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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닥다리 에디 Jan 18. 2020

죽음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순간

진정한 끝은 죽음이 아니라 '나다움'을 잃는 그 순간이 아닐는지  

함부로 정의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사랑의 형태와 모양은 말이다. 수천 가지의 모양이, 수만 가지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 다름을 인정한다면 우리네 삶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적어도 나와 다르다며 비난하거나, 정답이 아니라며 참견할 시간과 수고스러움을 절약할 수 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우리네 삶 역시 그 모양을 달리한다. 대가족이 대세였던 시절도 있었다. 이혼이 큰 죄였던 시절도, 결혼을 거부한 독거가 이상한 일로 치부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대수롭지 않은 그런 일들이 말이다. 그래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누군가의 현재가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다. 그래선 안된다. 그래도 되는 사람 있다면 '꼰대'가 분명하다.


생과 사는 결국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이 아닐까. 어디서 왔는지 기억나지 않을 그 시작처럼, 그 끝 역시 우린 모른다. 알 수 없고, 알 길 없다. 더듬어 짐작할 수 있는 건 고통이라고들 한다. 두려움은 그 끝이 고통이라 믿는 상상에 기반한 것 아닐까.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 끝을 우린 알지 못한다. 실체가 없는 두려움, 나는 그것이 우리가 죽음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서론이 다소 추상적일 수 있지만, 결국 이 책을 읽다 보면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들이기도 하다. 사랑과 가족, 그리고 삶과 죽음이 이 책에 등장하는 소재들인 덕분이다. 다소 뻔할 수 있는 이 소재들을 가지고 저자는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한 듯하다. 처음엔 받아들이기 쉽지 않거나 이해하기 어려워도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진심이 차츰 전해진다. 매우 독특한 방식이기에 낯설 수 있지만, 되려 그 방식이기에 되려 매력도 더 진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책은 주인공 빅 엔젤이라는 인물에 대한 대서사시와도 같다. 얇지 않은 책 전반에 걸쳐 그의 인생 전체를 조망한다. 특이한 건 시작부터 차분히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그가 시한부 인생이며 살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전제에서부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치 죽음이 하나의 시작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는 간단하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주인공 빅 엔젤은 곧 있을 자신의 마지막 생일에 파티를 열기로 작정하고 미국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을 불러 모으기로 한다. 그러나 파티를 일주일 남기고 100세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일이 벌어진다. 그의 가족들은 어머니의 장례식과 자신의 생일 파티를 위해 두 번이나 먼 길을 오갈 여력이 없다.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일주일 미뤄 자신의 생일 파티와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동시에 열리는 어머니의 장례식과 자신의 마지막 생일. 몰입하려 해도 이 상황이 상상조차 되지도 않을뿐더러, 이런 기묘한 설정 속 주인공 빅 엔젤이 느낄 감정도 가늠되지 않았다. 게다가 주인공의 삶 자체가 순탄하지 않았던 탓인지 그의 복잡한 가계도만큼이나 그는 내가 이해하기 힘들 만큼의 괴팍한 가장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장례식과 자신의 마지막 생일을 동시에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가 말처럼 어디 그리 쉬운 일일까. 보통 사람의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내가 처음 접한 그는 그런 모습이었다. 책의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괴팍한 대사를 통해 나는 그를 남다른 사람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괴짜가 아닌가.


딸애는 제 엄마 옆을 지나려다 말고 허리를 숙여 빅 엔젤의 와이셔츠 단을 정리해주려 했다. “엉덩이에는 손대지 마라.” 그의 말에 딸이 대답했다. “나도 알거든요. 우리 아빠의 지저분한 엉덩이를 만진다니, 생각만 해도 신나네.” 그들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딸애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대화를 들은 아내는 손으로 머리를 꽉 쥔 채 깔깔 웃었다. -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中


단 한 가지 그가 좋았던 이유는 이렇듯 그가 가진 유머러스함 덕분이었다. 그가 마음에 드는 구석은 그것이 유일했다. 죽음을 앞두고 저런 농담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초연함 역시 그가 남다른 사람이라 가능한 것 아니었을까 하고. 역시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며. 그러나 점차 책을 읽을수록 괴팍함과 유머 뒤에 존재하는 그의 인간성을 마주할 수 있었다. 괴팍함은 자신의 건재함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었고, 유머러스함은 그렇게나마 가족들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이렇듯 책을 읽다 보면 죽음을 마주하는 한 인간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오해를 풀 수밖에 없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건재한 척 해도 그 역시 평범한 범인과 다름없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죽음을 대하는 그만의 방식이랄까. 그는 죽음마저 호기롭게 대면하고자 하는 듯하다. 미국 땅에서 멕시칸으로 살며 선택한 거친 삶의 방편과도 같이 그는 죽음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유쾌하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허공에 손을 저었다. “미안하다.” “그러니까 뭐가요, 아빠?” “다 미안해.” 그는 눈을 뜨고 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네가 아기였을 적에, 내가 널 씻겨주었는데.” 미니는 눈이 따갑지 않은 베이비 샴푸를 짜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네 아버지였어. 그런데 지금은 네 아기가 되었구나.” 빅 엔젤은 훌쩍였다. 물론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고는 손바닥에 샴푸를 짰다. “괜찮아요. 모두 다 괜찮다고요.”

-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中 -


책을 읽고서 느낀 게 있다면 화해와 용서, 관용과 포용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에게나 가능한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놓지 않고선 먼저 손을 내밀 수 없다. 내밀 수 있는 손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라야 비로소 누군가에게 내밀 손이 생기게 된다. 주인공 빅 엔젤이 생일파티에서 이루고자 했던 건, 다름 아닌 가족들에게 내미는 손, 겸연쩍어 보이지만 그 진심을 알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하다. 타인에겐 보이지 않을지라도, 가족이라면 그 손에 담긴 그의 진정을 알아챌 수 있는 듯했다. 가족이라는 관계에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달리 말하면 가족이 아니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함부로 타인을 재단하거나 판단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불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은 후에도 말이다.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 그리고 그것을 감내하는 방편이, 가족과 교감하는 방법은 각자 다를 수 있다. 그것이 단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해선 안된다. 내가 알던 방식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평가해서도 안된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에 대한 어둡고 슬픈, 그리고 음습한 이미지. 이것 역시 실제 내가 마주했을 때 내 예상과는 다른 모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난 순간을 기념하는 생일잔치처럼, 그 끝 역시 누군가에겐 잔치가 될 수도 있겠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던 주인공 빅 엔젤의 말처럼 말이다.


죽음을 대하는 그만의 방식이 난 부러웠다, 소설 속 주인공일지라도. 누군가는 작정하고 눈물 흘리게 할 '죽음'이라는 소재를 저자는 주인공 빅 엔젤의 캐릭터를 통해 자신만의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죽음을 앞두고 누구나 오열해야 하는 건 아니구나. 그저 차분히 나의 과거와 지난날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 최대한 나답게, 유쾌하게 그리고 즐겁게.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혹은 상상해왔듯 그리 어두운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나의 현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 아등바등, 혹은 더 많이 움켜쥐기 위해 젊은 날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대신, 그 끝에 가서도 여전히 즐거울 수 있도록, 나다움을 지켜낼 수 있도록 나의 현재를 채워나가는 게 어떠할까. 아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던 빅 엔젤의 대사가, 내게는 마치 저자가 우리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처럼 들렸다.


내게도 죽음은 끝이 아니길 바란다. 그 끝에 다다랐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실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을뿐더러 넘어야 할 관문도 많을 테지만, 독서를 통한 이런 사소한 고민들이 충실히 쌓인다면 어느샌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충분한 디딤돌이 이미 내 앞에 쌓여 있을 거라는 건, 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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