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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닥다리 에디 Apr 01. 2020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의 소중함

라디오에서 발견하는 일상 속 발견, 그 '지겨움'에 대하여

이 책을 고른 건 내가 좋아하는 선명한 초록색 가득한 표지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덕분이기도 하지만, 책 제목 역시 의아한 마음 가득한 문구였던 이유도 적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이라니. 고급스러운 반어나 역설적인 표현인지, 마치 그 유명한 시 속 구절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과 마찬가지로. 재미난 것만 탐닉해도 부족한 인생 이건만 무엇하러 지겨움을 사랑할까마는.

MBC 라디오 프로듀서로 본인의 커리어 대부분을 채운 장수연 작가님의 책이라고 했다. 번뜩이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이끌어 왔을 그녀의 재능을 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과연 그녀가 이야기하는 지겨움이 무엇일지 호기심이 동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그녀가 말하는 그 지겨움에 대해 나 역시 동의하게 됐다. 실은 나 역시 그 ‘지겨움’을 사랑하고 있는 셈이니, 미처 몰랐던 나의 다른 면모를 일깨워 준 그녀의 글을 나는 ‘지겨움’과 함께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도 될 만큼. 그녀가 갖고 있던 날 것 그대로의 고민과 생각들을 여과 없이(물론 여과가 되었겠지만) 그대로 청취하는 듯했기에 난 그녀의 글에 매료된 게 아닐까.


유추해본 그녀의 나이는 나와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것이다. 30대 중반에 걸친 그녀는 라디오 PD에 입사하기 전 막연한 미래 속 고군분투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한편, 나름의 굴곡을 거쳐 입사한 방송국 그녀의 터전 속에서 느낀 자신만의 철학을 책에 녹여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며 느낀 평범한 일상 속 지루함을 그녀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한결같이 방송을 송출해야 하는 라디오 PD로써 그녀는 하루하루의 소중함과 그것들이 쌓여 만드는 대단함을 책으로 그려냈다.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냥’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위인전이나 동화책 속 교훈, 지금의 역경이 성장을 위한 발판이라는 말은 그냥 그렇게 되는 삶, 인과와 합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삶을 버티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라디오를 진행하며 만난 사람들, 연예인이건 동료 선후배건 그녀는 그녀가 사람들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사람이다. 좋은 어른과 나쁜 어른 사이에 보통 어른이 있는 게 아니라며 애매한 중도를 취하지 않길 바라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또 여전히 뿌리 박혀 있는 ‘장유유서’야 말로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악습이 아니 나며 항변하기도 한다. 나이와 회사를 배제해서도 흔들림 없는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함이 마땅하다며 그녀는 자신만의 ‘어른’을 규정한다. 어찌 보면 지금 우리 사회의 악습이 만들어 낸 혜택을 이제 조금 맛보기 시작할 수 있는 위치임에도 그녀는 마치 여전한 청춘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런 그녀가 내게는 너무나도 근사해 보였음은 물론이다.


인과와 합리로 설명할 수 있는 우리네 인생이 아니라고, 또한 어느 수학책 공식처럼 원인과 결과라는 이분법적인 체계로 그리 쉽게 나누어질 수 있는 삶이 아니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매 순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 결과를 통해 원인을 유추하는 결과론적 사고에 천착하는 것이 아닌, 결과를 통해 '앞으로 내가 다르게 살아야 할'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그것이 나의 앞날에 이롭고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밤을 새워서 수학 공부를 했음에도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았더라면,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 성적표를 받았을 거라는 비생산적 후회에 머무르는 것 대신, 내가 수학을 못 하는 머리를 타고났음을 알려주는 지표로 삼고 다른 과목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할 이유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다. 


결국 그녀가 말하는 지겨움이란 평소 우리가 충실히 쌓아 올려야 할 하루하루에 대해 이야기하는 셈이다. 지겹게 반복되는 하루하루 속에서 생각의 틀을 세우고, 철학의 기틀을 다지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 직업인으로서 그녀는 라디오 PD라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것을 가감 없이 펼쳐 보이고 있다. 이젠 다른 매체들에 가려서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라디오처럼, 우리네 하루하루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냐며, 주변의 작은 것들을 소중히 생각하며 더 잘 탐구하라고 그녀가 내게 말하는 듯했다. 덕분에 나의 하루를 조금 더 세심히 살피고,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더 사랑하고 싶어 졌다. 잘 둘러보면 그것들 나름대로 ‘숨은 재미’들이 있으리라. 모두가 다 발견하는 재미 말고 구석구석 일상 속 소소한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나 또한 찾아보겠다.

여전히 라디오를 사랑하는 이라면, 혹은 반복되는 일상에 무료함 느낀다는 이가 있다면, 그리고 다른 이의 꾸준한 삶과 철학을 통해 나만의 꾸준한 길의 결과를 미리 확인해보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을 난 꼭 권해주고 싶다. 근사한 청년 한 명의 목소리를 청취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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