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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Jul 31. 2019

청춘, 노르웨이의 숲

23/24살 때 ;문학동네 하루키 에세이 쓰기 대회 <장수고양이상> 수상

그림 - 필자

노르웨이는 정확히 어디 있을까? 지명이나 그 존재만으로 노르웨이를 알 뿐이지, 북유럽의 어디쯤 있고 그 속이 어떠한지 바람결로도 전혀 들어본 적 없으니 이걸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완전히 모른다고 하기엔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모른다고 정해 버리기도 애매하다. 그런 와중에, 노르웨이의 ‘숲’이라니.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그려지지도 않는다.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노르웨이의 숲’은 그 유명한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데, 이때 원제인 ‘Norwegian Wood’는 사실 ‘노르웨의 숲’ 외에도 ‘노르웨이산 목재’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나. 이렇게 어느 방향으로도 한 가지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노르웨이 숲을 무라카미 하루키는 청춘을 그렸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소설의 제목으로 붙였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 속에서도 노르웨이의 숲은 등장한다고, 혹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누가 이 ‘노르웨이의 숲’을 청춘을 가장 제대로 표현한 대표서라 불렀을 때 난 너무 슬펐다. 왜냐하면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완전 꼬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어딘가 뒤틀렸다’는 표현은 등장인물들 서로가 서로에게 쓰는 만큼 내가 이들을 비틀어졌다고 묘사하는 건 그리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어딘가 뒤틀린 등장인물들은 생(生)에 있어 큰 진통을 앓거나 이해 받지 못하며 사회에 의심을 품는다. 그나마 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겪진 않았던 주인공인 와타나베도 자신의 주변 인물들로 인해 혼란을 겪는다. 소설 속 그는 자주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현을 쓰며 주변 세상조차도 명쾌하지 않게 서술한다. 심지어 몇몇 등장인물은 개운치 않게 와타나베의 시선 밖으로 퇴장하거나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하물며,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슨 생각인지 소설의 결말을 완전한 해피 엔딩도, 새드 엔딩도 아니라 와타나베가 그저 무너지는 마음을 끌어안고 미도리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으로 끝낸다. 소설의 중심이 청춘인 건 명백하지만, 시종일관 머무는 어둑어둑한 분위기와 끝내 후련하지 않은 결론을 얻은 채 마무리되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나의 청춘은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도대체 무라카미 하루키는 왜 청춘을 이런 식으로 다뤘고 소설의 제목을 왜 ‘노르웨이의 숲’으로 정했을까?
청춘(靑春)은 여름이 아니라 봄이다. 봄은 어떤 계절인가. 푸른 생명이 딱딱한 씨앗 껍질 안에 있다 움트며 세상의 빛을 보는 과정이다. 그러니 우리의 청춘도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 빛을 보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과 같다. 어두움 속에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명료하게 구분할 수 없으니 와타나베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청춘은 밝아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분위기가 어두우며 등장인물들이 기존 세계에 의문을 갖고 내적 혼란을 고통스럽게 겪는 건 푸른 생명이 태초가 지니고 있던 어둠과 카오스(chaos)로부터 탈출해 밝은 세상을 만나려는 투쟁에 가깝기 때문이다. 마치 소설 ‘데미안’ 속 알에서 탈출하는 새가 ‘아프락사스’라는 신에게 날아간다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대부분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이렇다 할 특별한 뜻이 없는 것과 달리, 미도리의 이름인 푸를 록(綠) 자는 풀빛을 가리킨다. 이는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유일하다 싶을 정도로 분명하다. 그런 미도리의 존재를 와타나베는 처음부터 생명력이 고동친다고 묘사했다. 따라서, 아무것도 정확하지 않은 세계 속 망연해지기 쉬웠던 와타나베에게 미도리는 생명 그 자체이자 위로이며 그를 어두침침한 세계 밖으로 이끌어줄 희망이다. 게다가 와타나베에게는 레이코 씨도 있었다. 레이코 씨도 나오코처럼 가히 충격적인 일을 겪었지만 나오코와 달랐던 건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다른 세상으로 향한다는 점이었다. 나오코의 죽음이 야기한 방황을 끝낸 와타나베와 요양원 밖으로 나온 레이코 씨의 일화는 곧 살아있는 자체가 희망이며, 무언가 선택하고 살아가는 자체가 용기라는 의미이다. 그후 이 소설의 끝에서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같이 있고 싶다고 고백하는 건 결국 와타나베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속으로 삼키지 않고 밖으로 그러니까, 생명력에게 명확하게 밝히는 행위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내내 절망적인 분위기에 머물렀어도 절망은 아니었고, 늘 희망을 품고 있었으며 마지막엔 시사하며 끝난다고 볼 수 있다.
당신의 청춘이 어떻든, 당신은 청춘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나. 소설 속 사람들에 대한 설정은 꽤 극단적이지만, 그러한 설정을 들어내면 이 소설은 결국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책임지며 청춘을 이겨내고 세상 밖으로 빛을 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청춘의 대표서라고 불리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이름이 ‘노르웨이의 숲’인 이유는 앞서 필자가 언급했듯이 존재의 이름은 아나 그 존재에 대해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대상인 노르웨이 숲처럼 우리도 청춘을 알지만 모르는 데에 있다. 그리고 와타나베가 청춘과 먼 나이에서도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듣기만 해도 자신의 청춘을 생생하게 떠올린 것처럼 우리도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세상 밖으로 움트기 위해 몸부림쳤던 청춘의 시간을 훗날 불현듯 생각해내며 미지의 세계와 다름없는 각자의 ‘노르웨이의 숲’을 아련하게 그릴 것이다. 속해 있지만 그 위치를 모르겠는 숲 속처럼 우리 모두 청춘 속에 머문다. 당신이 지금 헤매는 것 같고, 모르겠는 걸 모르겠다면 당신은 무사히 청춘을 보내고 있다.
영원히, 누구에게든 청춘은 노르웨이의 숲이지 않을까.


2019.07 2주간 쓴 글, 17일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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