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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Jun 14. 2022

공포 그 자체였던 공황발작

우리 유치원에선 그 어떤 일도 순조롭지 않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구역감이 느껴지고 손이 떨리지만,

오늘의 공포는 지금까지 겪은 것 중 가장 어마어마해서 스스로도 크게 당황스러웠다.



지난번 휴직 서류를 제출할 때, 유치원에 들어오는 순간 숨이 막히고 나를 집어삼킬 듯 한 느낌에 굉장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번 연장은 고민도 하지 않고 처리기간이 걸리더라도 등기로 서류를 제출했다.


그런데 오늘 오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받지 않지만, 왠지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촉이 와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쪽은 내가 8개월째 치료받고 있는 정신건강의학과였다.

병원의 실장님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해봄님, 병원 측에서 진단서 상 날짜 기재에 오류가 있었어요. 직장에서 병원으로 연락이 와서 진단서를 수정해서 보내달라고 요청하셨는데, 본인만 받을 수 있는 서류라고 전달드렸어요. 직접 오셔서 찾아가셔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 네? 저희 직장에서 연락이 왔다고요? 저한텐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요???"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내 휴직 연장 건이고 내 진단서에 오류가 있으면 당연히 내가 해결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다.


"수정해서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직장은 처음이라 저희도 너무 당황스럽네요. 해봄님 혹시 오늘 방문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렇다.

우리 유치원에서 휴직연장 업무 처리 중 진단서의 오류를 발견했고, 그 사실을 휴직 당사자인 나에게

알리지 않고 병원에 연락하여 평소 교사들에게 시켜왔던 대로 수정해서 재발송을 요청하신 것이었다.


휴....

그저 병원에 창피한 마음뿐이었다.

진단서는 민감한 개인정보가 들어 있고 본인이 발급받기에도 굉장히 어려운 서류인데, 그걸 수정해서 보내달라고 하시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매일 유치원에서 각종 서류를 수정시키고 수정본을 또 수정시키는 게 일상이니, 수정본을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당연히 진단서에 오류가 있으면 정정해야 하고, 그 과정은 마땅히 휴직자인 내가 해야 하는 것인데!


유치원에서는 중간에서 힘들 나를 생각해서 병원에서 직접 받으려 하셨다고 해명하셨고, 그런 의도라면 마음은 감사하지만, 정말 받고 싶지 않은 최악의 배려였다.


평소의 나는 "일처리가 미흡하다"는 말을 듣는 걸 가장 싫어하는데,

내가 이렇게 창의적으로(?) 일처리를 못하는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게 너무나 부끄럽고 비참했다.

그리고 그걸 외부 기관에 들켰다는 건 더더욱 부끄러웠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휴직연장 처리를 해야 하니,

병원 점심시간 동안 온수매트 위에 누워 몸과 마음을 다잡고, 점심시간이 끝날 즈음에 맞추어 가서 진단서를 재발급받았다.


유치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어떻게 하면 그분들의 얼굴을 안 보고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현관문 아래 틈 사이로 서류를 넣고 딩동을 누르고 떠나자'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유치원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압도당하는,

그분들의 얼굴만 보아도 공황 증상이 올라오는 내 건강 상태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런 데

막상 유치원 대문 앞에 오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 뿌리를 내릴 것처럼 다리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공황 증상이 아주 심하게 찾아왔다. 역대급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고, 애플 워치는 심박수 경고를 보내고, 앞이 온통 흐리고 누렇게 보였다.


"나 지금 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겠구나.

일단 후퇴해야겠다."라고 생각했지만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고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호흡이 더욱 힘들어졌다. 나는 주저앉았고 눈앞이 흐린 상태에서 죽게 될 것만 같은 강한 공포를 느꼈다.


단순 공황 증상을 넘어 공황발작이 온 것이다.


내 우울증과 동반되는 불안, 강박, 공황에 대해 알고자 노력해와서 지금 느껴지는 이 숨 막힘과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발작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죽을 위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유치원 앞에 뿌리를 내리고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고, 주변에 내가 쓰러지면 거두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두려워졌다.


평소 우울증 환자답게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절대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 나를 아프게 만든 이 유치원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참을 주저앉아 호흡을 고른 후 거의 기어가듯이 유치원 건너편으로 건너가 교육실무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화장실 가는 척하고 몰래 나와서 이 서류만 전달해주면 좋겠다고 부탁드렸고, 다행히 그분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서류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거의 네 발로 기어가듯이 버스에 실려 집으로 가는데 눈물이 수돗물 나오는 것처럼 하염없이 흘렀다.


왜 아파서 휴직을 하는데 이 과정조차도 아플까

벌써 세 번째 진단서 처리인데 어쩜 한 번에 끝난 적이 없는 걸까


나는 유치원 때문에 이 병을 얻게 된 건데, 내 몸은 망가지고 내 세상은 무너졌는데, 여긴 그대로구나

나의 세계만 완전히 달라졌구나.


나는 열심한 죄 밖에 없는데,

큰 사건을 겪고도 보호받지 못한 것도 나인데,

그 와중에 말도 안 되는 몸으로 아이들 졸업까지 시킨 것도 나인데,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참담하다.

나는 아무래도 오랫동안 이 병을 돌보며 살아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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