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닥다리 에디 Mar 29. 2020

방금 그 생각, '메모'하셨나요?

삶으로 부화하길 바라는 그 마음을 담아 끄적이는 메모의 힘

유명한 시리즈의 책들이 있다. 전통적인 스테디셀러인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이라거나, 요 근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채사장 작가님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 등, 책 제목도 제목이지만 시리즈 자체에도 힘이 있는 것들이 있다. 내겐 ‘아무튼’ 시리즈가 그러한 대상으로 ‘아무튼’ 뒤에 어떤 단어가 오건 기본적인 믿음이 간다. 김규림 작가님의 ‘아무튼, 문구’나 요조 작가님의 ‘아무튼, 떡볶이’, 김혼비 작가님의 ‘아무튼, 술’에 이르기까지 선택한 책들마다 적지 않은 만족감을 준 덕분이다. ‘아무튼, 메모’가 출간되자마자 주저 없이 고르게 된 건 그래서였던 것 같다.


나는 본래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그건 나도 알고 와이프도 아주 잘 알고 있는 바,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늘 적어두려 하는 건 내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지 오래다. 쉽게 배신하곤 하는 머리를 난 믿지 않는다. 머리 대신 부지런히 끄적여 줄 손을 더 신뢰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수많은 생각과 아이디어, 해야 할 일들을 놓쳐 큰 곤경에 여러 번 이미 곤경에 빠졌으리라. 메모의 힘을 믿는 사람으로 다른 ‘메모인’의 생각과 경험이 궁금했다. 다른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메모를 할지에 대해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정혜윤 작가님은 방송사에 소속된 PD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PD이자 작가라고 함이 맞겠다. 이미 몇 권의 책을 출판했던 그녀는 이번 ‘아무튼, 메모’를 통해 본인의 메모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그때의 노트들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메모들은 지금의 내 삶과 관련이 깊다. 나였던 그 사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심코 한 내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아무튼, 메모>


‘아무튼’ 시리즈의 저자들은 하나같이 허례허식 없는 문체를 구사한다. 권위를 바라지도, 혹은 호소하지도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자신들의 일상을 풀어낼 뿐. 누군가에겐 쉽사리 포기하거나 내려놓기 힘든 ‘권위’가 이들 작가들에게선 왜 그리 손쉬워 보이는지, 나에게 이들은 때론 인간극장 속 등장인물들처럼 평범하지만, 성공시대 속 주인공들처럼 비범해 보이기도 한다. 평범함 속 번뜩이는 비범함이랄까. 이 책의 저자인 정혜윤 작가님 역시 평범한 일상 속 ‘메모’를 재료로 맛깔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메모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에 대해, 또 실제 그녀가 끄적인 기록으로써의 메모 그 자체를 책에 담아냈다.

“혼자서 메모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메모는 재료다. 메모는 준비다. 삶을 위한 예열 과정이다. 언젠가는 그중 가장 좋은 것은 삶으로 부화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메모할지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메모장 안에서 우리는 더 용감해져도 된다는 점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꿈꿔도 좋다.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쓴 것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살지 몰라도 쓴 대로 살 수는 있다. 할 수 있는 한 자신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따라 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있지 않은가. 자신 안에 괜찮은 것이 없다면 외부 세계에서 모셔 오면 된다.” <아무튼, 메모>


나 역시 서두에 밝힌 바대로 그녀와 같은 ‘메모주의자’인지라, 문득 궁금할 때가 있다. 타인의 메모와 그들의 생각에 대해 말이다. 이 책을 통해 그 호기심이 말끔히 해소됨은 물론, 그녀의 언어를 통해 나의 정체성을 다시금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그 마음이 그녀의 글을 통해 속시원히 해소된 듯했다. 그녀의 메모가 삶으로 부화된 것처럼, 나 역시 나의 메모가 삶으로 부화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성심성의껏 메모하겠다, 현실이 될 훗날을 위해 준비하는 심정 고스란히 담아. 언젠가 그 메모들이 나의 현실 속에서 신명 나게 춤추길. 지금 이 마음 역시 메모해 놔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