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3층 출국장에서 출국심사업무를 맡았다.
일, 집, 일, 집 반복에다가 업무마저 반복되고 책을 읽는 횟수도 줄어들다 보니까, 내가 느끼고 전달하려는 바를 명확한 언어와 문장으로 짚어내 가는 것이, 어쩐지 안갯속을 걷는 것 마냥 희끄무레하기만 하다.
내가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지 말 그대로 한 치 앞을 모르겠는, 무력하고, 무기력하며 태만한 기분이다.
그래서 그런 것에 구애받지 말고 이젠 그냥 써보기로 했다.
어젠 3층 출국장에서 출국심사를 했다.
참, 나도 심사관으로서 일하고 있다지만, 사실 영어, 그리고 간단한 일본어 정도 밖에는 가능한 언어가 없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리를 난감하게 하는 외국인들은 영어와 일본어 사용자들이 아니다.
베트남, 태국, 러시아어권 국가들이 보통 우리와 소통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단연, 베트남인들 중에 가족동반 자격으로 온 F-1 비자 소지자들이다. 이들은 보통 국민의 배우자 비자인 F-6을 소지한 베트남인 자녀의 육아를 도와주기 위한 목적으로 입국하는 고령의 베트남인들인데, 거의 대부분이 입국할 때도 한국어를 전혀 못하고 마침내 비자가 만기 되어 출국할 때도 한국어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입국할 때야 뭐, 사실 비자가 있으니까 본인 확인만 되면 문제 될 것이 없다지만, 출국할 때에는 비자 만료기간을 확인한 후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완전출국하는 것인지, 재입국 의사가 있는지를 명확히 한 후 만약 완전출국하는 것이라면 그의 외국인등록증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베트남행 비행기의 체크인 시간이 되어 보안검색대를 거친 베트남인들이 심사대 앞으로 줄을 서게 되면 심사시간은 다소간에 늘어나기 마련이다. 어제도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
어느 정말 왜소한 체격의 할머니가 심사부스로 들어왔다. F-1 비자를 소지한 고령의 노인분들은 보통 문제가 생기진 않을는지 하는 걱정 어린 눈으로 심사관을 바라보며 들어오곤 한다. 나는 그의 여권을 받고 스캔했다. 역시나 F-1 소지자, 그리고 비자 만료기간이 3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아, 재입국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
"한국 이제 다시 오세요?"
"(손사래를 치며) 몰라~"
"베트남 가면~ 언제 다시 와요~? 다시 올 거예요?"
"(멋쩍게 웃으며) 몰라~"
보통 이렇게 의사소통이 아예 불가능하게 되면 재심으로 인계해 의사 확인을 진행한다. 그런데 그때 바로 뒤에 서 있던 젊은 베트남인 남자가 나의 질문을 알아듣고는 할머니에게 통역을 해주기 시작했다.
"(베트남어..)"
"한국 다시 올 건지 물어봐주세요~"
"한국 이제 안 온대요~"
"그러면 외국인 등록증 제가 회수한다고 말 좀 해주세요~"
"(베트남어...)"
젊은 베트남인 남자 덕분에 할머니의 출국심사를 비교적 손쉽게 마친 나는 내심 그 청년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국적을 불문하고 D-4 등 유학 비자로 들어와 학기를 마치고 출국하는 유학생들도 한국어 소통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인데, 혹시 그동안 한국어를 열심히 한 유학생인 것일까 하는 기대를 가진 것이다. 할머니의 출국심사가 끝나고, 그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뒤, "한국어를 잘하시나 봐요." 라며 칭찬의 말도 덧붙였다. 그는 "하하 아니에요 못해요.." 라며 쑥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그의 겸손에 나 역시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뿌듯한 마음으로 그의 여권을 스캔.
아뿔싸
빨간 글씨로 선명히 모니터에 뜬 출국명령
'그래.. 불법체류했나 보지.... 뭐 강제퇴거 대상자, 출국명령 대상자를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고.'라고 속으로 중얼대며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을 어느 정도 다스려보았다. 그에게 출입국관리소에서 받은 출국명령서를 제출할 것을 안내했다. 그는 역시나 능숙히 내 말을 잘 알아들었고 소지하고 있던 출국명령서를 건네주었다. 확인해보니 출국명령을 받은 자가 거쳐야 할 출국 전 적법 여부에 대한 절차가 확인되었고 이제는 그의 출국심사를 마무리하면 된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확인한 그의 입국 날짜가 나를 기함에 빠뜨렸다. 2009년. 그는 무려 2009년에 단기비자로 입국해서, 2022년까지 불법으로 체류했다.
'휴.... 그러니까 그렇게 한국어를 잘하지.....'
나는 경계에서 일한다.
입국장에서 일할 때는 나를 거쳐 가면 비로소 한국에 온 것이고,
출국장에서 일할 때는 나를 거쳐 가면 이젠 더 이상 한국이 아닌 무국적의 공간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니 국적과 무국적의 경계에서 일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내가 일하는 이 경계의 공간에서는 정말 재밌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장기비자를 받아왔지만 몇 개월의 체류 끝에 한국어를 "몰라" 밖에 습득하지 못한 할머니와,
단기비자로 십몇년을 체류하다가 출국명령까지 받고서야 그의 국가로 돌아가는, 너무도 능숙한 한국어로 "수고하세요~" 하고 나를 떠나가는 그 청년. 그 둘의 간극이 경계 공간에서 확인된다는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계, 합법과 불법의 경계 등이 심사대에 앉은 심사관을 거쳐갈 때 확정된다는 그 사실이, 경계에 선 노동자에 내재된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