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별이 떨어진 밤 아래, 제안을 받다-리장 호도협(3)
1. 계획을 바꾼 인연
나는 태생이 J형이다.
계획이 틀어지길 싫어하고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게 익숙한 사람.
그래서 혼자 차마 객잔에서 1박을 하려던 계획을
단 5분 만에 접은 건 엄연히 이 친구들 때문이었다.
지하오는 자신이 예약한 숙소에 전화해
외국인이 머물러도 되냐고 물었고
씬이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언니, 우리 같이 한 방 쓰자. 완전 재밌을 거야!”
20살, 21살.
이 어린 친구들이 나를 위해 애써주는데 거절할 수가!
그리고 이 인연이 그냥 우연한 인연이 아니라는
내 안의 직감이 ‘이들을 놓치지 말라’며 등을 떠밀었다.
직장 동료라던 세 명의 친구들은 차마 객잔에서 작별을 했다.
그리하여 쑤이, 지하오와 그의 여동생 씬이.
이 세 명의 친구들과 중도 객잔으로 발걸음을 띄었다.
2. 차마에서 웃고 걷다
발밑에서 허망하게 쑥 빠져버리는 징검돌처럼
누구도 못 믿을 세상에서 자연만큼은 한결같았다
-델리아 오언스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메에-
수많은 산양이 강아지처럼 관광객 뒤를 촐랑촐랑 따라다닌다.
푸른 눈의 외국인이 캔디를 주자 좋다며 와작와작 잘도 먹는다.
땅 위에 널려 있는 닭들도 길고양이 보듯 관광객들을 흘깃 인다.
오후 내내 어깨를 따갑게 내리쬐던 햇빛이 거치고
선선한 바람이 땀을 닦아주었다.
흰 도화지를 바꿔 새 그림을 그리듯
호도협도 코너를 돌 때마다 진풍경이 펼쳐졌다.
한국 드라마 광팬인 쑤이는 감명 깊게 본 작품을
열거하며 꼭 봐보라고 되려 내게 추천했다.
씬이는 쑤이한테 ‘언니’라는 한국 단어를 배운 후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종달새처럼 ‘언니~’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지하오.
그는 여행길 내내 유치원생 가르치듯 여러 상식을 알려줬다.
이를테면, 산양의 암수를 구별하는 법.
유채꽃의 기름을 짜서 먹는 법.
중국인들이 그림그릴 때 쓰는 돌 등을.
지하오는 내 얼굴을 마주 볼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저 낯선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까.
그에게서 스며들듯 느껴지는 낯익은 감정은
바람 따라 가볍게 흔들리듯
이따금 내 마음도 살짝 들었다 놓곤 했다.
3 중도객잔에서 만난 ‘그 음식’
옥룡설산에 쌓인 흰 눈이 붉게 물들 무렵.
드디어 여행객들로 활기를 띈 중도객잔에 닿았다.
‘중도(中渡)’라 불리는 이 작은 마을은
중국 전통 객잔마다 나무향이 은은히 베어있는
아담하고 조용한 쉼터다.
들뜬 표정으로 서로의 사진을 남기던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
우리도 덩달아 서로의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지하오와 씬이 남매가 머무는 숙소는
관광객이 북적이는 객잔보다 훨씬 높은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닥터 스트레인지>에 나오는 영화배우 ‘웡’을 꼭 닮은
숙소 주인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당신이군요. 우리 숙소 두 번째 한국인!”
긴 트레킹 끝에 지친 몸을 잠시 누이고
숙소 주인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가족 식당으로 향했다.
청경채 볶음, 토마토 계란 볶음, 감자채 볶음, 고기볶음.
윈난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소박한 가정식이다.
한창 수다꽃을 피우고 있는데,
‘웡’ 아저씨가 어딘가 뿌듯한 표정으로
주문하지 않은 음식 하나 더 내민다.
일주일 만에 마주한, 고향의 맛. 김치다.
“수년 전에 한 한국인 할머니가
우리 숙소에 몇 달간 머문 적이 있어요.
흰 눈이 막 나리던 초겨울에
우리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전수해 줬죠.
오늘 한국 친구가 왔으니, 서비스예요.“
감사한 마음에 허리 숙여 인사하고
김치 한 장 크게 찢어 입에 넣었다.
숙소 부부와 친구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내 반응을 지켜본다.
…어라, 김치 맞아?
알싸한 마라(麻辣)맛이 혀끝을 휘감는다.
“와… 정말 맛있는데요… 맛있는데…
도대체 왜 김치에 마라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
절규 섞인 황당함에
식당 안은 한바탕 웃음으로 뒤덮였다.
4. 별이 떨어진 밤 아래, 조용한 시작
“우화야, 별 보러 가자.”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던 오후 8시.
똑똑, 지하오가 숙소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문을 열자, 카메라를 손에 든 그가 씨익 웃었다.
일찍 지쳐 잠든 씬이와 쑤이를 두고
그와 함께 객잔 옥상으로 향했다.
지하오는 한평생 밤하늘의 별을
제대로 찍어보는 게 소원이었다며
잔뜩 들뜬 표정이었다.
그러나 먹구름이 잔뜩 낀 터라
아무리 카메라 밝기를 조정해도
렌즈엔 한 톨의 별조차 찍히지 않았다.
“지하오, 오늘 밤 별이 나타날까?”
"좀만 더 기다려보자.
아직 관광객들이 많아서 별들도 쑥스러운가 보지."
가게 불이 하나 둘 꺼지고
쌀쌀한 저녁 바람은 몸을 감돌았다.
옥상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셔터를 누르길 수십 번.
갤러리에 까만 사진만 쌓여가던 그때.
찰칵,
꼬리가 길게 흘러내린 불빛 하나가 찍혔다.
별똥별이었다.
“지하오, 나 별똥별 찍었어!”
방방 뛰며 자랑하자
그는 나보다 더 감동한 얼굴로
자신의 카메라를 보여줬다.
그 안엔
쏟아질 듯한 별빛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힐 듯,
수 천 번의 소멸과 탄생을 지나온 별들이
이 순간, 호도협의 산 능선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한바탕 사진 촬영을 마친 뒤
우린 근처 의자에 나란히 앉아 별을 올려다보았다.
고요한 바람소리가 잔잔히 흘러 침묵을 채웠다.
“우화야. 호도협에서 내려가면 어디로 갈 거야?”
“샹그릴라를 여행한 뒤 쓰촨성을 갔다가 후난성, 광저우를 갈 거야.”
“넌 혼자 여행하는 게 좋아?”
“누구랑 함께 여행하는 것도 좋고 혼자도 괜찮아.”
지하오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보다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나랑 같이 쓰촨성을 여행할래?”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장난처럼 던진 말일까, 아니면 마음을 담은 제안일까.
“왜, 너도 쓰촨을 가보고 싶었어?”
“응, 한 번도 안 가봤거든.
나도 회사를 이직하면서 한 달간의 시간이 생겼어.
씬이는 다음 주면 유학 중인 싱가포르로 돌아가고…
너랑 함께라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혼자가 되려 떠난 여행이었지만
리장에서 하나둘 연결된 수많은 인연들.
그리고 뜻밖이었지만, 어딘가 마음에 닿은 그의 제안.
마음이 다시, 깃털처럼 가볍게 일렁인다.
아직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하나가
천천히 나를 물들여 갔다.
그래, 뭐 어때.
그냥 친구끼리 여행하는 건데.
이 떨림쯤은, 그저 바람처럼 스쳐가게 두자.
“그래, 좋아. 같이 가자.”
하늘에 별은 총총 빛났고
부드러운 밤공기는 어깨를 살며시 감쌌다.
우린 다시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호도협에서의 짧고도 길었던 밤이
잔잔한 숨결 위로, 조용히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