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맹신하고 있는가?

<데이미언 허스트 :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전시 후기

by 이소 시각

우리는 오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데미안 허스트는 단순히 죽음을 잘 표현하는 작가가 아니라, 죽음을 빌미로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절대적이라고 믿는 가치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예술계의 유발 하라리' 같은 존재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는 삶과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복합적인 감정과 욕망에 주목했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 정해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영생을 향한 욕망,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 의학과 과학에 대한 맹신, 그리고 수집과 통제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가지게 된다. 그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욕망이 낳은 사회적 구조 자체에 관심을 둔다. 인간이 당연한 것으로 믿는 가치들, 즉 종교, 과학, 예술, 심지어 자본들이 모두 비슷한 구조적 토대 위에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에 읽고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책 <사피엔스>가 떠올랐다. 사피엔스가 다른 종에 비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언어를 사용해 '상상의 산물'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예시로 '푸조' 회사를 이야기한다. 법인(法人)이라는 말에 사람 인(人) 자를 쓰지만, 이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상 속에 존재하는 '푸조' 회사를 사람들은 믿으며, 그 신뢰를 바탕으로 회사의 규칙을 따른다.


이렇듯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당연하게 믿는 가치들이 있다. 과거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종교'를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의학과 과학'의 힘을 절대적으로 맹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데미안 허스트 <죄인, 1988>
데미안 허스트 <죄인, 1988>


〈죄인〉, 1988

폐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신 친할머니의 실제 처방약들을 진열장에 모아둔 작품이다. 허스트는 할머니가 남긴 수많은 약상자를 통해, 인간이 아무리 의학의 힘을 빌려 생명을 연장하려 발버둥 쳐도 결국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왜 제목이 '죄인'일까? 기독교적 관점에서 질병과 죽음은 인간이 지은 '원죄'의 결과이며, 죄인은 신의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허스트는 현대인들이 과거 종교에 의지했던 것처럼, 이제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알약을 맹신하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려 한다고 보았다. 즉, 병에 걸려 살기 위해 약(현대판 면죄부)에 매달리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을 신에게 구원을 비는 '죄인'에 비유한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의학이라는 새로운 종교에 기대어 죽음을 외면하려는 현대인의 헛된 믿음을 서늘하게 꼬집는다.

데미안 허스트 <무한을 위한 원형, 1998>

이 작품의 해설을 들으면서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우리는 왜 하얀 가운을 입은 전문가에게 이토록 쉽게 의지하는 걸까? 우리가 정말로 믿는 건 내 앞의 의사일까, 아니면 그가 처방해 준 알약일까?


데미언 허스트 <희생제물, 2009>
데미언 허스트 <희생제물, 2009>
데미언 허스트 <희생제물, 2009>

〈희생제물〉, 2009

과거 인류가 신의 제단에 동물을 바쳤다면, 현대인은 의학의 새로운 신 앞에 자신의 몸을 온전히 맡기며 생명 연장을 갈구한다는 걸 상징한다. 모든 것이 정제되고 깔끔한 외관 속에 수집되고 정리되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죽음을 이토록 깔끔한 상자 안에 정리해서 통제하려는 모습을 보니, 최근에 읽었던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과학자들은 서로 종류가 다른 마음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변이를 특정한 범주로 나누어 다루려고 애쓴다. 그들은 깔끔한 작은 상자들에 이름표를 붙이고는 사람들을 분류해 넣는다.(p151)"


작품의 해설은 생명 연장의 의학에 대한 이야기로 설명했지만, 나는 모든 것이 깔끔하게 수집되고 정리된 이 모습에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이분법적으로 나누며, 사람을 16가지 형태로 나누어 버리는(MBTI처럼) 지금의 사회 프레임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을 약과 진열장으로 통제하려는 것이나, 사람을 틀에 넣어 분류하려는 것이나 모두 불확실한, 예측 불가능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데미언 허스트 <죽은 자의 머리와 함께, 1991>

올해 1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계획 간담회에서 데미안 허스트의 전시가 '흥행 위주의 논쟁적 상업 전시'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30년 전 작가를 왜 지금 소환하느냐, 동물 사체와 해골을 사용하는 것이 불쾌하다는 지적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직접 보고 나니 그런 표면적인 논란보다는 '지금 이 시대에 이 작가가 던지는 질문이 유효한가'를 묻는 것이 훨씬 중요해 보였다.



그리고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현대 의학과 과학의 발달 속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가 집요하게 파고든 '영생'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숨이 붙어 있는 상태의 연장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늙고 병듦을 부정하고 영원한 '젊음'만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오만한 욕망의 다른 이름일까. 미술관을 나서는 길에도 그 묵직한 질문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작가의 이전글AI와 함께한 글쓰기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