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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닥다리 에디 Feb 07. 2019

동정 없는 세상

박현욱 장편소설, 그 시절 우리에게 필요했던 그것

단순히 책 제목으로 내용을 판단하려 하다간 나처럼 잘못된 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인류애에 대한 뜨거운 성찰, 혹은 눈물 펑펑 나오는 최루성 멜로를 예상했건만, 보기 좋게 작가의 의도(?)에 말려들었다.


이 책의 '동정'은 측은지심의 동정이 아닌, '이성과 한번도 성교를 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지키고 있는 순결', 이라고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으니,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동정 없는 세상'을 꿈꾸는 고등학생의 일상을 담고 있는 책이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박현욱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 하니 읽을 이유는 충분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탁월하니까 말이다.

공부는 늘 뒷전이면서 여자와 동침을 하는 것이 소원인 준호에겐 두 명의 가족이 있다. 서울대 법학과를 나왔지만 자발적 백수를 면치 못하고 있는 삼촌 명호, 그리고 명호의 누나이자 주인공 준호의 엄마인 미혼모 숙경씨가 그들로, 이처럼 가족 구성원의 스펙 면면을 보면 범상치 않다. 자의던 타의던간에 결여되고 결핍된 무언가를 하나씩 가지고 있지만 이들의 가치관은 어느 누구보다 바르며 온전하며 건강하다. 


이 책은 주인공 준호와 준호의 가족들이 이야기 하는 건강한 성에 대한 담론을 담고 있다. 맞담배를 권하기도 하며 성생활을 권면하기도 하는 삼촌 명호씨도 그렇거니와 평범한(?) 부모들처럼 공부를 강요하며 윽박지르지 않는 엄마 숙경씨까지. 책 간간히 이들이 준호에게 전하는 애정 어린 조언과 이야기들은, 마냥 준호 개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단 책을 읽는 준호 나이의 독자들, 그리고 숙경씨 나이의 엄마들에게 향한 이야기인 듯 느껴진다. 책의 인물들을 빌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들에게 은유적으로 건네고 있다. 어른들이 여전히 쉬쉬하고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 작가는 숙경씨의 입을 빌려 아이들에겐 따뜻한 조언을, 어른들에겐 따끔한 일침을 하려는 듯 하다.


겉으로 보면 왠지 동정이 필요할 것 같은 '미혼모' 타이틀의 숙경씨는, 알고 보면 동정이 필요 없는, 오히려 누구보다도 씩씩한 생활을 하고 있고, 역시나 '백수' 타이틀을 달고 있어 측은지심이 드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 삼촌 명호씨 역시 기실 동정이 필요 없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 나사 빠진 듯 연신 '섹스'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주인공 준호 역시, 치기 어린 호기심에 막상 사창가에 갔더라도 여자친구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알고 보면 순수하고 건강한 청소년이니, 등장 인물들의 스펙과는 다르게 책은 청소년들의 금기시 되는 '성'을 이야기 하되, 한결같이 밝고 경쾌하게 이끌어 간다.


또한 책에서 작가는 흡사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인 것마냥 사실감 있는 고3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애써 끼워 넣으려 해도 머리 속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 학업 대신, 심도 있고 방대한 성지식은 흘깃 보기만 해도 머리 속에 쏙쏙 잘도 들어오던 시절이 아닌가. 누군가는 감추고 은폐하려들거나, 혹여라도 발설이라도 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억압하고 탄압하기 급급했던 것이 이 시대 청소년들의 성이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이 책은 가장 건강한 방식으로 성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자 했다. 구성애씨처럼 목에 핏대 세워가며 건강한 성생활을 설파하지도, 그렇다고 애들은 알 것 없다는 식으로 은폐, 엄폐하려 하지도 않는다. 고3인 준호씨를 전적으로 신뢰하되, 간간히 힘이 되는 숙경씨와 명호씨의 조언을 통해 준호의 건강한 성의식을, 그리고 건강한 가치관을 심어준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까닭 모를 불안감에 쉬이 따라올 수 없는 그 정답에 대해 작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상도를 보여줌으로써 불안감을 해소시키려 하는 듯 보인다. 구속과 통제보다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아이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라는 정답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섹스를 하는 것도 사실은 두렵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물이 되는 그 자체가 두렵다. 스물이 되어봤자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 그냥 이대로, 언제까지나 열아홉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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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없는 세상 中

시중에서 '청소년이 읽어야 할 필독서'라는 타이틀이 달려 있는 책들을 살펴보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왜 필독서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차라리 '대입논술을 위해 청소년이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살짝만 제목을 손보면 나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허나, 글의 주제의식이 무언지, 또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작가가 사용한 방법이나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핀다는 등의 '논술'을 위한 책이 아니라, 요즘 청소년들의 고민에 대해 진정성 듬뿍 담긴 책이 진정한 그들의 필독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책에서 작가 역시 언급하듯 과거 농경사회에선 열다섯, 열여섯이면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 받아 한 가정을 꾸릴 수도 있는 나이였다. 산업의 발달과 함께 사회로의 진출이 늦어져 '성인'의 정의가 (사실 그 경계도 모호하건만) 스무 살 남짓으로 올라간 지금, 우리 세대 역시 과거에 그러했듯 이미 완성된 하드웨어에 아직은 미성숙한 소프트웨어가 장착된, 그래서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는 세대다. 그렇기에, 윽박지르기보단 친절히 설명해 주고, 감추고 숨기기보단 함께 고민해 줄 어른의 존재가, 그리고 바로 이런 책의 존재가 더 필요한 것 아닐까. 


세상에 명호 같은 삼촌이 많았으면 좋겠다. 역시나 숙경씨 같은 엄마가 많은 세상이었으면 한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부모와 어른들의 관심이라는 걸, 그 단순한 진리를 청소년 자녀가 있는 이 땅의 부모들이 알기를 바란다. 그 자그마한 태도의 변화가 바로 이 책으로부터 비롯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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