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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일 Sep 03. 2023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


평상시에 머물고 있는 숙소는 객실이 8개다.

2층으로 된, 단촐한 리조트호텔은 객실 면적보다 식당 면적이 훨씬 크다. 주변에 이렇다 할 관광지도 없고, 위치도 통과도로를 지나는 강변에 있다 보니, 정원을 잘 가꿔서 멀리서 외식하러 오는 것을 주된 목표로 계획한 것 같다. 사장님이 인근에 있는 방갈로 10개 이상이 있는 대규모 리조트의 총괄 매니저고 해서 여러모로 가까운 곳에 본인 것도 지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코로나 시즌에는 워낙에 이동이 자유롭지 않다 보니 호텔 자체에 찾아오는 손님도 별로 없고, 숙박하는 사람도 우리가 8개 중 7개 방을 두 달 정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코로나의 기세가 꺾이면서 해외여행객이나 인근 주민이 찾아오면서 우리가 장기투숙을 결정하기 전에 몇 개의 방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거나, 어떤 기간에는 전체 예약이 끝난 상황도 생겼다.

정확한 출장기간이 확정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여행자들은 누구보다 계획적으로 준비를 하다 보니 뜻밖의 숙소이동이 불가피했다.

전체 객실 만실의 기간에 어디든 갈 수는 있어 별달리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매니저가 사장님과 어떻게 이야기가 되었는지 지금 가격과 동일하게 옆의 리조트 호텔로 방을 잡아주겠다고 했다.

아마 우리 팀 인원 몇 명이 다른 도시로 이동해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우리마저 빼앗길 것을 걱정해서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리조트 호텔은 할인가로 하더라도 지금 있는 곳의 3배 넘는 가격이었다. 이런 곳을 같은 가격에 해준다고 한 결정도 고마웠다. 어차피 선 예약자가 있어 알아서 다녀오라고 해도 되는데 고객 유치 겸 우리를 신경 써준 것이다.

아침 일찍 대충 짐을 싸고 돌아오니 맡겨놓은 짐, 가지고 갈 짐을 호텔 직원들과 같이 차로 날랐다. 리조트 호텔은 불과 5분 거리. 입구부터 양쪽에 울창한 대나무숲이 이어지고 대나무숲을 지나면 숲 속에 집을 지어놓은 듯한 2층짜리 방갈로가 곳곳에 숨어있다.

우거진 나무, 높이 솟은 나뭇잎 사이로 여러 갈래의 빛이 쏟아진다. 시원하게 뻗어 늘어져 있는 잎이 큰 파초와 2층짜리 건물보다도 훨씬 높은 수 십 그루의 나무들.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일정하지 않은 각기 다른 나무들은 울창하고, 그 나무를 올라타고 등나무 줄기들이 천천히 커다란 나무를 움켜쥐고 올라가고 있다. 오솔길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자갈을 섞은 시멘트 블록으로 두 줄씩 땅에 박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게 가지런히 깔려있다.

아침의 따가운 햇살, 강에서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 어쩌다 오게 된 옆 호텔은 새소리들에 공기가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 명은 1층, 두 명은 각각 2층 방을 받았다.

방갈로의 나무로 된 계단을 올라가니 주변의 풍경이 모두 내려다 보였다. 앞쪽으로는 긴 연못, 그 앞으로 오솔길, 그 앞으로는 몇 채의 방갈로, 그리고 멀리 내다보이는 메콩강. 특이하게 정사각형의 평면 중 한 면의 벽은 전체 유리로 된 유리창이라 출입구도 유리문이었다.

잠금장치 역시 유리창 중앙에 열쇠구멍과 여닫이가 있어서, 유리창을 다 닫고 커튼을 걷으면 전면은 침대에 누워 오롯이 밖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완전한 휴식을 위한 공간, 침대 발끝에는 대나무와 짚을 짜서 만든 의자와 삼각 평면인 여러 번의 삼각기둥을 합쳐 만든 삼각 베개가 두 개가 놓여있어 팔걸이로 쓰든, 반쯤 누워 창밖을 볼 수 있게 되어있다.

바람 소리를 느끼고 싶어서 바깥쪽의 유리창을 모두 열고, 안쪽의 방충망을 치고 걸쇠를 걸고 대나무 의자에 누워 밖을 보았다. 바람에 쉼 없이 흔들리는 나뭇가지, 나뭇잎에 부딪히면서 만드는 바람소리가 웅장하다.

수십 미터의 나무들이 흔들거리며 만드는 소리와 움직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해야 하는 일이 몇 달째 나를 붙잡고 있는 상태.


주말마다 해보겠다며 금요일마다 바리바리 짐을 싸 오지만, 그때뿐이고, 평일의 뜨거움과 피곤함이 쉬이 가시질 않아 미루고 마루다 보면, 어느새 주말이 끝나 있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몇 년간의 주말은 일 때문이 아닌, 내가 언제 까지든 일을 하기 위해 자격증을 따려고, 시험에 합격하려고 전전긍긍하며 휴식을 모른 채 지나왔다. 합격하고 일을 다시 시작한 후에 찾아온 주말은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보낸 적이 많았다.

뜻밖의 시끄러운 소리는 가끔 멀리 지나가는 대형트럭소리 정도인 여기에서, 고요하게 메콩강은 쉼 없이 흐르고, 그 언저리에서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 바람에 부딪히는 커다란 나뭇잎들이 만들어주는 고요한 곳에서 있을 수 있는 날이 언제 또 찾아올까.

무릎까지 오는 길고 뾰족한 풀은 건물 모서리를 따라 줄지어 서 있고, 그 밖으로 한 마이 한 마디가 꽤 두껍고 튼튼한, 잎을 보지 않았다면 대나무로 보이는 야자수가 창틀 정도의 너비 간격으로 심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대나무로 만든 창문 같기도 하다.


선선한 바람과 후덥지근한 바람이 사방에서 분다.


나무를 깎아 만든 책상, 그리고 독특한 곡이 잡혀있는 나무의자, 나는 딱딱한 의자에 못 앉는데…

일을 하려고 어제 낮부터 노트북을 연결해 두었다. 전날의 작업일지를 보내 놓고 보고서 작업을 해야지! 하며 나는 점심을 먹으러 나왔고, 오후에는 오랜만에 마사지 예약을 했다.

미루고 미루기. 책상과 의자는 사실상 구식 맞추기 용으로 구석에 작게 만든 것 같았다. 여기에서는 일을 할 수 없음. 일하는 용도의 책상은 아니나, 호텔 직원에게 문의사항을 전달하기 위한 정도의 책상입니다, 를 여실히 보여주는 규모.

참파삭 어딘가에 깊숙이 숨어 있는 듯한 이곳은 오다가 딱 한 번의 간판 말고는 도로에서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다. 자갈이 깔린 길을 조금 지나야 광활한 리조트 부지가 나오는 이곳에 찾아온 사람들의 움직임은 차분하고, 여유롭다. 서두르는 기색도 없고 느긋하게 본인의 방 앞 테라스의 의자에서 한 참 앉아있기도 하고 대지 여기저기 구불거리며 가로지르는 자갈 블록길을 천천히 걸어 다니기도 한다.

갈퀴로 낙엽을 긁어모으고 벼를 심은 물 빠진 논을 정리하는 직원들도 천천히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새소리와 갈퀴로 바닥을 긁는 소리, 풀벌레 소리,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누군가가 바닥을 밟으며 자박자박 걸어오는 소리.

마디마디 진 야자수 나무창 사이로 보이는 익어가는 벼와 듬성듬성 서 있는 높은 나무와 나무 뒤로 숨은 아담한 방갈로 네 채와, 그 뒤로 펼쳐진 메콩강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만 있어도 시간은 한 시간, 두 시간 빠른 듯 천천히 흐른다.



달리기를 하면 5분이 억 겹같이 길고 끝나기만을 바랬는데, 지금 이 시간은 끝나지 않고 여기에서 멈춰버렸으면.


아직 햇빛은 따갑지만 그늘 아래 들어오면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하다. 게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바로 근처인데 여기에는 모기도 없는 것 같다. 무슨 차이일까?


방에서 바라 본 풍경
창틀처럼 심은 야자수
이제는 걷지 못할 자갈길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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