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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ewha Nov 16. 2019

2019 아티스트 웨이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기를... Y 씨 응원합니다.

Y는 산에 올랐다. 뱃속부터 가슴 끝까지 찬 공기를 채웠다.

‘신선한 공기, 역시 나오길 잘했군!’이라고 생각한다.

야트막한 산이라 적당히 이마에 땀이 맺히고 몸에 온기가 도니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고 힘차다. 봄의 산은 벚꽃으로 하얗게 뒤덮였다. 새순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꽃나무들도 초록 기운이 제대로 돌아 힘차 보인다. 하늘도 푸르고 공기도 쾌청하니 등산객이 제법 있다. 새들이며 고양이들도 마중 나와 응원하듯 오늘따라 다정하다.  


"안녕!"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눈인사를 건넨다.




Y가 산에 오른 이유는 책에 나온 ‘아티스트 데이트’를 실천하기 위해서다.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읽고 내면의 창조적 자아를 깨우기 위한 과제들을 풀고 있다. 이제 겨우 절반, 마의 8주를 넘기기 힘들다. 제8장까지 오는 이 험난한 길을 벌써 두 번째 맞이하고 있다. 책 한 권을 떼는 일이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16주 프로그램 한 권을 완벽하게 끝내고 나면 이제는 어엿한 아티스트라는 이름표를 스스로에게 붙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책의 지령에 따르면 일주일에 한 번 ‘아티스트 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내면에 잠자고 있는 창조적 자아를 깨워 둘만의 시간을 갖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한다. 지령을 실천하기 위해 Y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어린아이 같은 내면의 창조적 자아와 둘만의 데이트라고 해놓고 정작 외부의 눈을 의식하고 있다. 새로 산 스니커즈의 끈을 고쳐 메어 놓는 일, 따뜻한 커피를 보온병에 담는 일, 접힌 바지를 탁탁 털어 침대 위에 펼쳐놓고 어울리는 옷을 꺼내 매치시켜 놓는 일 등이 집을 나서기 전에 했던 일이다. 재작년 백화점 세일 기간에 싼 값에 손에 넣게 된 E사의 선글라스도 잊지 않고 챙기게 되어 뿌듯하다. 이럴 때 쓰라고 산 게 아닌가. 평소에는 피우지 않는 담배도 남동생 방에서 몰래 꺼내 가방에 넣었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커피와 함께 태우면 왠지 근사해 보일 것 같아서다.


커피와 담배, Y는 뜻한 바가 있으니 지체 없이 등산로를 벗어났다. 도로변 간이 쉼터에서 낡은 초록색 의자를 찾아 앉았다. 노트를 꺼내 지금 느낌을 써내려 간다. ‘내면의 창조적 자아를 만나기 위해 산에 왔다. 사실 내가 뭐 하고 있는지 나도 참 궁금하다...’ 별 의미도 재미도 없지만 솔직한 것은 중요하니까. 여전히 밖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자각하고 재빨리 노트를 덮는다. 담아온 커피를 뚜껑에 조심스럽게 따른다. 입안에 커피 향이 진하게 퍼지자 만족스러운 기분이 된다.


종교의식을 치르듯 담배를 조심히 꺼내 물었다. ‘책을 읽으며 담배를 피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 겠구나.’  무릎에 놓인 책과 노트가 신경 쓰인다. 불을 붙이려는 찰나 빨간 점퍼를 입은 중년의 등산객이 누가 봐도 제 것이 아닐 것 같은 담배를 어설프게 꺼내 문 젊은이의 흡연 행각을 흥미로워하며 지나간다. 입에 물었던 담배를 담배 갑에 도로 집어넣었다. ‘가족단위로 꽃구경을 오는 관광지에서 담배연기는 환영받기 힘들다...’라는 타당한 이유.


Y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주택가 막다른 골목 끝 집 계단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담배부터 꺼낸다. 채 이마에 땀이 식기도 전에 자리에서 엉덩이를 뗐다. 드르륵 어느 집 창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모든 감각이 활짝 열리고 예민해진다. 여기도 의식을 치르기에 좋은 장소는 아닌 것 같다.


공중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안전하게 큰 건물 흡연실을 찾아 피우고 갈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창조적 자아를 만나러 고뇌의 연기를 뿜어내기로 해놓고는 인공의 울타리 속에 숨어 피우는 맛이 좋을 리 없다는 결론이다. 게다가 담배 고수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될 수는 없다. 행여나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둘러댈 말도 마땅치 않다. 오히려 여행을 끝내고 정리하는 기분으로 조용히 혼자 피우는 것이 낫겠다는 심산이다.


사람들이 없는 대신 차들만 열정적으로 달리는 8차선 대로변에 서서 Y는 이마에 11자 주름을 잡으며 갈등한다. ‘이건 원 정말 무드 없군.’ 매캐한 자동차 매연이 담배 대신이다. 눈도 귀도 코도 저마다 곤두서서 생각을 방해했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뛰다시피 하여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호들갑스럽게 신을 벗고 성큼성큼 남동생 방으로 향한다. 누가 채근하며 따라붙기라도 하듯 서둘러 들어가 문을 꼭 걸어 잠그고는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찾아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뭔가 중요한 게 빠졌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창문을 열고 뒤꿈치를 들고 최대한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숙하게 연기를 빨아들인다.


옆집과 벽간 거리가 좁지만 위를 올려다보면 기다랗게 하늘이 보인다. 연기가 새처럼 하늘을 찾아 떠났다. 커피는 이미 미지근해졌다. 거울을 보니 연기 뿜는 품새는 제법 그럴듯하다. ‘후~ 만족스러운 아티스트 데이트였어!’ 쓴 연기와 함께 읊조려 보지만 정작 동의할 수는 없다. 두루마리 휴지 한 칸을 뜯어 담배꽁초를 꼭 감싸서 변기에 흘려버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자기 방으로 돌아와 노트를 폈다.


‘아무래도 제1장부터 다시 시작해야겠군.’

내면의 창조적 자아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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