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흐뭇함.
나는 예민한 기질로 태어났다.
덕분에 소리도 잘 듣고, 관찰도 잘하고, 눈치도 빠르다. 기억도 잘 한다. 그래서 자주 아프기도 하다.
성격은 바뀌어도 기질은 바뀌기 어렵기에,
받아들이고 장점으로 살리려 노력하며 지내왔는데
우울증에 따른 신체화 증상으로 인해 요즘은 매우 심각한 과민 상태이다.
그동안 유치원에서 일하느라 전혀 몰랐는데
오전에 윗 층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가 매일 들린다.
가족들은 그 피아노 소리가 희미하게 느껴진다고 하니 바로 윗집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에겐 굉장히 또렷하게 들린다.
나에게 오전 시간은 누워서 안대를 쓰고,
창문을 닫고 바르게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자극도 받지 않는 정말 쉬는 시간이다.
처음에는 그 피아노 소리가 정말 거슬렸다.
일단 피아노를 배우는 입문 단계이신 것 같은데 그땐 다 그렇듯이 한 마디를 채 넘기지 못하고 자꾸 틀리는 데다가,
피아노 입문 시기에는 성장이 더디니 매일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고,
한 음 한음이 다 들릴 정도로 나에겐 크게 들리고,
무엇보다도 이게 들리는 까닭은 내가 예민한 탓이니 어디에도 불평할 수 없었다.
매일 나만의 휴식시간에 그 피아노 소리를 듣다 보니 시간이 흘러 어느새 꽤 정이 들었다.
정이 들었더니 그 소리가 영 거슬리지만은 않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덜 틀리시는구나"
"빨리 늘지 않아 답답할 텐데 참 열심히 하시는구나"
"내가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에도 저랬었겠지. 지금은 정말 많이 성장한 거구나. 나도 많이 노력했구나"
어떤 곡인지 궁금해서 들리는 대로 초록 창에 '미미파솔 솔파미레 도도레미 미레레'를 검색해 보았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였다.
그렇게 누가 연주하는지도 모르는 피아노 멜로디를 매일 감상하다 보니 어느 날, 화음이 같이 들렸다.
코드로 왼손 반주를 함께 연주하게 되신 것이다!
한 손 연주에서 두 손 연주가 되었다는 것은 장족의 발전이 틀림없었다.
왠지 모르게 벅찬 느낌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코드를 하나씩 천천히 짚어가는 소리를 나는 흐뭇하게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조금씩 매일 쌓아 성장한다는 것은 정말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 아픈 몸과 마음으로 유치원 근무를 버텨내던 시절도 아이들의 경이로운 성장을 보며 해낼 수 있었나 보다.
나는 지금 건반을 누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손목에 힘이 부족하여 절대 한 곡을 완주할 수가 없다.
취미였던 피아노가 무리가 되는 셈이다.
지금은 무리지만 점점 나아지고 손가락과 손목에 힘이 생기면 '환희의 송가'를 연습해서
누구인지도, 몇 호에 사시는지도 모르는 그분에게 답가를 꼭 연주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