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중국 리장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새 인연들-리장(1)
2년 전, 혼자 중국 시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공항 안. 출국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우당탕하는 소음이 들렸다. 곧이어 공항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출국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有没有韩国人会中文? 这边有急事(중국어 할 줄 아는 한국인이 있나요? 위급 상황입니다!)“
깜짝 놀라 손을 들자, 공항 직원은 곧장 내 손목을 잡고 대기줄 뒤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한 중년 남자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고 그의 곁에는 한 여성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한국말로 “어떡해, 어떡해”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행히 대기줄에 있던 한국인 의사가 그의 상태를 진찰 중이었으나 공항 직원들과 소통이 전혀 안 되던 상황이었다.
“지금 가장 가까운 병원의 응급차가 이 쪽으로 오고 있어요. 걱정 말라고 이들에게 전해주세요” 나는 공항 직원의 말을 침착히 통역했고, 여성은 그제야 손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비행기 안에서 만난 다른 일행으로부터 그가 안전히 응급차 탑승까지 마쳤다고 감사 인사를 전해받았다. 그때가 중국어 공부 6년 만에 처음으로 ‘나, 중국어 배우길 잘했다’고 확신한 날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공부를 이어가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됐다.
그래서 그럴까. 중국 윈난을 여행하며 가장 행복한 순간이 가득했던 곳을 고르자면, 단연 리장이다.
오랜 시간 습관처럼 공부해 왔던 중국어가 다시 한번 진가를 발한 여행지였기 때문이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리장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위치한 낮고 하얀 단독주택. 2층 가정집을 개조해 숙소처럼 운영 중인 모양이다. 다팅(大厅, 거실)에 있던 여행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홍차를 타고 있던 숙소 주인 지엔궈(建国)는 호탕한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 哇,太开心了!你是我们这儿来的第三位韩国朋友! (너무 반가워! 여기 온 세 번째 한국 친구!)” 그의 말에 다팅에 앉아 있던 한 젊은 여성이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아, 오늘 밤에 한국인이 온다더니. 아가씨구나. “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한국어야? 나도 모르게 입틀막을 하자 사람들 사이 웃음이 터진다. 미국 교포인 민경 언니는 캘리포니아에서 미국인 친구들과 함께 여행 왔다고 한다. 지엔궈가 따라 준 홍차를 마시며 오랜만에 만난 동포(?)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나를 보니 오랜만에 한국에 가고 싶다며 옛 추억에 젖은 눈빛을 지었다.
“나도 중국어를 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 주인 분들은 영어를 못하시거든요. 차에 대해 조예가 깊으신 분들이라 나도 좀 말씀을 듣고 싶은데 아쉬워요. 아가씨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안고 귀국하시겠네요.” 민경 언니의 말에 나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와 본 듯 포근한 숙소, 멍멍이 둘 야옹이 둘, 동네 언니오빠처럼 살가운 숙소 부부. 그리고 여행 일주일 만에 듣는 모국어. 오랜만에 느끼는 가족 같은 온기였다. 그 덕에 고단했던 나도 오래간만에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니 아랫침대가 부시럭대는 소리로 요란하다. 침대 커튼을 걷으니 형광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큰 키의 여성이 화들짝 놀라 쳐다본다. “내가 널 깨웠니? 미안해, 아침에 시장을 다녀오느라. 네가 어제 늦게 왔다던 한국인이구나?”
나보다 8살 많은 루이위에쒜(芮悦雪). 지린성 창춘 사람으로 시솽반나에서 샹그릴라까지 도보 여행 중이라고 한다. 그녀는 불쑥 딸기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밀며 방긋 웃었다. “아주 달아, 맘껏 먹어!” 그녀는 숙소 주인하고도 친구처럼 한참 대화하다가 흑룡담 공원에 일광욕을 즐기러 간다며 가벼운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내가 머문 이 숙소는 유독 사람들과의 연이 많았던 곳이었다. 관광지에 자리한 유스호스텔이다 보니 룸메이트는 아침마다 바뀌었지만 그만큼 매일 새로운 이야기들이 스며들었다. 이날도 리장고성(丽江古镇)과 수허고전(束河古镇)을 여행하고 돌아오니 이번엔 간쑤 성에서 온 유쉔(雨璇)과 신이(欣怡)가 새 룸메이트로 들어왔다.
리장 첫날밤은 운 좋게 이 세 명의 매력적인 여성들과 밤샘 수다를 떨었는데 이게 또 재미다. 같은 나라라도 각 지역의 문화와 음식, 방언이 다르다 보니 서로에게도 궁금한 점이 많았다.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지역마다 여성들의 성격이 다른단 얘기였다. 쓰촨 성 여자들은 성격이 불같고 독립적이며 윈난성은 조용·순박하고 동베이는 화통하단 것. 그녀들은 내 성격을 묻더니 “털털한 너도 위치상 동 베이른(东北人, 동베이 사람)이지! “라며 까르르 웃었다.
여행에서 만나는 가장 큰 낭만은 이러한 ‘만남’이라고 믿는다. 이 넓은 지구에서 한 도시, 같은 숙소, 같은 시간에 만난 인연. 그 순간이야 말로 여행에 있어 가장 특별한 교차점이 아닐는지. 아름다운 풍경은 눈에 담긴다. 그러나 현지인들과의 대화는 마음에 남고, 그 순간들이 쌓이면 여행을 한층 깊어진다.
내가 만일 중국어를 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 놓고 진심을 나눌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에선 외국어 공부를 학생 땐 수능, 성인이 되선 자격증 취득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험에서 고득점을 취득하더라도 말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회화는 요령이 없는, 가장 솔직한 소통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 안녕‘이란 간단한 인사에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온도가 깃들어 있다. 말 한마디가 낯선 도시를 친숙하게 만들고 짧은 대화는 인연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언어는 때론 여권보다 더 먼 곳까지 우리를 데려다주는 도구가 된다. 그러니, 외국어는 배울수록 ‘하오하오(好好)’다. 낯선 길에서 나누는 소통의 낭만을 모두가 한 번씩 누릴 수 있길.
이 모든 만남이 지나간 다음 날, 나는 세계 3대 트레킹 명소인 후티아오샤(虎跳峡, 호도협)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내 삶에서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