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상대방과 호흡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지금보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그 적극성이 독이 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세상의 경험치가 낮은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분야의 경험치를 상대방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내가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관심에 상대방은 행복했을 수도 있고 오지랖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늘 전자만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저 상대방이 행복하기를 기대했다. 세월이 지나자 교묘하게 처지가 바뀌는 일이 자주 생겼다. 상대방이 내게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격려하고 응원을 해 주는 때가 있었다. 처음 몇 번은 상대방의 관심이 좋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는데 곧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오래 흐르고 지금까지 내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니 지나치지도 무심하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의 관계가 대부분이다. 적당하다는 표현이 너무 애매해서 과연 어디까지가 적당한 것인지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적당함의 개념은 서로 시선이 마주칠 정도의 거리, 상대방 마음을 건드리기도 하지만 그저 곁에서 바라보고 지켜줄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적당한 거리다. 서로의 시선이 다른 곳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려 서로의 시선이 함께 마주칠 수도 있는 정도의 거리, 전화하면 시간을 맞추어 기꺼이 만나는 사이의 거리가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거리를 지키려다가 오히려 너무 멀어진 인간관계도 많다. 정말 배려하고 점잖고 아름다운 사람인데 어딘지 낯설고 멀어져서 불쑥 다가가기가 꺼려지는 사람도 있었다.
서로의 흰머리와 주름살과 중년의 뱃살과 가정에 고달픔은 당연하고 불쑥 찾아온 험한 질병을 그저 툭 꺼내 놓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나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애매한 사람은 늘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사람은 살면서 고통은 늘 있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고통이라고 받아들이면 인생이야말로 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재앙이 된다.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축복이므로 이 축복을 축제로 바꾸는 것은 오직 나의 선택뿐이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금 세상이 말하는 고통 안에 있는 사람은 내 생각과 너무 멀리 있다. 잠시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쓸쓸하고 외롭고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무조건 힘내라고 말하는 것은 그를 위한 응원인가 나를 위한 위로인지 어렵다.
서로의 거리가 너무 멀고, 멀었기 때문에 서로의 어려움을 지켜줄 수 없었으며, 다양한 이유로 그저 스쳐 지났기 때문에 남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긴 인생에서 지금 조금 손해 보고 살아도 된다. 이익이 되어야만 남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저 가만히 서서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이에게 훌쩍 다가가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오래된 지인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있다. 본인이 겪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질병, 사고, 죽음으로 인한 것이다. 사람의 처지는 모두 다른데 그 사람은 나의 소소한 안부가 싫을 수도 있다.
이럴 때 나는 조용히 그 사람을 생각한다. 천주교에서는 기억이 기도가 된다. 기억하고 기억하면서 그 사람이 잘 버티고 결국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준다. 그 사람이 마침내 넉넉해지고 마음이 남김없이 녹녹해져서 경험 많은 큰 어른이 되기를 기대한다.
큰 어른이 되면 지금의 고통이 상대방을 위로해 주는 약이 될 것이다.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그릇이 넉넉한 어른을 만나면 다친 사람은 비로소 숨도 쉴 수 있고 위로도 받을 수 있다. 고통 없는 성장은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