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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은 수호자, 이제 네 거야

21. 지나간 사람들과, 지나가지 않은 감정에 대하여-리장 호도협(4)

by 리우화
1. ‘철없는 딸’이란 말 앞에서


바늘구멍처럼 들어간 언론사를 그만두고

중국으로 떠나겠다고 선언한 저녁 식사 자리.


"철이 없구나, 아직도."

실망이 번지던 아빠의 눈빛.


여행을 떠나는 전날까지

우린 꼭 필요한 말 몇 마디 외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철없는 딸’이란 말 앞에서 내 여행은 점점 작아졌다.


마지막 짐을 정리하던 출국 당일 아침.

말없이 방 문을 연 아빠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보송보송한 초록 솜털이 달린, 작은 공룡 인형이었다.


"이번에 호주 출장 갔다가 사 온 거야.

이 공룡 눈 있지? CCTV가 돼서 널 지켜줄 거야.

뭔 일 생기면 아빠가 바로 날아갈 테니까."


작은 눈, 작은 키. 아빠를 닮았던 내 공룡 친구.


여행하던 내내 어색한 목소리로 안부를 묻던 아빠.

나는 내 영원한 수호자가 건넨 작은 공룡을

가방 앞 면에 꼭 달고 다녔다.


2. 호도협, 마지막 날까지 만만치 않구나



다시 호도협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

살갗을 파고드는 찬 기운에 몸을 웅크리며 기상했다.


아침은 따뜻한 토마토계란국수.

중국생활도 일주일이 넘어가니

국물에 웬 토마토가 들어가도

훌쩍훌쩍 잘도 떠먹는 나다.


차마 객잔을 떠나 트레킹의 마지막 정착지

‘장선생 객잔’(张老师客栈)까지 가는 길은

여간 고단한 게 아니다.

한눈팔다간 호도협이 아닌 저세상 협곡행이다.


아무리봐도 사람이 걷는 길이 아닌 것 같아 당황하며 찍은 사진.
“想您的风吹到虎跳峡,当心宏顺您的宝贝作纪念” 당신의 바람이 호도협까지 닿기를. 조심해, 그 바람이 당신의 소중한 보물을 훔쳐가버릴 수 있으니.
고개를 올리면 천국, 내리면 지옥. 여기, 너무 무서웠다!


발아랜 울퉁불퉁 돌무더기, 두 발이 겨우 서는 좁은 길.

길이 아니라 절벽 사이 누군가 대충 그려놓은 실선 같았다.


거기에 호랑이 울음처럼 으르렁대는 산바람까지.

관광객들 사이에선 간헐적 비명이 터져 나왔다.


3. 내 첫 중국인 여동생, 씬이


지하오의 여동생 씬이는

150cm를 간신히 넘는 왜소한 한국 언니를 챙기느라

자기 지팡이까지 내어 주며 한 걸음 한 걸음 곁을 지켰다.


초겨울처럼 쌀쌀한 날씨에 꽁꽁 언 내 손을 꼭 감싸 쥐었고

때 아닌 폭포에 옷이 흠뻑 젖은 나를 망설임 없이 안아주었다.


마냥 사랑스러웠던 나의 첫 중국 여동생


"나는 언니가 진짜 좋아. 너무 귀엽고 따뜻해.

나 싱가포르로 돌아가도, 언니는 꼭 나 보러 여행 와야 해!"


싱가포르 대학에서 간호학을 공부하는

맑고 순수한 웃음을 지닌 스무 살 친구, 씬이.


내가 중국어로 소통이 막힐 때마다

그 애는 유창한 영어로 재번역해주며 대화의 다리를 놓았다.


함께한 시간은 겨우 하루였지만

험한 호도협을 발맞춰 걸으며

친자매처럼 가까워진 우리.


그 애가 아니었더라면,

이 호도협에서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공기 속을 맴돌다 흩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장선생 객잔에 도착했음을 알리듯

산길 너머로 수많은 객잔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객들은 이곳에서 다빠(大巴,대형 버스)나

택시를 타고 처음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주촨은 중국 대표 길거리 간식으로 돼지의 잡육, 내장이 합쳐진 꼬치다


다 같이 마지막 힘을 끌어 내

장선생 객잔 아래 마지막 여행지 *관음폭포까지 다녀온 뒤

불판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던 주촨(猪串,돼지꼬치)을

하나씩 사서 털썩 앉았다. 역시, 고생 끝에 먹는 한 입이 최고다.


우리의 다음 여행지는, 모두 달랐다.

나는 리장에서 옥룡설산을 간 뒤 샹그릴라(香格里拉)로,

지하오 씬이 남매는 다리(大理)로,

직장인인 쑤이는 출근을 위해 고향인 후난성으로.


운 좋게도 지하오와 씬이 남매가 리장에서 머무는 숙소는

내가 머물던 숙소와 도보 몇 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우린 호도협에서 하산 후 리장 시내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다.


쑤이가 두 팔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来嘛,最后抱一下!“

그럼, 마지막 포옹이야!


호도협 초입에서 우연히 만나 모든 등산을 함께한 그녀.

지칠 때마다 “走吧!(가자!)”를 외치며 업어가다싶이 나의 완주를 도왔던.

셀카를 좋아하고 <폭싹 속앗수다>에 폭 빠져있던 귀여운 사람.


"네가 한국인이었다면 우린 진짜 단짝이 됐을 텐데, 그치?"


마지막으로 그녀와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또 언제 어디선가 한국 드라마를 눈물 훔치며 시청할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의 호도협을 기억해


4. 청년 공산당원과의 식사


지하오 남매가 데려간 리장 중심가의 윈난 가정식 식당.


라즈지, 생선요리, 마파두부, 토마토계란탕까지.

혼자선 양이 많아 결코 시켜 먹지 못했던 음식들의 향연.


며칠째 미씨엔과 옥수수빵으로 끼니를 때우던 내겐

그야말로 ’명절상‘같았다.

(내 글, 아빠도 보는데. 나 이렇게 여행했다!)


지하오는 일회용으로 나 온 접시를 물에 씻는 법을 알려줬다.

중국은 일회용으로 비닐 포장돼서 나와도 위생이 좋지 않아

보통은 컵과 접시를 같이 나온 생수로 한 번 더 헹궈 먹는다.



우린 식사를 하며 호도협에서 미처 못 나눈

중국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을 수 있었다.


태생이 기자인 나는 결국 또 취재 수첩을 꺼내 들었다.

직업병 같은 기록 습관은 여행 와서도 어김없다.


이를 테면

-중국 해변가 근처에 사는 젊은 이들은 전통차보다 커피를 더 즐긴다던가

-각 지역마다 콜라 생산 원료가 달라서 맛도 제각각이란 이야기.

-또 중국 남자들은 꾸미면 여자애 같다고 생각해 패션 감각이 덜 발달했지만,

오히려 한국 남자들의 스타일은 요즘 중국 내에서도 유행 돌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이야기하다가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

지하오, 알고 보니 청년 공산당원이었다.


살면서 공산당원과 등산하고 밥 먹고

같은 숙소에서 코까지 골며 잤다니!

이거, 생각해 보면 꽤 역사적인(?)경험 아닌가?


이 참에 중국 정치나 무역 현황에 대해

모르는 건 꼬치꼬치 물어봤다.


"근데 나는 너희 공산주의가 정말 이해가 안 가."

"그럼, 너네 민주주의는 완벽한 줄 알아?"


결국 대화는 '민주주의가 낫냐, 공산주의가 낫냐'

마치 국제정세를 논하는 두 정상처럼

진지한 척 깊고도 유쾌한 토론으로 흘러갔다.


결론은? 언니 오빠들의 알맹이 없는 대화에

'그만——!'을 외친 씬이의 절규로 종료.


5. 잘 가, 나의 호도협 자매 씬이


근처 야시장을 구경하고

과일을 나눠 먹으며 걷다가


이제 씬이와는 진짜 이별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순간, 호도협에서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씬이, 네 가방을 내게 줄래?”


내가 씬이의 붉은 가방을 가리키자

씬이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채

자신의 가방을 건네줬다.


나는

나의 작은 수호자, 공룡 인형을

그 아이의 가방에 달아주었다.


“这个会保护你的.”
이게, 널 지켜줄 거야.


아빠는 알고 있었을까. 엄마를 닮아 유독 정이 많은 내가, 이 인형을 또 다른 소중한 사람에게 주리란 걸.


그 아인 곧 싱가포르라는 낯선 땅으로 떠난다.

호도협의 험한 길을 함께 걸으며 나의 곁을 지켜줬던 아이.

이젠 내가 나의 수호자를, 그 애에게 건넬 차례였다.


씬이는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채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도 눈가가 뜨거워짐을 느끼며 그 애를 안았다.


여행에서 만나는 인연은 언제나 선물처럼 찾아오지만,

결국 기약 없는 이별처럼 흩어질 수밖에 없음을.


그럼에도 여행에서 언제나 새로운 인연을 기다리는 건

그날 그 순간 마음에 스며든 감정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여운으로 남기 때문일까.


호도협에서 꼭 주워야 한다는 행운의 돌. 이 돌 덕분일까, 여행하는 내내 행운이 가득했다.


ps.

재밌는 얘기지만— 눈물의 작별을 한 그날 저녁.

이 남매하고 다시 상봉했다.


나랑 노느라 다리로 가는 밤 기차 시간을 놓쳐

내가 머무는 숙소로 한 박 더 머물러 온 것.


덕분에 씬이랑은 같은 방으로 배정돼

한 번 더 운명의 룸메이트가 됐고

그 아인 내게 엄마가 만들었다던

귀여운 핑크 잠옷 하나를 줬다.


나, 내년 서른인데. ‘언니는 귀여우니 괜찮다’는

씬이의 말에 지금 이 글을 쓰는 서울 자취방에서도

그 잠옷을 입고 있다. 그날을 떠올리며, 시원하게.


ps2.

씬이랑은 지금도 열심히 현대판 펜팔 중이다




리우화의 중국 여행지도


[관음폭포]

장선생 객잔 아래로는 가파른 협곡 사이로 요동치는

거대한 푸른 폭포, 관음폭포(观音瀑布)가 있다.



수려한 절경에 너도나도 인생샷을 남기려 내려갔다가

180도로 꺾인 오르내리막에 호되게 고생하고 돌아오는 곳이다.

왕복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그래도 충분히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 여행지이기에

장선생 객잔에서 기회가 된다면 꼭 들려보시길.

다만 모두 바위로만 이뤄져 있어 안전장치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거동이 불편하거나 어린아이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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