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양의 스위스, 에메랄드빛 구채구에 가다 - 중국 쓰촨성(4)
1. 봄의 호수를 보러 가자
새벽부터 여우비가 내렸다. 해도 안 뜬 유스호스텔 창가 너머로 만두 노점을 차리는 아저씨가 보였다. 출근 준비에 분주한 투숙객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1층으로 내려왔다. 목에 캐논 카메라를 맨 지하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우린 다른 계절로 떠난다.
기차는 청두역을 떠나 주자이거우(九寨沟, 구채구)역에 닿는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얼음장 같은 공기가 양볼을 스친다. 해발 3400m 고원지대다. 4월 봄이 무색하게 기차에서 내리는 이들마다 털모자나 장갑을 챙겨 입었다. 이곳에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 황룡(黄龙)으로 향한다.
"봄의 크리스마스네."
선잠을 자다 안면을 감싸는 한기에 눈을 뜨니 창 밖이 온통 한겨울이다. 오색깔의 타르쵸가 팔락이는 거리엔 흰 눈 덮인 금빛 사원들이 즐비하다. 시베리아 털옷 입은 티베트족 주민들은 황소를 몰며 아침을 꾸리고 있다. 황룡에 도착할 즈음, 눈 녹은 설산 사이로 봄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길가엔 산양이 줄지어 걷고 노란 들꽃이 만개했다.
점심은 동네 식당에서 야크 고기 면 요리를 먹었다. 알싸한 고추기름 향, 기름진 육즙이 입안에 퍼졌다. 맞은편엔 볼이 붉은 티베트족 여자 아이가 한국말 쓰는 언니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你长得真漂亮.(너 참 예쁘게 생겼다.)" 칭찬 한 마디에 쑥스러운 듯 민들레 씨앗처럼 엄마 품으로 뛰어가던 아이.
2. 구채구(九寨沟), 신이 흘린 에메랄드 눈물
"동양에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는 아이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눈앞이 시리도록 찬란히 펼쳐진, 구채구(九寨沟).
에메랄드빛 호수에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거울처럼 투명한 물아래엔 오래전 쓰러진 나무가 고요히 비쳤다. 산기슭에는 짙은 녹색의 침엽수가 병풍처럼 서 있고, 호숫가엔 황갈색 잎을 단 활엽수가 초봄의 기운을 알렸다. 나뭇가지 끝엔 이름 모를 파랑새가 지저귀고, 다람쥐는 나뭇잎 더미를 파삭파삭 밟으며 사라졌다.
구채구는 ‘아홉 개의 티베트 마을(九寨)’이 있다는 뜻에서 유래됐다. 90년대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오색지해(五彩池)’라 불릴 만큼 다양한 색이 한데 모여 '자연의 팔레트'라 불린다. 보는 각도와 햇빛에 따라 색도 바뀐다. 감히 인간이 표현해 낼 수 없는, 천혜의 색이다.
신이 눈물을 흘리면 이런 에메랄드 빛일까. 맑은 물에 손 끝만 스쳐도 행운이 스며들 것 같았다. 걸음마다 멈춰 서서 한껏 숨을 골랐다. 차갑고 맑은 공기가 온몸을 스치며 숨을 깨웠다. 고개를 드니 첩첩히 겹친 푸른 산맥 사이로 하이얀 설산이 고요히 솟아 있다. 봄과 겨울, 두 계절이 한 앵글에 겹쳤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이 웅장하고 평화롭다면, 구채구는 신비로운 느낌이야. 동양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와닿은 적은 처음이야."
"중국에 이런 곳이 있단 걸 나도 처음 알았어. 고대 신화의 한가운데 들어선 것 같아."
"지하오, 오늘 신나겠네. 네 카메라가 드디어 제 역할을 하는 날이니까."
사진이 취미인 지하오는 연신 카메라로 풍경을 찍느라 정신없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풍경을 찍는 걸 좋아했다. 이를테면 호수 밑에 잠들어 있는 나무 밑동, 노을처럼 일렁이는 물결, 하늘 도화지에 가닥가닥 뻗어나간 나무줄기 등을. 그의 사진엔 평소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우린 한 동안 말없이 구채구를 카메라에 담았다. 예쁜 곳을 발견하면 쪼그리고 앉아 몇십 분이고 가만히 구경했다. 그리고 빗방울이 호수에 닿으며 생긴 라이테 같은 파문을 똑같이 촬영했다. 시간이 흘러 사진첩을 열어보니, 우리가 찍은 사진들은 매 장마다 복사한 것처럼 닮아있었다.
3. 원시의 자연, 투명한 폭포수
폭포를 보면 늘 마음 한편이 내려앉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유한하지만, 어딘가엔 영원히 흐르는 물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폭포가 자연이 인간에게 남긴 유산이라 생각했다. 무엇이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고 있단 걸 알려주기 위한.
이곳의 폭포는 빙하 침식과 석회질 지형으로 독특한 다층 폭포를 형성하고 있다. 그 덕에 구채구의 신비로움은 배가 된다. 웅장한 낙하대신 청아한 물소리가 차르르 들려온다. 폭포 주변의 잎 더미를 들춰 올리면 청둥오리 가족이 두둥실 이사를 가고 있다.
지하오와 감탄하며 걷다가 가방에 달려 있던 인형 키링이 폭포수 아래로 떨어졌다. 잡을 틈도 없이 키링은 물을 따라 멀리 흘러갔다. 멀리 흘러가는 인형을 못내 아쉬워하자 지하오가 웃었다. "저 인형도 여기가 좋나 봐. 그래서 주인도 버리고 혼자 여행가나 봐." 그의 농담에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인형도 나를 꼭 빼닮았다.
우린 구채구 호수 주위에 조성된 데크를 조용히 걸었다. 지하오가 작은 나뭇가지를 짚어 호숫가에 던졌다. 그 주위를 수 백 마리의 작은 물고기 떼가 인사하듯 빙글 원을 그리고 사라졌다. 그 천진함을 구경하다 문득 서울 생활이 생각났다. 여행이 끝나면 언젠가 돌아가야 할 나의 자리. 생각만 해도 마음이 갑갑해졌다.
"나도 저기 호수에 가라앉은 나무가 되고 싶다. 예쁜 호수 아래에서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누워 있고 싶어."
"그럼 다음 생에 나무로 태어나."
"그건 싫어. 재미없는 생일 것 같아."
"그럼 물고기로 태어나. 원하는 곳을 자유롭게 여행하면 되잖아."
중국에 여행 온 후로 삶에 대한 애틋함이 나날이 커졌다. 옥룡설산의 눈봉우리, 샹그릴라의 춤의 광장, 구채구의 푸른 호수. 배낭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영원히 깨닫지 못했을 삶의 자유와 낭만.
나는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안았다. "고마워, 나한테. 용기 있게 이곳에 떠나 온 나한테." 지하오가 웃으며 말했다. "우화, 넌 정말 용기 있어. 네가 대단한 사람이란 걸 한국에 돌아가도 늘 기억해."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너 역시 그렇다. 다음 생에 우리도 판다가 되고, 나무가 되고, 물고기가 되어 다시 만날까. 자연이 흐르는 한, 우리 인연도 그렇게 이어질 테니까. 폭포가 우렁차게 떨어져 폭죽처럼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무지개를 만들었다. 우린 너 나 할 것 없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4. 잘 있어, 청두. 고마웠어, 구채구.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 햇빛이 새어 나왔다. 우린 대학생 커플처럼 호수 앞을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고 영상을 촬영했다. 모든 순간이 마치 꿈속의 영화 같았다.
그날 나는 이따금 마음 한 구석이 시큰했다. 오늘 여행기를 쓰며, 이날 썼던 일기장을 펼쳐보니 적혀있던 한 문장. '수많은 세월을 겪고도 순간이 추억이 된다는 걸 못 버텨한다는 게.' 구채구의 시간 속에서, 나는 정말 행복했었나 보다.
"우화야, 언제 기회가 되면 꼭 한국에 놀러 갈게." 데크에 앉아 호수를 가만히 구경하다가 지하오가 말했다.
"좋아, 내가 서울 투어 시켜줄게. 홍대도 서촌도, 유명한 곳은 다 보여줄게"
"아니, 네 고향. 대전에 가고 싶어."
대전은 볼 게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고집하듯 말했다.
"그곳은 네가 태어나 자란 곳이잖아. 그 만큼 의미 있는 도시니까. 네가 자라며 먹었던 음식, 어릴 때 갔던 장소들, 널 세상에 있게 해 준 부모님을 만나고 싶어."
나도 몰랐다. 혼자 떠난 배낭여행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호수보다 더 예쁜 말을 듣게 될 줄은. 세상에서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단 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인생에서 처음으로 꾸밈없는 진심이 담긴 말을 듣는다는 건. 나는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 어깨에 기대 눈을 감았다. 호수 위로 햇살이 흩어져 윤슬을 만들었다.
그날 밤, 우린 충칭으로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러 다시 청두로 향했다. 충칭은 그와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지였다. 그는 계획대로 충칭에서 그의 고향인 광저우(广州)로 돌아가기로 했다.
오후 내리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우린 마냥 비를 맞으며 청두에서 매일같이 들었던 <成都>를 허밍으로 불렀다. 토독토독 내리는 빗소리. 하루하루 가까워지는 이별이 비로소 체감되기 시작했다. 자꾸만 울고 싶었지만 미소 지으려 애썼다. 아마 충칭에 가면, 정말 아이처럼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리우화의 여행지도
구채구는 장가계보단 한국인들에게 덜 알려진 숨은 여행지입니다. 다만 중국엔 '구채구의 물을 보면 다른 물은 볼 수 없고 황산을 보면 다른 산을 볼 수 없다'란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필수 관광지로 꼽히는 곳입니다. 특히 가을에 절경이 가장 근사해 최소 2주 전 입장권을 구매해야 합니다.
저처럼 쓰촨성 청두-구채구-충칭 순으로 둘러보거나, 구채구와 황룡만 패키지여행으로 다녀올 수 있습니다. 구채구 패키지여행은 각 여행사 별로 예약하면 됩니다. 예상 여행 경비는 항공권, 입장권 포함 2박 3일 기준 80만 원 안쪽입니다.
저는 아쉽게도 일정 이슈로 황룡은 다녀오지 못했으나, 자유여행으로 갈 경우 하루는 구채구를 즐기고 근처 숙박을 한 다음날 황룡을 여행하시면 됩니다.
청두에서 구채구를 가는 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관광버스(12인승, 45인승)를 타거나 고속기차를 타는 방법, 기사를 동행한 렌터카를 타고 두장옌을 건너가는 방법입니다.
관광버스의 경우 인승마다 가격을 달리 받고 8~9시간가량 소요됩니다. 기차는 주로 청두동역에서 출발해 황룡구채구역(2시간 소요)에 도착,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 다시 황룡까지 이동(1~2시간 소요) 해야 합니다.
구채구는 Y자 모양으로 나뉘어 있으며, 보통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왼쪽/오른쪽/가운데 루트(어디를 먼저 가든 상관 없음) 관광합니다. 관광차는 90위안(1만 7000원)으로 트립닷컴에서 예매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코스 > 진주담 폭포, 오화해, 판다해, 대나무해
왼쪽 코스 > 오채지, 장해 / 점심식사>낙일랑 중심역
가운데 코스> 낙일랑폭포, 코뿔소해, 호랑이해, 수정폭포, 수정군해, 쌍용해폭포, 갈대해
반드시 가야 할 곳은 3곳입니다. 오화해(五花海, 수십 가지 색이 물드는 호수), 낙일랑폭포(诺日朗瀑布, 무지개가 생기는 거대 폭포), 장해(长海, 해발 3000m의 고산 호수)입니다.
해발 2,000~3,000m 이상 지역이라 고산병 등에 유의해야 합니다. 성수기는 단풍이 전역에 드는 9~10월로 외국 관광객은 물론 현지 관광객도 몰리는 시기이나, 워낙 공원이 넓어 번잡하진 않아 아이, 부모님과 함께 방문하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