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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Jun 14. 2022

우울증 약을 먹던 첫날의 기억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야 하는 일

정신건강의학과 초진 당일부터

나는 약물을 처방받았다.


약물치료 없이는 절대 치료가 불가능한 중증도의 우울증이라며,

먹고 싶지 않더라도 꼭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시던 의사 선생님의 단호한 눈빛과 함께.



처음 처방받은 약은,

아침에 먹는 플루옥세틴(항우울제) 작은 것과

수면 전에 먹는 리보트릴정(신경안정제)이었다.


평소 걱정과 의심이 많은 나는 당연히

이 약들의 이름을 초록 창에 검색해보았다.

역시나 줄줄이 나오는 부작용...


정신과 약물뿐만 아니라 모든 약들의 부작용은 많고도 많다는 걸 다년간의 약물 검색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정신과 약'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니 평소엔 가볍게 무시하던 부작용 내용들이 굉장히 심각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약을 받아온 첫날, 수면 전에 먹어야 할 리보트릴정을 삼키지 못했다.


그리고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10분 간격으로 얕은 수면과 깸 상태를 반복했으니, 차라리 안 자고 뭐라도 하는 게 나을 정도였다.


잠을 못 자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

정확히 짚자면 '우울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내일 아침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유치원에서 벌어질 일과 오가게 될 말들이 떠올라 아찔했다.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내가 사라지면 좋겠다고, 나는 원래 없던 사람이고 그래서 내가 죽어도 그 누구도 마음 아파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점점 길게 늘어지는 생각들이 무서웠다.

이러다가 내가 나를 해치겠구나, 그래서 이게 병인

것이구나.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내일 아침부터는 약을 먹어봐야지"


아침에 출근 준비를 마치고 경건하게 눈 딱 감고 플루옥세틴 한 알을 삼켰다.

그냥 평소와 똑같았다. 다행히 첫 처방받은 항우울제가 나에게 맞는 행운의 주인공이었던 거다.


"뭐야 정신과 약 별거 없네."


더욱 용기를 얻어 잠자리에 들기 전 아무렇지 않게 리보트릴정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서서히 약기운이 올라오더니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도 함께 멈춘 느낌, 내 팔다리는 종이인형처럼 팔랑거려 바르게 걷지 못했고,

 '어디 부딪혀서 다치기 전에 누워야겠다'는 생각에 마취총에 맞아 쓰러지듯 털썩 누웠다.


그리고 눈을 뜨니 네 시간이 지나있었다.

한 시간 넘게 자지 못해 왔던 내가 무려 네 시간이나!! 게다가 깊이!! 잠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래 이게 잠을 잔 거지!!!!!!" 4시간도 짧은 수면이지만 벅차도록 상쾌하고 눈빛에 힘이 생겼다.


마취총을 맞은 듯한 그 느낌은 약에 적응한 지금도 별로이지만, 원하는 시간에 잠들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고통의 시간이 줄어들었다.

항우울제는 먹기 시작하고 1-2주가 지나야 효과가 나온다고들 하는데 점점 용량을 늘려가니 이유 없는 눈물의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지금의 나는,

중증 우울증 환자답게 약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약을 놓칠세라 알람까지 설정해두고 복약하는 모범생 우울증 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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