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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이부시게 Jul 16. 2024

즉흥연극

오늘 내 배역은 뭘까?


요즘은 맞춰 놓은 기상 알람보다 여명과 지저귀는 새소리가 나를 먼저 깨운다.

서둘러 연극 무대에 오른다.

각본도 없는 즉흥 연극 '오늘'에 캐스팅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배역은 무엇일지 설레는 아침이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초록색 책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눈에 들어왔다.

책을 꺼내 첫 장을 넘기니 그녀의 사인(sign)과 함께 그날의 일이 선명히 떠오른다.




지난해 가을,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었다. 마지막장을 덮는 순간 그녀를 만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신념이 너무도 확고한 빨치산(사회주의자)의 딸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특별한 부모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북토크에 참석하기 위해 책을 구입했다.

정확히는 사인(sign)을 받기 위함이다.


당일 아침, 일찍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게으른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씻고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는 내게 남편이 묻었다. “어디가?”

“오늘 정지아 작가 북토크 간다고 했는데...

내가 어디를 가든 늘 잘 다녀오라고 던 남편이 이날은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책 줄거리도 말했고, 북토크 간다는 것도, 사인(sign)을 받기 위해 책을 구입한 것도, 알고 있는 이 사람이 왜 기분이 상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가 안 보여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차 어디 있어요?”

“지하 2층 2열”이란 대답과 동시에 끊어버렸다.

화가 나 있는 남편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작가와의 만남을 포기할 순 없었다.

남편에 대한 불편한 감정, 120km를 달려야 하는 초행길에 대한 두려움등이 휘몰아쳐 가슴은 쿵쾅거렸다.

도서관은 규모가 꽤 컸고, 계단식으로 된 시청각실은 시간이 가까워 오자 빈 좌석 없이 꽉 찼다. 

그녀는 웃으며, 다 늙어서 뜬 작가라고 인사를 했다. 아버지를 한마디로 '평등주의자'라고 말한 그녀.

꾸밈없이 진솔하게 말하는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지막으로 각자의 책에 사인(sign)을 받기 위해 한 줄로 길게 늘어섰다.

ㅂㄱㅅ’이란 이름을 메모지에 썼다.

순간 나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ㅂㄱㅅ이 아니잖아!

난, 그 당시 갱년기와 함께 사춘기 소녀처럼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었다.

난 메모지를 다시 고쳤다.

나는 나일뿐’

메모지를 내밀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 없는 문구에 대한 질문 같았다. 

짧게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재혼하면서 그 집에 제 이름을 올렸는데, 다시 이혼을 해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어요"

“에이 뭐 그런 거 가지고...” 라며,

메모와 사인(sign)을 해 줬다.

빨치산의 딸이란 주홍글씨를 달고 살았을 그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나에겐 무척 힘든 삶이었다.


그날 정체성 혼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래! 난 나일뿐, 이름이 뭐가 중요해!

인(sign)을 받으려 줄 서 있던, 1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난 해답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해답을 더 찾았다.

인생은 연극이란 말을 수없이 많이 들어왔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인생은 연극이라 단정 지어본다.

오늘 나의 배역은 북토크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었고, 남편은 오늘 내 일정을 까맣게 잊고,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는 배역이었구나’라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 나는 각본이 없어 외울 필요도 없는

즉흥 연극의 주인공으로 살아간다.

그들도 모두 각자의 배역에 충실할 뿐이다.

상대방이 이해 안 가는 행동을 하든,

내가 슬프던 즐겁던,

‘오늘 나의 배역은, 저 사람의 배역은 이거구나!’라고 생각면 마음이 편해진다. 관대해진다.


인생은 즉흥연극!

오늘 내 배역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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