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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Jul 20. 2023

교사, 자살당하다

젊은 교사의 사망은 예상된 결말이다

꽃다운 나이의 전도유망한 젊은 교사가 죽었다.

그것도 자살, 자살한 공간은 자신의 교실

어제 고인의 소식을 접하고 처음엔 무너져 내렸지만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고 마음이 강해졌다.

그건 내가 먹은 항우울제 때문일까?

아니면 공무상 요양 중인 내 사례와 닮아서일까?


정신이 오히려 선명해지고 밤새 잠은 오지 않았다.

내가 고인에게 언니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고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고인의 고통과 죽음이 잊히지 않도록 하는 것.




*이번 글은 공무상 재해로 인해 휴직 중인

공립유치원 교사인 저의 ‘개인적’ 견해입니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편이다.

자살사고가 심한 적도 있었고

근무를 하며 자살사고를 가지고 일할 때도 있었다.

이 유치원에서 누구 하나 죽어 나가면
정신 차릴까?
내가 이 교실에서 삶을 끝내면
나는 죽어도 선량한 다른 아이들의 누명은
벗길 수 있지 않을까?

내 사건이 벌어진 지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사는 것에 여한이 없을 만큼 냉소적이다.

그저 죽을 이유도 살 이유도 없고 지금 살아있는 것.




극단적 선택이라고 하면 왠지 정상범위의 사고를

넘어선 수준에서 개인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렇다고 자살이 옳은 선택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살이 현재 상황에서 그나마 괴로운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떠오르는 ‘극단적 상황‘은

분명 있다. 단언컨대 교직에서는 많다.



고인은 왜 하필 교실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을까?

그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있다.

고인의 죽음에 억울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억울함이 교실에, 학교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고통받던 시절 가장 힘든 공간은 다름 아닌

교실이었다. 내 교실, 우리 반, 어찌 보면 사건 현장.

그렇게 불편한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자살하다니,

고인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에 몰렸다 해도 비약이 아닐 것이다.




괴롭히는 자의 괴롭힘 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하고,

도를 넘은 괴롭힘은 ‘민원’이라는 명목하에 귀찮은

행정처리의 일종이 된다.

민원이라는 이름은 아주 무섭다.

사소한 건의도, 사람을 죽고 싶게 만드는 행동도

똑같이 ‘민원’이라 불리고 같은 무게가 되니까.


민원이 무서운 이유는 또 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결국 교사에게 돌아온다는 것

그런데 누군가는 꼭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관리자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도

교육지원청이라는 교육을 지원하기 위한 기관도

임용된 교사의 고용주인 시도교육청도

분명 가지고 있는 권한만큼 책임도 무거운 자리인데

권한만 쏙 챙겨가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

그러니 교사가 책임지는 수밖에.


교사가 학부모의 민원을 어떻게 책임질까?

당한다. 그냥 당한다.

대부분은 죽지 않을 정도로 당하거나

운이 좋으면 나처럼 딱 죽기 직전까지 당한다.

고인은 운이 나쁘게도 죽을 만큼 당한 거다.




사실 교사는 ‘아동학대’라는 절대 만능 무기를 가진

학부모를 감히 상대조차도 할 수 없다.

업무를 마비시키고,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하고,

때리거나, 신변에 위협을 느낄 만큼 협박하거나,

다시는 교사로 살지 못하게 만들어주겠다며 명예를

훼손하거나, 거짓 사실을 언론에 제보하거나,

아동학대로 신고해버리거나,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고소장이 도착하기도 한다.


물론 민원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삶에 지장이 가도록 고통받는 교사가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점점 소극적으로 교육할 수밖에 없는 교사.

결국 피해는 민원 학부모의 자녀를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이 받는다.

이게 정말 자신의 아이를 위한 행동인가?

그저 귀한 자신의 아이를 남들보다 특별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화풀이는 아닌가?




교사는 학부모에게 처참하게 당한다.

그리고 다음 차례는 학교.

동료교사의 외면, 도와주고 싶어도 힘이 없는 동료,

오히려 교사의 부족함으로 몰아가는 동료,

은근히 교사의 개인 역량 탓으로 몰아가는 관리자

학교는 절대 교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학교가 더 괴롭히지나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교사는 철저히 혼자가 되고 큰 무력감에 휩싸인다.

해당 학교 공식 입장

해당학교의 공식 입장만 봐도 책임 회피에 급급하다

명목상으로는 고인의 명예를 위한 것이라지만,

불거지는 논란들에 대한 해명만이 존재한다.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딱 보면 알 정도로

전형적인 책임 회피 문장들이다.

고인의 명예를 위한다면 진상 규명이 먼저 아닐까?



교사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제 고인 관련 기사와 댓글을 보고 놀라면서도

감사했던 부분은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고인을 추모하고 교육현장을

비판했다는 점이다.

평소 학생을 때리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던

그 옛날 교사들을 거론하며 교사들을 힘 빠지게

했는데, 전혀 다른 댓글창 분위기였다.

세상과 우리 사회는 교사를 꿀 빠는 직업 정도로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이번 사건만큼은 아니어도

앞으로도 교사들의 수난에 이번 사건 반만큼의

관심만이라도 가져주면 좋겠다.





사실 지금까지 교사들이 자살을 하는 사례는 꽤

존재했지만 교사들 사이에서만 화제가 될 뿐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묻히기만 했다.

그런데 이번 고인의 사건은 ‘교실’에서 ‘젊은’

교사의 사망이라 세상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교직에는 웃지 못할 교직생활 팁이 돈다

“죽을 거면 학교에서 죽어라”

“집에서 죽으면 내 탓 된다”

순직 처리가 될 가능성이라도 열어놓으려면 학교

에서 죽어야 한다는 슬프지만 확실한 팁이다.




나는

고인의 사망이 충분히 예상된 인재라고 생각한다.

그저 피해자가 누구일지 특정되지 않았을 뿐.

충분히 예상된 인재였지만 아무도 막지 못했다.

사회도, 교육계도, 교수들도, 학교도, 동료들도,

그리고 공식 피해자인 나도!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인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교육현장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는 것.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져버린 교권과 공교육을

새 새명을 얻은 듯 되살리는 건 어렵겠지만,

적어도 소수의 인권 때문에 다수가 교육권을 침해

당하는 피해를 입지 않도록,

교사의 권위는 둘째치고 교사가 최소한의 교육을

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도록,

이번 사건을 접한 모든 이들이 꾸준하게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교사의 붕괴는 교육의 붕괴이며,

교육의 붕괴는 미래의 붕괴와 다름없으니까!


고인은 자살을 한 것이 아니다.
자살을 당했다.
명백한 사회적 타살이다.
고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번 사건에 대한 투명한 진상 표명을 촉구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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