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절벽 끝에서 함께 걷는 법을 배운 날-리장 호도협(1)
안녕하세요, 리우화입니다. 최근 다시 이직 준비를 시작하며 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가끔은 밤잠 설치고, 공허함은 불현듯 찾아오지만. 그럴 때마다 제게 조용한 위로가 되어주는 건, 여행의 기억입니다.
소수민족 할머니들이 장미꽃을 팔던 샹그릴라의 골목, 여유롭게 죽순을 씹어 먹던 청두의 판다, 흰 눈이 내리던 4월의 옥룡설산. 오늘은 그중에서도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자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야기, 리장 호도협 트레킹_입니다.
나는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릴 때의 축축함,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그 답답함. 등산의 정상은 늘 상쾌하지만 등산 과정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행은 늘 나를 낯선 도전으로 이끌곤 한다. 어찌 보면 내가 좋아하는 건 여행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나’ 일지도 모르겠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숙소 주인이 잡아 준 택시를 타고 호도협(虎跳峡, 후티아오샤)의 입구인 상호도협(上虎跳)에 도착했다. 막상 마주한 장엄한 산세에 살짝 겁이 났다. 동네 산도 제대로 못 타는 내가 여기서 홀로 1박 2일 트레킹이라니? 그래도 물러나는 대신 신발끈을 꽉 조여 맸다. 여기까지 씩씩하게 왔으니 매듭은 짓고 가야겠지. 옆을 지나는 말들이 힘내라는 듯 힘차게 푸르릉 소리를 냈다.
세계 3대 트레킹 코스, 호도협
중국 윈난성 리장과 샹그릴라 사이에 위치한 호도협. 장강(양쯔강)을 따라 걷는 총 16km의 세계 3대 트레킹 코스다. 이름은 ‘호랑이가 강을 뛰어넘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총길이는 16km. 소요 시간은 1박 2일 또는 당일치기도 가능하다. 난이도는 중상(초보 등산자도 가능).
일반적인 트레킹 코스는 ‘상호도협->(빵차 이동) ->나시객잔 ->28 밴드 ->차마객잔 숙박 ->장선생 객잔 도착’이다. 객잔은 현지식 게스트하우스를 뜻한다. 가장 고난도 구간은 28밴드로 약 1시간 ~1시간 30분 가량 소요된다.
오후 햇빛이 강렬한 편으로 아침 일찍 등산을 시작하는 게 좋다. 여름~봄이라도 아침은 고산지대라 춥기 때문에 얇은 긴 옷을 챙겨가야하며, 길은 흙먼지가 날리기 때문에 선글라스는 필수다. 또 28밴드는 길이 험준하기 때문에 등산스틱(현지에서 저렴하게 구매 가능)은 꼭 갖고가자. 길 중간에 매점이 없기 때문에 물, 간식 등도 미리 사 놓는 게 좋다.
길을 지나가는 말들과 몇 번 눈인사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머리에 흰 눈을 인 옥룡설산(玉龙雪山)을 마주한다. 협곡은 마치 대지가 찢어진 것처럼 깊고 거대했다. 깎아지른 절벽과 청록빛 장강에선 수 천년의 숨결이 스며 있었다. 대자연 앞에서 사람이란 존재는 한 없이 겸손해질 수 있다는 걸, 이 곳에서 비로소 체감했다.
순탄하게 이어진 길을 한 시간 여 걸으면 28 밴드를 예고하는 돌길이 나온다. 차마 객잔까지 이어지는 이곳은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28개의 지그재그 굽이 오르막길이 이어진다는 뜻으로, 호도협 전체 코스 중 가장 고난도로 꼽힌다.
바닥은 대부분 바위와 돌. 헛디디면 바로 절벽행이다. 출국 며칠 전 쿠팡에서 2만 원에 산 등산화는 무용지물. 수 차례 미끄러지며 주위 관광객들을 몇 번이나 놀라게 했다. 경사는 또 왜 이리 가파른 지! 수많은 등산객이 이 구간에서 포기했다는데 정말 고개를 올리면 절경, 숙이면 지옥이다.
28 밴드에서 만난 씩씩한 ‘쑤이’
헉헉대며 28 밴드를 통과하는데, 아까부터 형광색 바람막이를 입은 한 여성과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 중이었다. 얼굴을 보니 엇비슷한 20대. 바위에 앉아 쉴 때를 틈 타 슬쩍 말을 붙였다.
"너, 혼자 왔어?"
"응, 맞아. 보아하니 너도 혼자 왔지?"
"응. 아, 난 한국인이야! 발음으로 눈치챘겠지만."
"오?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와싸이!(哇塞, 대박!) 우리 같이 올라가자!"
그녀의 이름은 '쑤이'. 후베이성 우한 출신의 28살 직장인으로 회사 연차 내고 혼자 여행 왔단다. 인생 첫 혼자 여행이라는데 그곳이 호도협이라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인연은 늘 예고 없이 다가온다
쑤이는 한국 드라마 마니아였다. '어머 , 어머!', ' 오빠, 우리 이제 헤어지자', '제정신이야?', '보고 싶어' 등 여러 한국어 대사를 능청스레 흉내 냈고, 중국에서 대인기라는 <폭싹 속았수다>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들려줬다.
자백하자면, 나는 미디어에 영 어두운 편이다. 우리나라 드라만데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중국인을 알기 전에 한국 문화부터 공부해야 할 판이다.
27년 인생에 대한 회한마저 밀려 올 정도로 고단했던 28 밴드. 곁에서 씩씩하게 "走吧!(가자!)"를 외치던 쑤이가 아녔다면, 돌길 어딘가에 주저앉아 홀로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르겠다.
우린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어렵사리 28 밴드를 넘었다. 그리고 길가에 주저 앉아 장미꽃빵과 밀크티를 나눠 먹은 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길 중간쯤, 전망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니 멀리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20대 초반으로 되어 보이는 다섯 명의 청년들이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한껏 들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본격적으로 DSLR 카메라를 들고 온 모양이었다.
조용히 자리를 피해 다른 전망대를 찾으려는데, 쑤이가 먼저 다가가 카메라를 가리키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웃으며 카메라를 내려놓고 부드럽게 물었다.
"너희도 찍어줄까?"
그 남자의 이름은 '지하오'. 후난성 출신으로 한 살 아래 여동생 '씬이'와 함께 등산 중이라고 했다. 나머지 셋은 후베이성에서 온 '지아이', '준지에', '하오위'. 직장 동료 사이로 그중 한 명이 최근 퇴사해 작별 여행 삼아 호도협에 왔단다. 알고 보니 그 다섯 명도 같은 일행이 아니라, 모두 등산하던 중 만난 사이였던 것.
다섯 명의 친구들은 홀로 배낭 메고 온 조그만 한국 인에게 지대한 호기심을 보였다. 런닝맨에 푹 빠져 있던 준지에, 삼성 갤럭시를 쓴다며 요란하게 자랑하던 하오위, 그리고 내 중국어 실력이 신기하다며 눈을 동그랗게 뜨던 씬이까지. 마치 한국 홍보대사라도 된 듯, 태극기라도 들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우리 일곱은, 자연스럽게 일행이 됐다. 그들은 내 서툰 중국어에도 웃으며 끝까지 귀 기울여 주었고, 중국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명해 줬다. 나는 몇 마디 한국어 표현을 알려줬는데, 그들이 아무 때나 ‘오빠~’를 엉뚱하게 외치는 바람에 길 위에서 한바탕 웃기도 했다.
혼자 시작한 여행, 누군가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우다
우리는 물이나 간식을 나누고 숨이 찰 땐 서로를 기다리며 걸음을 함께했다. 지금도 호도협을 떠올리면 눈부신 설산과 경이로운 협곡보다도, 그날 길 위에 울려 퍼졌던 웃음소리가 가장 또렷하게 떠오른다.
여행지에서의 인연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리고 그 우연은 가장 잊지 못할 풍경이 되기도 한다.
얼마나 웃으며 걸었을까. 해가 중천에 기울 무렵, 굽어진 길 끝자락에서 민가들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다. 차마 객잔이었다. 계획대로라면 나는 이곳에서 하룻밤 묵을 예정이었다. 여행 전에 미리 방 예약도 마쳐둔 터였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중도 객잔 근처에서 머무는 모양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지하오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우화, 우리랑 같이 가자.
너 혼자 내일 등산하면 외로울 거야.
우리 숙소, 외국인도 괜찮대. 어때?”
원래의 나였다면 아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계획이 틀어지는 걸 싫어하고 혼자가 되길 원해 떠나온 여행이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엔 이 인연들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계획보다 소중한 건 지금 이 순간이란 걸, 호도협이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지하우에게 대답 대신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날, 나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달라지고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
_호도협에서의 이야기는 총 4편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