당해도, 불이 조금만 더 세더라도,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가도 누룽지는 어쨌든 누룽지로 완성된다. 따라서 누룽지는 단순한 비효율을 뛰어넘어 실속이다. 태웠는데도 멀쩡한 음식 취급할 수 있고, 게다가 맛까지 나는 음식이 어디 또 있을까. 따지고 보면, 음식을 좀 태우면 음식이 하나 따라오는 거다. 누룽지에는 실패가 좀처럼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누룽지가 먹고 싶은 날은 나의 서툶을 아끼고 싶다는 의미다. 혈혈단신으로 날 모르는 곳으로 떠나면서까지 나는 나의 삶에 간절했고, 불편한 자리를 버티고 몸에 맞지 않은 음식을 웃으며 삼키면서까지 나는 나의 삶이 간절했다. 푸석해지는 밀가루 음식과 퍼석거리는 고깃살을 남처럼, 그러나 내 일처럼 싱겁게 소화하려다 ‘이건 내 생각과 다른데’라고 토하고 싶었다. 그러진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몸이 상하고 마음을 그을렸다고 해도 나는 그 그을림을 사랑한다. 덜 익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굳은 것도 아닌 누룽지의 아주 살짝 탄 맛을 양파의 매운 맛에 눈물을 처음 흘렸던 그날부터 몹시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에 서툴러서 심신에 탈이 났다면 누룽지를 먹어야 쓴다. 서툰 누룽지를 따뜻하게 끓여, 그렇게 속상함을 다스린 후 다시 평범한 음식에 도전한다.  


:: 맛있게 먹는 법

세상이 이런 식으로 좋아지면 환영이다. 한식품에서 나온 ‘우리쌀로 만든 구수한 누룽지’를 먹고 그만 마음이 다 설렜다. 앞으로 여행 갈 때 이걸 들고 가면 딱이다 싶어서. 누룽지가 제아무리 만든 사람 마음이라지만, 아무래도 여행길 가방 속에 넣기엔 나는 못 미덥고, 엄마에게 부탁하긴 죄송한 감이 있으니 말이다. 이전에도 시판 누룽지 제품 이것저것 먹어 보았다. 하지만 전부 가격이 합리적이지 않거나, 너무 딱딱하거나, 누룽지보다는 쌀알에 가까울 정도로 부스러기라서 곤란하였으니 여간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꼭 여행 때문에 달가운 것만은 아니다. 3kg이라는 양 덕분에 누룽지를 아무 때나 먹었다. 간식으로 오독오독 먹고 푹 끓여서도 먹고, 재미가 좋았다. 이러다 보니 누룽지 끓이는 솜씨가 자연스레 늘었다. 먼저 큰 사발의 3분의 1 정도 높이까지 누룽지를 채운다. 그 다음, 뜨거운 물을 부어 뚜껑을 닫고 주식 투자를 한 것처럼 기억에서 잠시 잊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서 뚜껑을 열면 누룽지는 수분감과 식감이 동시에 살아 있다. 그 상태로 물을 충분히 부어 중불에 끓이다 약불로 마무리하면 가장 보편적이면서 최고의 누룽지탕이 되는 것이다. 그게 아플 때 취하는 노선이고, 난 요즘 그 전 단계에서 만족한다. 밥과 탕과 죽, 그 사이의 누룽지는 제 본연으로 완벽하게 숨쉰다. 뜨거운 물을 넣어 불린 탓에 구수함은 푸근하고, 오돌오돌함은 촉촉하다. 이른바 누룽지 ‘찜’이랄까. 그나저나 누룽지를 이리 다양하게 먹다니, 누가 내 마음을 다치게 하더라도 끄떡없는 기분이 든다. 


:: 맛의 끼리끼리 

여행만이 나의 기대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일상이 온 삶이 그러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인생이 펼쳐지지 않는 데서 불만을 느끼기에 이제 너무 늦은 나이에 들어섰다. 나는 다만 인생을 예상하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터지는 데서 불만을 느낀다. 그 불안에 정신이 기어코 바스러져 가루가 된 날 엄마는 할머니네서 설탕 누룽지 튀김을 가져왔다. 작은 누룽지 조각조각에 설탕 가루가 듬뿍 뿌려 있었다. 설탕칠을 하도 한 덕에 누룽지가 태양 아래 모래처럼 반짝거렸다. 평소 설탕을 꺼리는 식습관답게 누룽지 본연의 소박한 모습과 달라 나는 순간 멈칫했다. 눈처럼 내린 듯한 설탕가루에 거부감이 들어 선뜻 맛보기 겁났다. 그러나 예의상 한 조각 입에 넣자 세상에 틀린 도전이란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팝콘 맛이 났다. 게다가 튀김은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더니, 바삭함이 이렇게나 일품일 수 없었다. 밀가루 튀김옷 없이도 말이다. 오도독오도독 씹을 때 설탕은 누룽지의 밥알과 어우러져 입 안에서 톡톡거려 즐거웠다. 먹으면 먹을수록 당긴다, 세상에. 끝도 모르고 입으로 들어가니 요물이 따로 없다. 이 썩을까 당 오를까 두렵던 설탕이 처음으로 두렵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신을 가루로 만든 불안도 실은 이 설탕 가루일지도 모르겠다. 두려웠으나 겪고 보니 즐길 수 있는 것. 누룽지는 설탕마저도 고소하게 만들 줄 안다. 


제가 직접 읽었습니다. 

https://youtu.be/B9YN2OxhW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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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게 둥글게>

- 내 원체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

- 마지막 편지

- 샴페인 잔에 담은 우유

- 천 냥 빛

- 하농

- My Life but B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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