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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0m, 산소호흡기 달고 오른 봄의 설산

22. 꽃 피는 봄, 눈 쌓인 중국 리장 옥룡설산에 오르다

by 리우화


오늘,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요즘 제 여행기를 중국 키워드로 접하시는 분들이 부쩍 늘었어요. 올해 1년 무비자 정책으로 중국 여행객이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신기할 따름이에요.


처음 여행기를 쓰게 된 계기는 단순했어요. 중국엔 베이징, 상해 말고도 수많은 도시들이. 마라탕, 짜장면 말고도 매력적인 음식들이 많다는 걸. 제가 먼저 사랑하게 된 것들을 천천히 소개해드리고 싶었어요.


최근 블로그로 이런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어요. ‘한 번도 안 가본 중국을 처음으로 가고 싶어 졌다’, ‘중국에 대한 인식이 점점 달라지고 있다’, ‘중국에 오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제 글이 한 나라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단 생각에, 살짝 설레어요.


이번 중국 여행을 다니면서 현지 친구들에게 자주 들은 질문이 있어요. “외국에선 우리나라를 어떻게 봐?” 매번 대답을 머뭇거린 순간들.


어딜 가든 시끄럽고, 신발 빼고 다 튀겨먹고, 비위생적인 민족. 하루가 멀다 하고 기성 언론에서 쏟아내는 혐오 뉴스, 유튜브에선 조롱거리로 전락한 중국의 문화들.


감히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어떤 나라든 낮과 밤을 모두 갖고 있음을. 시선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분명, 더 다양한 세계를 눈에 담고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오늘은 중국 윈난 리장에서의 마지막 이야기이자

리장에서 가장 높은 설산, 옥룡설산입니다.



1. 그 깊은 수영장 끝에서


스물한 살, 처음 프리다이빙을 배우던 날.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컴컴했던 대형 풀장.

차마 내려갈 자신이 없어 5m 구간에서 못 참고 헐떡이며 위로 올라왔다.


다른 수업 동기들은 하나 둘 풀장 바닥을 찍고 올라오는 사이

나 혼자 수영장 구석에 동그랗게 앉아 롱핀만 만지작 거릴 무렵.

다이빙 강사가 슬그머니 옆에 다가와 말했다.


무섭죠? 원래 도전이란 게 그래요. 쉬운 게 없어요.

근데 두려움을 한 번씩 이기다보면요. 용기가 생기고요.

언젠가 저 바다 끝에서 고래와 함께 헤엄치는 날이 와요.“


강사의 말에 다시 롱핀을 두 발에 꼈다.

심호흡 한 번, 두 번, 세 번. 훅- 아래로, 아래로.

허파에 채웠던 공기가 쪼그라들고

차가운 물이 맨 살결에 닿자 흡, 숨이 막혔다.

그래도 한 번만 더, 가짜 두려움을 이기고.


,

손 끝에 차디 찬 바닥의 온도가 느껴졌다.


2. 하늘 가장 가까운 산, 옥룡설산


중국 여행을 계획하면서 끝내 망설였던 일정 하나.

바로 해발 4680m에 이르는 옥룡설산(玉龙雪山) 트레킹.


옥룡설산


호기롭게 한국에서 고산병 약도 사고, 산소통도 두 통이나 쟁였건만.

옥룡설산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쿵쾅대는 심장을 꽉 부여잡았다.


모든 사계절이 스쳐도

머리끝에 결코 녹지 않은 흰 눈이 서려 있는, 옥룡설산.

전설에 따르면 선한 흰 용이 검은 용과 싸워 이긴 뒤

리장을 지키기 위해 산 능선이 됐다고 한다.


리장 소수민족 나시족(纳西族)은 이곳을 숭배의 거처로 여겨

지금도 산에 함부로 다가가지 않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전날 밤, 숙소 주인이 초등생 아들의 점퍼를 빌려주며 말했다.

"워낙 고도가 높아서 숨이 잘 안 쉬어질 수 있어요.

그래도 이왕 리장에 왔으니 씩씩하게 다녀와요.

분명 잊지 못할 봄을 보낼 테니."


산소통, 하나에 10~20위안이며 보통 2~3통을 챙겨간다.


하지만… 여기가 정말 살아서 오를 수 있는 곳일까?


케이블카에 타자마자 심장이 잠영할 때처럼 갑갑하게 조여왔다.

산소호흡기를 들이켜도 온몸이 물 먹은 스펀지처럼 먹먹해졌다.

부작용이 걱정돼 먹지 않으려던 고산병 약도 급하게 입에 털어 넣었다.


순간, 마음 깊은 곳 꾹꾹 눌러 왔던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 쥐었다.

'야, 너 여기 못 올라. 고산병 걸릴지도 모르잖아.

큰 일나면 누구 탓할래? 왜 늘 바보처럼 위험을 감수하려 해?'

내 안의 누군가가 귓가에 조용한 공포를 속삭였다.





케이블카는 글레이셔파크를 향해 가파르게 고도를 높였다.

급격히 낮아진 온도로 창가에 찬 이슬이 방울방울 맺혔다.


소매로 닦아낸 유리 너머로

4월 봄의 파릇함은 사라지고 온통 하얀 겨울 왕국이 펼쳐져 있었다.

이 높은 곳에도 생명은 살아 숨 쉬고 있어

고산지대 식물인 설산풀, 설산앵초, 용담화가 바람결에 잎을 흔들었다.


하차역에 다다를 동안 케이블카 안은 말 대신,

산소호흡기를 들이켜는 쉿- 쉬잇- 소리로 가득했다.

내 앞에 앉은 고령의 중국인은 케이블카를 탈 때부터

호흡기를 입에 딱 부착한 채 밭은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파랗게 겁에 질린 나도 잔뜩 경직된 채 앉아있었다.

옥룡설산의 찌릿한 냉기가 심장을 꽉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고산 증상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누군 아무런 영향도 없다던데,

나는 긴장감으로 없던 증상까지 마구잡이 생산 중이었다.


'겁쟁아,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게?

또, 과거의 너처럼 포기할 거야?'

다이빙하기 직전처럼 눈을 가만히 감고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그날 풀장 밖으로 나가버렸다면

나는 평생 그 푸른 바닷속 물고기 떼를 몰랐을 것이다.

나는 롱핀을 신던 손처럼 산소호흡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3. 사계절이 스쳐 지나가는, 글레이셔파크


“와.”



케이블카 문을 열자마자 양 볼을 스치는 싸락눈.

스키장에 막 도착했을 때처럼 붕 뜨듯 서늘한 겨울 공기.

흰 용의 비닐처럼 투명하고 눈부시게 희던, 글레이셔파크.



4월 봄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빛보다 더 새하얀 눈이 뒤 덮인 설산이 그곳에 있었다.


나시족이 평생을 선산이라 여겨왔던 것처럼

신성한 위엄이 부드럽게 온 몸을 감싸 안았다.

바위 능선들은 웅장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고

눈송이는 눈바람을 일으키며 능선 사이를 흩날렸다.


중국의 옥룡설산은 오래된 토속 신화 같은 곳이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그림 엽서 속을 걷는 듯했다.


강렬한 햇살은 눈 위에서 눈부시게 부서지고

찬 공기 속에선 숨소리가 하얀 연기로 피어올랐다.

이토록 아름다운 겨울을 꽃 피는 봄에 만나다니.


감탄하다 놓아버린 정신줄을 되잡고

천천히 산소호흡기를 마시며 전망대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옥룡설산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전쟁 후 피난길 같다.

높은 고도에 누군가는 쓰러지듯 벤치에 누워 있고

또 누군가는 두통을 앓으며 산소호흡기에 걸음을 의지했다.


이토록 고된 길을 여기 모두 무엇 때문에 오르고 있는 걸까.

문득 옥룡설산까지 가던 길 위에서 택시기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옥룡설산은요, 혼자 오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그곳에 서면. 그냥 아름답다는 감상보단

자연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진 나를 되돌아보거든요. "


대자연이 주는 묵직하고 장엄한 침묵 속에서

그간의 걱정과 두려움은 바람결에 조용히 흩어지고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마냥 흘려보낼 감정들이

고요한 흰 풍경 아래에서 조용히 되새겨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설산에 오르고 있는 걸까.

직장도, 사랑하는 이들의 곁도 떠나

이 낯선 땅 낯선 곳을 어째서 이토록 오래 헤매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차올랐다가, 녹아내렸다.


프리다이빙을 하던 2년 전 여름,

혼자 강릉의 깊은 바닷속까지 내려갔던 어느 날.

어떠한 소리도 보이지 않던 고요한 진공 속에서,

난생처음 사회적 가면을 완전히 벗어버린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하늘과 가장 가까운 이 높은 산 위에서,

다시금 가면을 벗은 본연의 나를 마주했다.


4월의 설산, 옥룡설산 정상에서
오늘, 6월의 더운 여름에 지쳐계실 작가님들께 옥룡설산의 눈을 선물합니다 : )


4. 一路顺风!


옥룡설산에서 하산한 뒤 땀을 뻘뻘 흘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여행지인 샹그릴라로 가는 밤 열차 시간이 코 앞이라

숙소 주인 내외, 그리고 다른 숙박객들과 함께 저녁을 먹게 됐다.

둥근 식탁 위엔 금방 만든 만두, 고기볶음이 김을 뿜고 있었다.



취기가 오른 주인아저씨는 한 손엔 담배를 들고,

와하하— 하고 옆에 앉은 숙박객과 맞술을 기울이고 있었고

각자 다른 지역에서 온 숙박객들은 여행 에피소드들을 두런두런 나누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 같은 따뜻함.

유일한 외국인인 내게 숙박객들은 호기심 가득한 질문을 쏟아냈다.


“한국인들은 장가계를 많이 가지? 아바타 촬영지잖아. “

“한국인들은 어쩜 피부가 이렇게 좋아? 화장품 어떤 거 써?”

“혼자 여행 다니면 안 무서워?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어?”


나는 밥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없이 답을 해줬고

내 옆에 앉은 대만 아저씨는 내가 중국어를 놓칠 때마다 다정하게 영어로 다시 번역해 주었다.


리장역으로 떠나는 택시가 숙소 앞에 도착하고

나는 한국식으로 허리를 숙여 모두에게 인사했다.


“一路顺风!(yílù shùnfēng!)”
너의 여행이 늘 순조롭길!


모두가 한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했던 그 순간을,

나는 내 여행에서 가장 따스한 온기로 간직했다.



리우화의 여행지도



[블루문밸리(蓝月谷, Blue Moon Valley)]


리장 옥룡설산 동쪽, 해발 2900m 지점에 자리한 블루문밸리. 빙하 녹은 물이 만들어내는 맑고 투명한 호수가 아름다우며 날씨와 각도에 따라 푸른 달처럼 빛나는 신비한 호수 색을 볼 수 있습니다. 호수 구간별로 옥 같은 호수/푸른 달 호수/거울 연못/파도 호수로 나뉩니다.


나시족 전설에 따르면 겨울에 사랑을 증명하려 호수에 맨 발로 들어가는 전통이 있다고 하네요. 옥룡설산 전체 입장권(100위안)에 포함돼 있으며 여행시간은 1~2시간 소요됩니다. 고원지대 자외선이 매우 세므로 모자는 필수입니다.



[인상리장(印象丽江, Impression Lijiang)]


유명 영화감독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야외 공연. 해발 약 3100m의 블루문밸리 극장에서 옥룡설산을 무대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전통 차마고도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시족, 백족, 이족 등 10개 이상의 소수민족이 출연합니다.


출연자는 실제 배우가 아닌 리장 인근 마을에서 선발된 토착 주민이 무대 위에 오릅니다. 공연 시간은 약 1시간, 표 가격은 3만 원대입니다.


영어 자막이 제공되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도 춤만 구경해도 충분합니다. 고원지대의 지붕 없는 공연장이니 모자, 선글라스는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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