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해리 Oct 28. 2019

오래도록 보고싶은 이야기

오보이! 100호 기고 글 

래도록 고싶은 야기

사진 - 필자


한낱 인간이 지나간 시간에 챕터를 매겨보겠다는 자체가 일면식도 없는 신 앞에 오만한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까만 글자들의 행진의 다음 줄에 <다음 챕터로 계속>을 쓰고 그 다음 장에는 흰 장을 붙여 숨을 좀 고를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최선, 최고가 아니었을지라도 나는 정말 열심히 했는데 너무 열심히 한 것도 죄라면 죄였던 걸까. 내가 이렇게 지치고 어색해지고 망가지는 동안 이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한 현실은 왜 그대로인 걸까. 왜 바뀌지 않을까. 다 나 때문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는데 왜 나한테는 허락되지 않았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이 전부가 반드시 일어났어야 했던 일이라면, 누군가 ‘그렇다’고 귀띔을 해준다면 나는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며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어. 

그냥 살아지지 않아. 


과거의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듯 이 우연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처음에는 그저 관심이었다. 그러다 우연하게 오보이의 일부가 되는 기회를 만났다. 그 우연들은 내가 좌절할 때마다 맞물렸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모델이 되어보고 행복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스스로 주제를 정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난생 처음으로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글을 썼다. 난생 처음으로 지면 인터뷰를 했다. 난생 처음으로 새로운 형식의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오보이는 나에게 늘 우연이었던 동시에 상식 밖의 도전이었다. 난 그 도전들을 해내며 주저앉으려다 다시 일어섰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변화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며, 사진을 연습하고, 내가 한 말들을 책임지기 위해 환경 보호, 채식, 더 나아가 이타적 삶에 관심을 놓지 않고 실천했다. 그리고 글과 사진, 즉 나의 노력이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겪으며 나의 삶에 ‘감사함’을 들였다. 정말 위로가 되는 글이야. 채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 글에 공감이 가더라. 정말, 이렇게 형편없는 나라도 사랑해주는 거니? 이런 나라도? 내가 오보이의 일부가 되는 영광을 겪으며 오보이를 지켜보는 동안 오보이에게서 받은 선물은 오보이 그 자체였다. 살아보면 살아볼수록 사회는 왜 이리도 기가 막히는지. 하지만 오보이는 그런 사회 속에서도 100번째를 맞이한다. 누구는 추워지는 밤 속에서 가련하게 야옹 소리를 내는 아기 들고양이가 왜 소중한지 관심조차 두지 않지만, 오보이 덕분에 나는 그 고양이에 마음이 쓰인다. 오보이는 냉정한 사회가 차가운 눈초리를 보이는 것들에 언제나 따스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오보이를 알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제품 마스카라 실험 때문에 실명한 토끼들이나 제 목소리를 지키려는 독립잡지, 환경을 위해 매일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드는 브랜드라는 노력을 말이다. 우리는 결국 다 똑같은 생명이다. 누구는 급을 나누고 벽을 쌓지만, 우린 동등한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다. 다같이 살아 간다. 오늘을 보내는 건 다 똑같다. 인간이 지구에 끔찍한 짓을 저질러도 지구는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오보이는 유기견 입양 문화를 알리고 채식 문화를 위해 작은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오보이가 100번째 호를 발간한다는 건 아직 세상에 희망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누군가는 채식을 하고, 누군가는 분리수거에 앞장서고, 누군가는 작은 존재에 마음을 쓰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다. 오보이가 나에게 그랬듯, 내가 다른 이들에게 그랬듯. 우리는 서로에게 잘 해내고 있다는 증거 그 자체다. 

노력하고 싶어졌어. 


넌 이해가 안 된다고 그때마다 주저앉을 거니? 

아니. 이제는 그러지 않을게. 

이 우연을 이해하지 못하듯 과거의 일들도 이해하지 않겠다. 대신 이 우연을 사랑하듯 과거의 일들도 사랑하겠다. 나는 여전히 지쳐 있고 어색하고 망가져 있으며 이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한 현실은 언제 끝을 맺을련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번 둘러봐,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을 바람은 참, 언제 맞이해도 경이롭지, 꽃은 꼭 피어나고, 노을만큼 위로되는 것이 어디 있어. 너무 아파하지 마. 너무 걱정하지 마. 모든 일은 그 자리 그 순간에 꼭 일어나야 했기에 일어났던 거야. 다 사랑하면 살아져. 


당신이 

사랑하지 않는 걸

내가 사랑합니다. 


그 어떤 물건도 함부로 사지 않는다. 다 쓴 화장품은 안의 내용물을 닦고 버린다. 포장요리를 가져갈 땐 에코백에 담아 달라고 한다. 내용물이 담겼던 용기와 비닐은 그 안을 물로 헹구고 닦아서 버리거나 재활용한다. 밖에서 생긴 쓰레기는 가급적 집으로 가져가 분리수거까지 해서 버린다. 환경 친화적인 브랜드를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걸어간다. 샤워시간을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인다. 안 쓰는 전기 코드는 콘셉트에서 뽑아 놓는다. 분리수거를 최대한 철저히 한다. 경각심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오보이의 100번째를 축하합니다. 나에게 우연이고 도전이자 인연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용기 냈어요. 내가 모르는 오보이의 쉽지 않았던 시간들과 이타적인 활동들에 박수를 보냅니다. 오보이가 오보이의 일을 멈추지 않아서 100번째를 맞이한 것처럼 나도 성실히 나의 일을 해내겠습니다. 오보이도, 나도 오래오래 각자의 이야기에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또 만나지 않을까요? 


이렇게 살다가 언젠가 시간이 되면 죽을 거라는 걸 알아. 그래서 오늘이 더더욱 오래도록 보고싶은 이야기가 되는 거야. 너는 아직 살아 있고, 세상은 아직 아름다워. 

래도록 

고싶은 

야기, 

래오래 

아요 

대로. 


다음 장에 나는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 갈까. 




2019년 09월 29일 씀 

(이후 아무 수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컨셉진 62호 브랜드 사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