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인 인터뷰 <시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확장판
인터뷰어(관점 교환 제안자) 전해리
인터뷰이(관점 교환 응답자) 노희준
배려하면 손해 보는 세상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노희준은 지금까지 사람을 힘껏 배려했다. 도수치료사, 물류 노동자, 스타트업 연구원 사이 공통점은 보이지 않지만 노희준이라는 현미경을 가져다 대면 보인다. 바로 사람이다. 사람을 치료하고, 누군가의 물건을 전해주며, 세상의 수요를 소통과 협력으로 채우던 노희준이 스타트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사람이다. 대중적으로는 필요한 존재를 만들고, 대면적으로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 생존과 돈, 돈과 욕심이 직결되는 스타트업의 영위에서도 노희준은 아직도 아니, 언제나 사람 그 자체와 사람 간의 관계를 최우선에 둔다. 그 이유는 앞으로 찾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온 길들이 곧 그가 앞으로 갈 길이었다. 노희준은 바른 품성과 더불어 사는 삶, 그리고 묵묵한 최선을 지켰기에 현재의 스타트업 설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드는 걱정에도 노희준은 주위에서 축하와 응원을 받으며 출발하였다. 그렇기에, 인품이 곧 성공의 길이 된다.
*해당 인터뷰는 아시아헤럴드에 게재된 스타트업인 인터뷰 <노희준이 가는 길이 곧 준스웨이다>의 확장판입니다. 아시아헤럴드에 게재된 인터뷰 본판은 오로지 스타트업인에 관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인터뷰어인 필자의 의견과 이야기를 생략하였습니다.이 확장판은 그러한 생략을 복원하여 인터뷰의 본래 목적인 인간 대 인간의 담화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따라서 스타트업에만 초점을 맞춰 인터뷰를 읽고 싶은 분은 http://www.asiaherald.co.kr/news/26562에 방문하길 바랍니다. 또한, 본판과 확장판의 차이는 인터뷰어의 의견과 이야기 존재 유무일 뿐, 인터뷰이인 스타트업인의 의견과 이야기는 어떤 변함도 없이 그대로이니 불필요한 오해는 삼가 주시길 바랍니다.
전해리(이하 전): 창업하기 이전의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제가 사실 노희준 대표님을 처음 뵌 곳은 메디프레소였죠. 메디프레소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노희준(이하 노): 선임 연구원으로서 R&D, 국책 과제를 주로 도맡았습니다. 메디프레소라는 기업이 한방 티캡슐, 머신, 헬스케어까지 아우르는 사업을 하기 때문에 제가 해야 하는 일의 범주가 굉장히 넓었습니다.
전: 메디프레소가 첫 직장은 당연히 아니었겠죠? 메디프레소보다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요?
노: 병원에서 도수 치료 일을 한 것이 첫 직장이고 첫 직업이었어요.
전: 원래 회사 직장인이 아니셨어요?
노: 제가 다양한 일을 거쳤어요. 진로와 관련하여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제 목표였기 때문에 병원에도 있었고, 쿠팡에서 ‘쿠팡맨’으로도 있었고, 배달 대행도 했고요. 우체국에서도 잠깐 근무했어요. 5톤 트럭을 몰고 취급소와 우체국에 있는 택배와 우체물들을 날라서 물류 창고까지 배달하는 일이었습니다.
전: 대학 전공은 혹시 어떤 분야였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노: 대체의학과에요. 한방건강관리학.
전: 대학 전공이 첫 직업과 직장으로 연결되었군요. 그렇지만 그 후부터 첫 직군에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분야를 거쳐 길을 이은 거고요. 최대한 다양한 일을 경험해보고 싶었다고 말씀하신 바에서도 미루어 볼 때, 안주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노: 한 단어로 정의하기 모호하긴 한데, 살다 살다 보니까 다양한 직군을 경험하게 되었네요.
전: 본인 의지였나요?
노: 자의 반 타의 반이었어요. 취업이 안 되어서 취업이 가능한 곳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죠. 물류 회사에서도 근무했죠. ‘도우물류’라는 곳인데, 배차하는 일이었어요.
전: 도수 치료, 택배 상하차, 메디프레소 선임 연구원 업무가 대표님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요?
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력을 기반으로 해서 회사를 지원하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채용이 되었겠죠?
전: 메디프레소 입사도 역시 같은 개념일까요?
노: 네, 그렇죠. 이력서를 넣고 면접 보고 채용된 것뿐이에요.
전: 많고 많은 기업 중에서 왜 하필 스타트업에 지원했을까요? 어떤 의미나 목적이 있던 걸까요?
노: 이렇다 할 의미는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곳에 지원했는데 그때는 채용이 잘 안 되었기 때문에, (웃음) 그러니까 서른 이전에는 이력서를 100군데를 넣으면 30~ 40군데에서 연락이 오는데 남자 나이 서른을 넘어서니까 10군데 미만이더라고요. 취업이 잘 되었고,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죠? 대표님은 무엇을 할 수 있길래 도수 치료, 물류, 메디프레소에서의 업무까지 아우를 수 있었던 거죠?
노: 글쎄요, 저는 어떤 일이든 의지 차이라고 봐요. 쿠팡 물류 창고에서 물건을 나르는 것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메디프레소 연구원으로서 기능성 티캡슐을 개발하는 것도 그렇고요. 대전대 한의학과 교수님들과 협업할 수 있는 접점도 저였습니다. 도우물류에서 배차하는 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속했고요. 제가 할 수 있고, 잘할 수 있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일. 시행착오야 어떤 일을 하든 다 있는데 그걸 줄이려고 고민하고 의지를 갖고 했어요. 그런 노력들이 쌓여서 지금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 저는 앞선 경력들이 서로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또 그렇지는 않네요. 도수 치료와 메디프레소의 공통점에는 한방이 있고, 물류와 지금 스타트업 대표 업무의 공통점에는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열쇠 말(keyword)이 존재하고요.
노: 대체의학이라 하면 의료 행위를 제외한 모든 일을 합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요. 어쨌든 교육 범주가 넓었어요. 해부학, 경영학, 아로마 테라피, 마사지, 피부 미용도 배웠어요. 견문을 넓히게 된 계기가 대학 전공에 있죠. 그러고 보니 학부 때도 제가 인터뷰를 한 적 있어요.
전: 어떤 인터뷰였나요?
노: ‘난 전공을 살려서 병원에서 이런 일을 할 거다’라는 인터뷰였어요.
전: 그런 인터뷰를 하셨는데 결국에는 전향을 하신 거네요?
노: 그럴 수밖에 없었죠. 물리치료사만큼은 국가 면허증이 없었거든요. 2010년도에 도수치료라는 항목이 신설되었어요. 물리치료는 기기로 사람을 치료하는 거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손으로 치료하는 일까지 범주가 넓어지니 기존에 수기치료사라고 명명되었던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어진 거죠. 그렇게 제도적으로 개선이 되었고 병원에서도 도수치료 수가(酬價)가 생겼어요. 병원 입장에서는 면허가 있는 사람으로 수가를 안정화하고 환자에게는 비급여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으니까요. 현재 급여도 제가 일했던 때보다 훨씬 높아졌더라고요. 제가 실장으로 근무했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전: 그 일을 그만둔 걸 후회하지 않으세요?
노: 학교를 다시 가야 해요. 면허를 따야 하니깐요.
전: 그럼에도 학교에 다시 갈까 생각하진 않으셨고요?
노: 해보긴 했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웠죠. 가정이 있어서요.”
전: 그렇다면 각각의 이력에서는 어떤 것을 배우셨을까요?
노: 병원에서는 외래로 오는 급성 환자부터 말기암 환자까지 만나거든요. 말기암 환자여서 전날 치료를 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오니 병실이 치워져 있더라고요. 아침마다 정수기에서 만났던 어르신이 계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짐이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옥상에서 뛰어내린 경우도 있었어요. 다사다난했어요. 치료를 해서 보람을 얻었던 일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적도 많았죠. 병원에서 일하면 삶이라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돼요. 그래서 병원 직원들이 일 끝나면 술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많이들 풀어요. 특히, 원무과 직원들은 감정 노동자와 같다고 보면 돼요. 의료 서비스도 감정 노동과 비슷해요. 쿠팡맨으로 일했을 때는 하층민 격의 대접을 받으면서 고생했죠. 쿠팡에서 정신 교육을 하거든요. ‘당신들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고 교육을 시키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전: 지금에야 택배 노동자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죠.
노: 아파트 경비원 분들이 함부로 대한 경우도 많았어요. 또...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에도 배드민턴 물류 담당으로도 참여해서 선수들과 대화하는 등 재밌게 일한 적도 있어요. 쿠팡을 그만 두고 일용직으로 천안 목천 물류 센터에서 일하기도 했어요. 물류 쪽에서 많이 일했죠. 그럴 수밖에 없는 건 대한민국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물류 쪽, 험한 일밖에 없었어요. 직장이 없으면, 특히 대전에서는 연구 개발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독립해서 가정을 이뤘으니 고향(서울)으로 올라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요.
전: 부담이 크셨겠어요.
노: 부담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내가 선택했고 내가 가는 길이니까 책임을 져야겠다’ 생각했던 것뿐이에요. 날 새서 물류 창고에서 일하기도 하고요. 육체적으로 점점 버티기 힘들었어요.
전: 육체적으로 힘들면 정신적으로 버티기도 힘들잖아요.
노: 그래서 배달 대행도 했어요. 그러다가 구직 생활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메디프레소에 들어가게 되었죠. 다양한 경험들이 있다 보니 깨달음이 있어요. 지금 이 상황에서도 깨달음이 있어요. 나 자신이 많이 부족하구나 깨닫기도 하고요.
전: 무엇이 부족한데요?
노: 다 부족해요. 대기업에 근무하는 가족들,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요. ‘사’자 들어가는 직업 가진 지인들 많으니까요.
전: 저도 그래요. 어려서부터 주변에 똑똑하고 잘난 친구들이 많았어요. 사회적으로 번듯한 직업을 가진 지인들도 많고요. 그 사이에서 비교 당하는 일도 있지만 저는 사실 그다지 개의치 않는 편이에요. 내 인생은 내 인생이고 그 사람들 인생은 그 사람들 인생이니깐요.
노: 사람들이 그렇죠. 교회, 엄마·아빠들의 모임만 봐도 그 안에서 자식들 비교를 해요. 내 인생이 실패한 인생인가 회의감이 많이 들었어요. 저는 박봉인데 ‘아무개는 월급만 모아서 아파트를 벌써 샀다더라’ 얘기를 듣죠. 그런 식으로 배제 당하다 보니 고민이 컸어요. 그 답을 찾기 위해서 다양한 직군에 도전을 했던 것 같아요.
전: 영향이라기보다는 자극처럼 보여요.
노: 저는 좀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했어요. 그 사람들 인생은 그 사람들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다. ‘다른 사람이랑 똑같은 시간을 공부해서 똑같은 결과물을 얻지 못해도 이제 개선하면 되지 않을까’ 당당하게 생각했어요. 오히려 부모님과 대립했어요. 부모님이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고 권할 때 저는 ‘내 길은 내가 알아서 찾겠다’면서 집을 뛰쳐나갔어요. (웃음)
전: 그래도 내가 이만큼 노력했는데 왜 이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을까 고민한 적은 없으세요?
노: 사람인지라 고민했죠. 하지만 그렇게 하게 되니까 목표에 미달할 때 그전의 기대심리 때문에 힘들더라고요. 나이가 들면서 내려놓게 되었어요. 또 ‘선한 영향력을 주면 되겠구나’ 다짐했어요. 어떤 방법이든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로 인한 나의 영향력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되겠다고 깨달음을 얻게 되어 열심히 했어요. 그만큼 성과가 따라왔어요. 지금 제가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된 것도 누군가의 추천으로, 그러니까 주변에서 저를 좋게 여기기 때문에 일어난 거죠. 저는 어디 가서 욕을 들을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아요. 할머니의 가르침으로 최대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열심히 살고 있었고 더 긍정적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에요. 이렇게 창업해서 세종청년창업사관학교에 들어온 것도 열심히 산 노력의 결과 중 하나에요.
전: 선한 마음가짐과 무엇이든 열심히 임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결과가 상관 관계가 전혀 없을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은 거군요.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창업의 길에 이르렀고 또 세종청년창업사관학교에 입소하는 길로도 들어선 거겠죠. 막 창업한 심정은 어떠신지요.
노: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지금도 마냥 좋지는 않아요. 직장에 있을 때와 달라요. 어떤 틀 안에서 구성원으로 월급을 꼬박꼬박 받을 때와 달라요.
전: 이젠 월급도 스스로 벌어야죠.
노: 그렇죠. 최근에는 공인인증서 발급 때문에 ‘쇼크’ 받았어요. (웃음)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복잡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범용은 거금 10만 원을 1년 치로 내야 하고, 뭔가 써야 할 것도 많고 복잡하더라고요.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배우는 거죠.
전: 이런 복잡하고 번거로운 창업 과정을 모르고 이전 회사에서 퇴사한 걸까요? (웃음)
노: 안다고 생각했는데 겪고 보니까 모르는 것들이 많았어요. 저도 스타트업에 있었고 제가 했던 업무들이 스타트업 대표의 업무와 거의 같았어요. 막상 뛰어들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R&D, 영업 등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내부 외에도 외부 사람들, 협력사나 기관과 네트워킹(인적 교류 및 정보망 형성)을 하게 되면 그렇게 돼요. 사람들이 저를 대표라고 아는 경우도 허다했어요. 그건 다 제가 대표처럼 오너십(ownership)을 갖고 일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었겠죠.
전: 스타트업 업무 경력이 있어서 지금의 창업에 특별히 도움되는 점이 있을까요?
노: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그저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복기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직원들은 실수를 감추려고 하는데 저는 실수까지 전부 솔직하게 말하면서 대표에게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어요. 내부 직원들이나 외부 사람들과 업무를 보면서 늘 진실하게 다가갔어요.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았답니다. (웃음) 퇴사하고 창업한다고 하니까 잘 됐다면서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분들이 많이 계셨어요.
전: 그전부터 대표님께서 뭔가 해낼 것처럼 비쳐졌나 봐요.
노: 저는 저의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 만나는 분들마다 뭘 하든 성공할 거라고 말씀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은 말이었어요. 그게 자신감이고 자존감이었어요. 지금은 그런 말을 나를 좋게 봐주는 뜻으로 여기고 늘 겸손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전: 지금 대표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잘’이라는 건 늘 최고를 뜻하지 않는 듯합니다. 언제나 성실하고 떳떳한 것이 ‘잘’을 의미하지 않나 간주됩니다.
노: 그러려고 노력은 했죠. 남에게 기준을 맞추다 보면 원래 속도(pace)보다 과속(over pace)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 보면 건강을 해치더라고요. 메디프레소에서 그랬어요. 집에도 안 가고, 새벽에 나와서 밤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고요.
전: 스타트업이라 하면 으레 그런 전념을 떠올리기 마련인데요. 생존이 워낙 다급하잖아요. 스타트업에서 일하면 일과 삶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대표들도 많아요.
노: 그 문화에 저는 반대해요. 근로자라고 해도 한 사람이고 삶이 있는데, 회사에만 너무 집중하게 되면 그 사람의 삶이 아깝잖아요. 저도 ‘내가 날 쏟아부어서 회사가 개선되면 좋아지겠지, 회사가 잘 되면 나도 동반 성장하겠지’ 생각했는데 결론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스타트업은 다 이래’, ‘스타트업은 다 이렇게 해야 돼’라고 누군가 말하면 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스타트업도 중소기업처럼 마찬가지로 회사이고 근로자로서 일하는 것도 매한가지인데 그런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서 한 사람에게 짐을 씌우는 건 희생을 강요한다고 봐요. 기존의 업계 문화라고 해서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다고 제가 겪고 나서 알게 되었어요. 이런 경험으로 인해서 관점을 달리 갖는 일이 잦아져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었구나.’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게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봐요. 예전에는 ‘내가 말하는 게 무조건 맞아’라고 생각해서 대화를 주도하려 했다면 이제는 ‘아, 이런 관점도 있구나’라면서 수용하게 돼요.
전: 창업에 대한 관심과 의지는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노: 메디프레소 입사하고 나서 막연한 생각은 갖고 있었어요. 부모님도 사업을 하시고요.
전: 두렵지 않으세요?
노: 뭘 해도 두려움은 있어요.
전: 겁은 아닌 거네요?
노: 겁이 났으면 물류 창고에서 상자 나르고 저보다 어린 애들에게 일용자라고 무시당하면서 일하고 있겠죠.
전: 제가 대표님이라면 겁부터 났을 텐데, 그래도 대표님은 스타트업에서 근무도 하셨고 부모님께서도 사업을 영위하시니 창업과 사업에 관련하여 아예 일자무식은 아닌 점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노: 사업을 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흐름이 있잖아요. 그런 흐름에 관해서 대략적으로, 직간접적으로 배우니 보완점을 알게 돼요. 굳이 메디프레소가 아니어도 여러 관계에 있는 스타트업과 대화하다 보면 이런저런 방법을 배우죠. 스타트업에서 근무했던 경력보다도 주변 스타트업 대표님들, 지인들과 서로 정보를 교환한 점에서 원동력을 얻었어요. 네트워킹이 좋았고, 한 회사의 대표가 되었으니 네트워킹을 더 중시합니다. 지금 네트워킹 구축에 주력하고 있어요.
전: 창업의 거점으로 청년창업사관학교를 지원한 이유가 있을까요? 다른 보육 기관도 존재하니깐요.
노: 제가 여러가지 아이템을 갖고 있는데요. 그중 한 아이템이 한 재단의 사업화 지원 정책에 선정되었는데, 올해부터 중복 선정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했어요.
전: 포기가 되던가요?
노: 포기해야죠.
전: 왜요?
노: 그럼 둘 다 안 되니깐요.
전: 둘 다 안 되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네요.
노: 규제가 점점 촘촘해지고 있어요.
전: 왜 그럴까요?
노: 청년들에게 골고루 지원해주겠다는 의도가 크겠죠. 꼭 사업계획서를 잘 쓰고 발표를 잘 하는 사람들에게만 지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청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취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전: 그럼 준스웨이의 사업 아이템은 무엇인가요?
노: 펫테크(Pet Tech)요. 반려동물을 위한 기술력을 겸비한 아이템이에요. ‘메디노’라는 머신(기계) 개발을 위해 IoT와 같은 기술적인 요소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사업화 아이템을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어느 날 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반려 동물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점이 눈에 띄었어요. 그렇게 반려 동물이 먹고 마시고 사용하는 것이나 그런 문화를 조사하면서 블루오션을 찾았어요. 현재는 기술력을 보강하기 위해서 협력사도 알아보러 다니고 있어요. 하나씩 구축하고 있네요.
전: 사업 전략으로 B2C(기업 대 소비자 거래)를 고려하고 계신 걸까요?
노: B2C를 하기 위해서는 브랜딩 전략이 필요한데 스타트업 초기라서 자금 부족으로 당장에는 B2C가 시기상조입니다. 향후 자금이 어느 정도 확보되거나 투자금이 들어온다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전: 대표님의 판단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갑니다. 대표님은 첨단 과학 기술 기반의 전공자는 아니시죠. 자신이 기존에 배우지 않은 것을 활용해야 하는 현실을 대표님은 어떻게 극복하고 있나요? 전문자도 아니고 모르는 것이 많으실 텐데요.
노: 주변의 인맥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네트워킹을 강조해요. 제가 모르고 부족한 부분을 혼자 공부하면 10시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지인의 도움을 활용하면 1시간 안에 해결이 가능한 거에요.
전: 제가 이 스타트업 업계를 알게 되면서 굉장히 놀랐던 건 스타트업끼리 서로 도움을 굉장히 잘 청하고 들어준다는 거에요. 자신이 모르는 점, 자신의 회사에는 없는 요소를 다른 사람들에게 구하러 다니더라고요. 저는 생전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기 무서워하는 사람이라 이런 스타트업인들의 능동적인 면모가 매우 생소하면서도 놀랍습니다.
노: 서로 상생하는 거죠. 실제로도 네트워킹을 통해서 해결되는 사례가 많아요. 네트워킹 자리에서 고민을 토로하다가 소개를 거쳐 기술 이전 받는 사례를 접한 적이 수두룩하니 네트워킹을 사업의 주요 요소로 잡을 수밖에 없어요.
전: 그렇게 하다 보면 앞으로 아이템과 사업 모델이 구체화되겠죠?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 사람을 고용하게 될 텐데 고용에 관해서도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겠어요.
노: 사람을 채용하는 건 필수불가결하죠. 사업을 키우려면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관계에 대한 고민이 커져요. 이전부터 여러 경우를 보았죠. 이제 내 직원이니까 무한 신뢰하는 대표, 내 직원이니까 매사 확인하려는 대표 등 다양한 대표를 접하면서 ‘내가 대표라면 어떻게 할까’ 고민했죠. 또 최근에는 언행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어요. 구성원 내 존재하는 리더의 말 한 마디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방의 반응을 느끼는 계기가 근래 있었어요. 그래서 관계와 언행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직원들 채용은 제품 개발이 어느 정도 끝나면 하게 되겠지만요.
전: 성장에 관해 더 논하기 전에, 혹시 초기 자본금에 관해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노: 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 제공하는 지원금이 있어요. 활용을 최대한 잘 해봐야죠. 그래서 주변에 호소하고 있어요. (웃음) ‘자금이 넉넉하지 못하니 좀 도와줘라’ 하면서요. 도움 많이 받고 있죠. 명함도 친한 디자이너 대표께서 해 주신 거에요. 시안을 다섯 개나 보내주셨더라고요. (웃음)
전: 그동안 쌓은 덕이 많으신가 봐요.
노: 그렇다기보다는 주변에 잘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전: 세종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우고 계세요?
노: 요즘은 제 아이템의 사업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줄이는 교육을 받고 있어요. 이 아이템이 시장에 나갔을 때 소비자가 필요한 제품인지 페르소나 설정, 돈 들이지 않는 검증법 등 코칭을 받고 있어요. 내일 코칭이 있는데 아직 과제를 못 했네요. (웃음) 모르는 것이 있으면 당장 사무실에 가서 물어보고요. 이곳의 경쟁력이 센 이유가 그만큼 어려웠던 부분을 챙겨주기 때문이에요. 아까도 보면, 사람들이 무작정 찾아와서 문을 두들기잖아요.
전: 제가 내내 궁금했던 건데, 사명을 ‘준스웨이’로 정한 이유가 있을까요?
노: 내 길을 가겠다는 의미에요. 이제까지는 남에게 기준점을 맞춰서 살았어요. 부모님, 선배들 등 기준점을 맞춘 대상이 많았는데 이제 창업을 한 만큼 내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담았어요. 사명에 기호(apostrophe)를 넣느냐(Jun’s way) 마느냐(Junsway) 고민이 많았어요. 사업자등록증을 낼 때 한글로 기입해야 한다고 해서 결국 한글로 표기하긴 하지만요. 이런 하나하나를 배우고 있어요.
전: 그럼 준스웨이의 기준점은 어떻게 될까요? 대표님의 기준점이 회사의 기준점으로도 승화될까요?
노: 어쨌든 제가 대표니 저의 방향성을 갖겠죠. 옛날에는 1+1=2라는 주입식 교육을 받았는데 다양한 경험을 거치면서 나이가 드니 1+1이 마이너스 100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중간 과정도 무시할 수 없고요. 반면 사업 자체는 이윤을 창출해야 하잖아요. 저는 중간 과정을 챙기면서 이윤을 창출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전: 예를 들면요?
노: 연구 개발, 마케팅 팀을 구성하면, 방향성을 바탕으로 꾸준하게 소통하며 중심을 잡아야죠.
전: 때로는 이익보다 가치가 앞서야 할 때는 어떤 결정을 내리실 건가요?
노: 가치만 따지기에는 현실이 녹록하지 않으니까요. 스타트업은 신속하고 목표에 대한 정확성도 높여야해요. 어느 정도의 이해 상충과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전: 이쯤에서 준스웨이의 가까운 목표가 듣고 싶습니다.
노: 지금 당장은 먹고 사는 일이 관건이죠.
전: 스타트업은 우아할 수 없죠.
노: 항상 장밋빛 미래만 있는 건 아니에요. 자금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커요. 또 청사진을 그릴 단계이기도 하니 사업을 어떻게 키워갈까 생각하고 있어요.”
전: 대표님과 같은 입장에 처할 분들께 대표님이 드릴 수 있는 조언이 있을까요?
노: 사람마다 처한 상황은 달라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너도 이렇게 해’라고 말하는 것을 지양하고 있어요. 같은 선상에 섰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없어요. 지금 청년창업사관학교에 똑같은 시기에 입교한 스타트업들도 향후 몇 년 뒤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과 같은 거에요. 대신, 나는 상대방의 고민에 경청하며 ‘나는 이런 경험을 했고 이런 단계를 밟아왔다’는 이야기를 예시처럼 들려주고 바람직한 방향성을 잡아주는 건 참선배라고 봐요. 하지만 자기 자랑에 몰두하는 사람의 주장은 무난하게 넘겨도 되지 않을까 고려됩니다. 어쨌든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있어요. 이렇게 대면해서 대화하는 시간이 적어지고 있어요. 블로그, 인터넷 카페에서 정보를 찾는 사업인이 많은 추세지만, 비대면적인 글만 보고 사업에 뛰어 들면 리스크(위험)가 커요. 그래서 제가 지금 아무것도 없어도 누군가의 고민을 들으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편이에요. 공장에 직접 데려간다거나 하는 식이에요. 저도 그렇게 도움을 많이 받았죠. 사람들과 상호 존중하는 관계를 많이 맺으려고 하죠. 물론 이것도 제가 성공해야 도움의 효과가 크겠지만요. (웃음)”
전: 성공의 기준이 뭘까요?
노: 글쎄요, 스타트업의 관점에서는 매출액이죠. 국가에서 인정해주는 기준이 있겠죠. 고용률, 지적 재산권 같은 것들이요.
전: 그렇다면 스타트업 대표의 덕목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노: 다양한 변수에 다양한 위기 극복 능력을 갖는 것이 대표의 큰 덕목인 것 같아요. 쿠팡에서 일할 때 배운 점이기도 해요. 예를 들면 섬유 유연제 박스나 쌀포대를 나르다가 터지는 경우 쿠팡에서 이에 대응하는 관리 조치가 많았어요. 위기 관리에 대한 능력을 그때 좀 익혔어요. 이렇게 주변의 사례를 벤치마킹해서 나의 고민을 해결하는 거죠.
전: 쿠팡에서 일한 경력이 새삼스럽게 들리긴 하지만, 오늘 인터뷰를 전반적으로 돌아 보면 인생의 어떤 힘든 시간도 절대 헛되게 남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쓸모가 되었다고 느껴지네요.
노: 개인적으로든 경력으로든 언제든 무엇에든 위기는 오죠. 관건은 그때마다 어떻게 관리하느냐. 특정 누구에게 크게 의지할 수 없는 문제죠.
전: 그렇죠. 이제 직원이 아닌 대표이시잖아요. 의지할 분이 없잖아요.
노: 초장에 말씀드린 대로 내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야죠.”
전: 지금 이 시기는 스타트업이 막 잉태하는 시기죠. 이 초창기에서 얻은 결심을 초심(初心)이라 한다면, 성공할 미래까지 갖고 가고 싶은 초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노: 글쎄요... 초심이라...
전: 생각의 시간을 드리기 위해 저의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지금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이렇다 할 기회는 차치하더라도, ‘내가 진심으로 이 일을 하고 싶은 걸까’, ‘혹시 작가라는 직업에 허세가 있는 건 아닐까’, ‘출판이 안 되어도,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컸어요. 그래서 무작정 작년까지 3년 동안 300편의 글을 쓰고, 어쩌다 보니 코로나 사태가 막 심각해졌을 즈음 한 달 동안 50편의 소설 초안을 잡았어요. 물론 그때는 그럴 작정은 아니었거든요. 그렇지만 그런 시간을 보내고 올해 이렇게 전혀 새로운 일을 하니 도리어 그때 아무 보상 없이 글에만 미친 듯이 매달렸던 나 자신이 꽤 자주 상기되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을 증명하는 300편의 글과 50편의 소설 초안이 제 초심이 되었어요. 저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든 이 초심만 있다면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요. 나의 자부심은 커리어나 스펙이 아니라 아무런 경제적 보상이나 전망 하나 없이 써내려 간 그 300편의 글과 50편의 소설 초안입니다.
노: (생각을 결정했다는 듯이 눈빛이 달라진다.) 전 직장에서 퇴사하기 전 인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그때 그 친구들에게 물어봤어요, 꿈이 무엇이냐. 차, 취업, 자기 가게라고 대답하더라고요.
전: 아...
노: 그런 얘기를 듣고 슬펐어요. 제가 그 나이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요.
전: 꿈은 명사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노: 그래서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왔다 가는 세상,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자.’ 적을 만들지 말고 덕을 만들자는 거죠. 그런 생각을 늘 많이 해요. 나의 초심이 뭘까?
전: 초심에 관해서 아예 고민을 안 해본 건 아니네요.
노: 메디프레소에서도 슬럼프가 많이 와서 늘 초심을 찾았어요. 그런데 입사 초반이 초심인 건지, 초심이 정말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일에 치였고요. (웃음) 결론은, 그러니까 제 초심은 결국 우리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에요: ‘덕을 쌓아라’. 덕을 쌓고 손해가 있을지언정 선한 영향력을 끼쳐라. 예전에 돈 욕심이 있어서 남에게 손해를 준 적이 있었는데, 그런 마음은 결과적으로 저에게 안 좋게 돌아오더라고요. 그래서 훗날 여유가 생기면 제가 아는 대표들처럼 기부도 많이 하고 싶어요. 그 대표님들도 지금 마음 잊지 말고 나중에 꼭 실현하라고 말씀 많이 하세요. 그런 선한 영향력이 목표에요. 내년에 나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흐트러지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전: 마지막으로 끝마치기 전, 오늘 인터뷰에서 하지 못한 말이 있을까요?
노: 감사한 자리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의 본판(스타트업 관점 전용)은 아시아헤럴드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asiaherald.co.kr/news/26562
본 확장판은 네이버 포스트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3695781&memberNo=55088636
*위 인터뷰와 사진은 아시아헤럴드에 귀속되며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공유는 링크를 활용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