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내리던 지난 날에 나는 평소보다 이른 출근을 하기 위해 서둘렀다. 폭설 예보가 있었으나 말로 폭설이라고 듣는 것과 하늘에서 내리는 무수한 눈에 시야가 가려지는 것, 도로에서 무정한 차 바퀴에 갈려 검은 구정물이 축적되어 발목까지 올라오는 것은 달랐다. 아내가 일찍이 구비해준 장화가 아니었다면 난감한 출근길이 될 뻔했다.
평년의 기온을 훨씬 웃도는 날씨탓에 겨울의 시기를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하던 틈에 내린 눈이라 그런지 한참이나 의뭉스러운 대설이었다. 그러나 이내 들숨에 섞이는 겨울 공기의 향과 손끝을 저리게 하는 정전기가 흐리멍텅한 정신을 일깨웠다. 이들은 나를 몰아세우며 발 앞만 보느라 그런 것이라고, 멀리 있는 산을 보라고 재촉했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심한 척하면서 나를 굽어보는 겨울이 앉아있었다.
멀리에 앉아 꿈쩍도 않던 산은 어느새 나이를 먹었는지 백발이 쇠었다. 나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저 커다란 북한산이 나의 이마에 닿을 듯 고개를 길게 빼보았다. 그와 동시에 인동차를 끓여마시는 노주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쌀쌀한 외부의 환경에서 극대화되는 온기를 느끼고 싶어졌다.
노주인의 집에서는 끓는 물 속 기포가 위아래로 찻잎을 흔들어대는 동안에도 참잠에 꾸벅이는 노인의 모양새만 있겠지만, 나는 가장 먼저 아내의 뜨거운 체온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온기 하나 품지 못했을 것 같은 눈송이가 보송하게 쌓인 모습은 어째선지 아내의 품 만큼 따뜻하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마저 들게 했다. 이와 같이 겨울이 올 때, 추위를 떠올림과 동시에 포근함과 따뜻함을 기대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변증법적으로 추억을 이루어왔다.
거추장스럽다며 잎을 다 떨궈냈던 나무가 언제 살을 이만큼 찌웠는지 모르겠다. 나무에겐 지난 날들이 너무 더웠던 것일까, 이제야 시원한 눈으로 한 김 식히는 모습을 보니 나무는 진정 인내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 같았다. 겨울날의 완상을 이루는 눈은 나의 발과 코끝, 귀를 시리게 하면서 주머니에 들어간 손을 자꾸만 꺼내게 유도한다.
그리고 차가울 것을 알지만 따뜻할 것만 같은 눈의 보송함은 나의 기대를 배신한다. 새하얀 순백의 눈송이가 뿜어내는 입김에 나의 손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붉어지고, 붓고, 갈라진다. 처음 흩날리기 시작했을 눈의 두 번째 고향과 하늘에 오르기 전 흐르고 있었을 첫 번째 고향을 생각하니 손에 쥔 눈은 한 줌의 눈물이 되어 나의 손주름을 타고 땅에 떨어졌다. 나의 붉은 손은 맑은 눈물을 담지 못했고, 손을 펴보았을 때는 그자리에는 붉은 단풍만이 남아있었다.
단풍 위에 눈이 쌓였다. 작은 눈은 나의 단풍 위로 올라 앉자마자 지난 삶의 흔적으로 백골을 남기듯 한 방울의 물이 되었는데, 많은 눈들은 단풍 위에 쌓여 세 번째 삶의 터전을 만들어낸다. 가을의 끝자락에 떨어져야 했던 단풍에 생의 집착이 스며 비정한 추풍을 견뎌내고 살았기에 더욱 단단한 것일까. 갈라졌지만 붉고 질긴 단풍 위로 한 바구니 눈이 쌓여도 단풍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의 붉은 손은 곧 단풍 옆에 섰다. 나는 하얀 외투의 소매 끝으로 삐져나온 붉은 손바닥을 단풍에게 펴보였다.
"나도 단풍이다."
단풍은 대답이 없다.
"나도 고향을 떠나온 이들을 감쌌던 단풍이다."
나의 말이 허랑했던지 단풍이 자기 위로 쌓인 눈을 조금 털어냈다. 나의 붉은 손 위에서 눈들은 눈물이 되었지만 단풍 위에서는 이와 같이 눈의 형체를 유지하고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럼 나도 단풍이고 싶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눈은 단풍의 붉은 핏기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가을의 끝자락에 모두 떨어져야 했을 단풍은 붉게 빛나는 삶의 집착을 떠안고 살아남아 이내 눈을 감싸준다.
삶의 박동과 생에 대한 의지가 선혈같은 단풍 옆에서 붉었던 나의 손은 금새 하얗게, 노랗게 색이 돌아왔다. 하얀 눈을 끌어안으면 나의 손은 다시금 붉어졌지만 금새 눈은 유골이되고 눈물이 되어 흘렀다. 나는 흉내를 낼 수는 있어도 단풍일 수는 없구나.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야했다.
나도 단풍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붉은 단풍이 여전히 하얀 눈을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손을 다시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걸어갔다. 나의 무심한 척 곧게 나아가는 발걸음을 배반하는 고개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을 때 단풍은 여전히 붉은 손으로 눈을 감싸주고 있기를 바랐다.
올해의 겨울은 그렇게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