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정의
다르고 희소한 것을 원해서 ‘피엘라벤(Fjallraven) 칸켄(Kanken)’ 배낭을 메고 고등학교를 다녔다. 해외에서 유학한 사촌 언니의 선물이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 덕이다. 나는 배낭을 ‘칸켄백’이라 부르며 아꼈다. 머지않아 가방에 ‘어글리돌(Uglydoll)’ 인형을 두 개 사서 분기별로 바꿔가며 달고, 가방을 다른 색으로 하나 더 사서 계절별로 번갈아 들었다. 원한 적도 없는 데다가 남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일과를 보내는 나날에 어글리돌이 달린 피엘라벤 칸켄 가방은 소박하고 보장된 행복이었다. 처음에는 그 이름도 읽을 줄 몰랐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등교하고 하교하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와 같은 가방은 고사하고 같은 브랜드의 가방조차 본 적 없으니 참으로 뿌듯했다. 이처럼 브랜드의 가장 일차적 쓸모란 나와 남의 구별에 있다. 요즘도 피엘라벤 칸켄만 보면 내가 떠오른다는 동창생의 말에 얼마나 기뻤던지.
그러나 품질에 대한 만족도는 소유에 비하면 다소 낮았다. 가방에 쓰인 천은 질겼지만 두껍지 않아 완충력이랄 게 없었다. 책의 모서리가 등 뒤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방의 끈도 얇아서 책을 많이 넣은 날에는 어깨가 끊어질 것 같았다. 야박하게 판단하면, 그저 천을 이어 붙이고 끈을 둘러싼 모양새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브랜드의 가방에 비해 색이 좀 덜 바라거나, 티끌이 묻으면 물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편도 아니고, 가는 곳은 학교일 뿐인데도 어느새 가방의 색은 금세 바라고 그 명도도 불균일하게 되었다. 그나마 해어지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단점이 극명했음에도 애정은 단점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어딜 가든 자부심을 가지고 들고 다녔다. 여행을 갈 때, 강의를 들으러 갈 때 등 참 요긴하게도 들었다. 덩달아 칸켄백도 점점 더 낡아졌다. 모래 사막, 공항 내 의자, 땅바닥 등 가뜩이나 연약한 칸켄백이 감당해야 할 환경은 다채롭고 난감하고 까다로워졌다. 그래서 어느 순간,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그 가방 좀 들지 마. 너무 낡아서 안 예뻐.”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었다. 한편 나이가 들어 돈이 오가는 곳을 드나들게 되니 나도 배낭 말고 다른 가방이 들고 싶어졌다. 칸켄백은 잡동사니를 넣는 서랍으로 용도 변경이 되어 방구석에 처박혔다. 내가 한때 가방으로 저것 외에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을 정도로 아꼈음이 믿기지 않았다.
어떤 단어든 존재하는 이상 필요로 인해 존재하게 된 법이다. 배낭이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다른 가방을 들어도 배낭은 집에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배낭이 아닌 가방에 노트북을 넣었다가 어깨까지 포함해서 팔 한 쪽이 절단나는 줄 알았다. 갑자기 배낭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자 배낭으로 유명한 브랜드란 브랜드마다 기웃거렸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구매를 미뤘다. 가격, 디자인, 착용감 등 내키지 않는 이유를 대라고 하면 얼마든지 댈 수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을 상쇄할 만한 직감도 들지 않았다. 구매커녕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거리는 차에 배낭을 메고 먼 길을 나설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래도 한쪽 어깨에 부담을 지우는 것보다 양쪽 어깨에 부담을 지우는 편이 낫겠다 싶어, 어두운 구석에 언제부터 쓸쓸하게 자리잡았는지 모를 칸켄백을 형광등 아래로 끌고 왔다. 나는 분명히 말하는데, 세탁을 했다. 하지만 장담컨대, 칸켄백은 희한하게 세탁을 해도 거의 그대로다. 배낭계의 청바지다. 이젠 그러려니 할 때도 되었다. 겉에 묻은 티끌을 물티슈로 적극적으로 닦아내며, 겉모습이 영 그래도 찢어진 부분은 아예 없음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언제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칸켄백은 마치 어제 든 것처럼 익숙했다. 그 익숙한 불편함은 그대로였다. 오롯이 감지되는 책의 모서리, 책의 무게 때문에 축 처지는 가방과 함께 가중되는 가방의 무게, 그리고 수납물의 크기에 따라 넣을 주머니를 안배하는 나 자신까지 몹시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길을 나섰을 때 굉장히 의외인 건, 여전히 나와 같은 가방이나 브랜드의 가방을 멘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칸켄백을 몇 년 만에 다시 맨 나는 다른 배낭은 아예 매지 못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피엘라벤 홈페이지를 들락거리고, 그 매장을 기웃기웃거리기 이르렀다. 다른 색도 써 보고 싶기도 했고, 노트북 전용 배낭이 있는지 궁금했다. 와중에 놀랐다, 내가 약 10년 전부터 갖고 있는 가방의 디자인에서 달라진 점을 찾지 못해서. 예의 그 동그란 패치, 앞과 양 옆 주머니, 똑딱이 손잡이, 얇은 가방 끈과 뒷면의 X자 모양으로 부착된 끈이 건재함을 인터넷 화면 너머 보았을 때 문득 감동을 느꼈다. 물론 매 시즌마다 색상이나 제품 라인업이 조금씩 달라졌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참 안심했다. 실은, 너무 많이 바뀌었으면 나는 또 어디서 가방을 찾아야 하나 걱정을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좀처럼 없다. 21세기 인류란 오늘과 다른 내일뿐만 아니라 오늘보다 발전한 내일을 기대하는 인류이기에, 뭐든 하루가 멀다 하고 ‘낡았다’, ‘오래 되었다’, ‘새롭지 않다’라는 구실로 가벼이 저버린다. 인류를 잠재적 소비자로 보는 모든 기업하며 업체하며 브랜드는 그러한 인류의 변덕에 호응하듯 하루에도 홍수처럼 새 물건들을 쏟아낸다. 바꾸거나 생산을 중단할지언정 유지하지 않는다. 그때 산 제품을 또 사고 싶어도 팔지 않으니 살 수 없다. 꼭 똑같은 제품이 아니더라도 겉으로 보았을 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제품을 찾기도 어렵다. 겉으로 보았을 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도 막상 입어 보면 소재에서 차이가 남을 확연히 느끼기도 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세상임을 알고, 물이 고여서는 안 되듯이 변화가 생존임도 안다. 하지만 동시에 변화에 관해 이견도 갖고 있다. 변화에 의해서 만물이 순환되고 소생되는 것이 아니라 유지되는 것들이 우선 존재하기에 만물의 변화, 순환, 소생 전부 가능하다. 그리고 유지되는 것들을 변화시키지 않음이 핵심이다.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에 사람은 안정을 느끼며, 어떤 것들은 그대로여야 한다. 고대부터 존재한 동굴 벽화, 르네상스 화가가 그린 그림, 전설적인 디자이너가 남긴 의상 등 우리의 삶에 그대로 머물면서 선사하는 건 단지 경탄만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이어질 거라는 것, 즉 극복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며 그 시절의 권모술수와 사랑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발견되고, 또 그로부터 교훈과 삶의 의지를 얻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변화시킬지 브랜드의 선택이지만, 변화에 대한 압박이 다반사인 오늘날에도 과거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제품을 보면 이런 생각으로 회귀한다: 일편단심. 고로,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 대신 무엇을 변화시키지 않을 것인가 고민하는 브랜드야말로 그 자체로 소비자의 마음에 영속한다. 오랜 시간 변함없이 곁을 지켜준 나의 가족이며, 친구이자 동반자, 혹은 내 편이기 때문이다.
2022년 1월 씀
위 글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글에서 언급된 브랜드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