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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이부시게 Jul 27. 2024

너도 물들고 나도 물들고

내 인생과 닮은 김장

김치냉장고에 김장김치가 달랑 반 포기만 남았다.

오늘도 망설인다. 김치찌개 할까?

아니야, 가족들 모이면 김치부침개 한번 해 먹어야지!



게으른 일요일 아침.

“카톡”

‘이 시간에 누구지?’

‘언니, 문 앞에 김치 두통 놓고 갑니다.’

나의 손목 사정을 아는 지인의 문자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알았더라면 차라도 한 잔 할 건데,

그냥 간 것이 못내 아쉽고 마음이 쓰인다.


몇 해 전부터 허리와 손목이 너무 아파서 이젠 일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손목이 심하게 아픈 날은 숟가락 들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지인이 보내온 김치를 보니 추억이 돼 버린 김장하던 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와글와글~

김치 냉장고는 배 고프다고 난리.

배추는 “다른 친구들은 온통 노랗게 빨갛게 누렇게 물들었는데 왜 나만 초록초록하냐”며 “물들여 달라”라고 난리.

“워~ 워~~ 알았어! 알았어!

예쁘게 물들여 줄게~

엄마가 예쁜 물감 만드는 동안

넌 잠시  '저 바다에 누워~'(노래)

친구들과 놀고 있어.”


배추에 봉숭아 물 들일 시기가 왔음을 실감하며, 1년 농사인 ‘김장’이란 과제에 대한 부담과 1년 중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사라는 설렘이 교차하는 소리가 와글 거린다.


며칠 동안 태양 아래 드러누워 일광욕을 마친 빠알간 고추는, 한숨 자고 났더니 내 모습이 왜 이러냐고 투덜 대며

매운 내로 코를 톡 쏜다.

소래포구에서 사 온 생새우는 금방이라도 자기 고향으로 탈출할 기세다. 정말 세 녀석이 톡 튀어 탈출 시도를 했다.

“sorry. sorry. 너희들 집은 여기야~”

북어대가리 다시마 넣고 푹 고은 육수에 찹쌀풀을 쑤어 식힌다. 믹서기에서 한 몸 된 생강. 마늘. 양파. 무. 사과. 배. 이 녀석들은 순둥순둥 다행히 투덜대진 않는다.

오히려 은은한 향까지 난다.

액젓. 쪽파. 갓. 홍시도 끼어 달란다.

모두 한 몸 되니 예쁜 색깔의 천연물감 탄생!


물놀이에 지쳐 기진맥진한 배추를 침대에 한숨 재웠더니 기지개를 켜며 "난 언제 물들여 줄 거야?”라며 보챈다.

“봐. 봐. 색 예쁘지? 은행잎보다 단풍잎보다 더 예쁘게 물들여 줄게!” 배추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앞치마에도 옷에도 온통 양념투성이.

배추 속을 넣은 것인지? 유치원에서 물감 놀이를 한 것인지?


김장하는 날의 하이라이트는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로, 배추 속 어린 노란 잎에 김치 속양념과 굴이나 수육을 싸서 먹는 것이다.

배추 속 어린 노란 잎에 물감(김치 속양념) 칠하고 누런 낙엽(수육) 한 잎 얹어 돌돌 말아 입이 터져라 먹는 아들.

입가로 흘러내린 물감에 딸아이가 동생에게 “야! 너 입에 양념 묻었어!.”

그 말에 아들 녀석, 팔뚝으로 쓱 닦았는데 

얼굴이 노을로 물들었다. 

그렇게 가족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준 아들 녀석은

“배추가 물들여 달라니까 나도 물들고 싶어서 그런 거지”라며 넉살을 떤다.

연전의 김장 담그던 날을 떠 올리니 행복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내 인생과 닮은 김장.

더도 덜도 아닌 알맞게 잘 절여진 배추.

짜지도 싱겁지도 너무 달지도 않은 감칠맛 나는 양념.

절인 배추와 양념의, 최상의 배합으로

“이번 김장 대 성공이야! 엄청 맛있어!”라고

감탄사가 나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가!

  

내 안에 수많은 양념들(사랑. 신념. 지혜. 배려. 공감. 신뢰. 욕심. 번뇌. 좌절. 포기. 오해. 의심. 자책...)을 넣고 빼고 혁역*을, 반복 또 반복하면서 어떤 상에 올려도 나쁘지 않은, 괜찮은 맛의 김치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

나도 제법 예쁘게 물들어 가고 있구나!


*혁역: 고쳐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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