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 인간관계
어느 순간부터 주변 사람을 늘리지 않기로 했다.
내 사람조차 잘 못 챙기고 있다고 생각해서.
은둔 임고생 시기, 칩거 중증 우울 시기를 지나며
내 옆에는 정말 내 사람들만 남았다.
아마 내가 전생에서 삼국통일 쯤의 업적을 이룬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만 남았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내 사람을 늘리고 싶지 않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내 병은 ‘다정’이다.
그렇다고 내가 누구에게나 편한 존재는 아니다.
사람들은 나를 처음 만나면 밝고 친절하며
개성 있는 에너지에 놀란다. 그리고 곧 알게 된다.
나와는 어느 선 이상 친해질 수 없다는 걸,
그렇다. 난 사실 굉장히 낯을 많이 가리고 경계한다.
타고난 기질에 성장하며 겪은 경험과 사회적 요인이
불을 지펴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한다.
보울비의 애착유형으로 치면 불안형에 가깝다.
생각보다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내 낡고 견고한 자기 방어라고 추측해 본다.
게다가 내 사람을 챙겨야 한다는, 챙겨주고 싶다는
무의식적 신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내 사람의 일이라면 흐린 눈으로 한없이 너그럽다.
공감하고 싶지 않아도 공감이 되고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이해가 되고
나에게 상처를 주어도 내 사람의 입장을 수용한다.
다정이 ‘병’이 되는 극단적 인간인 것이다.
내가 인생멘토로 여기는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주인이 밥을 굶겨도 꼬리부터 흔드는 강아지 같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무릎을 탁 칠만한 비유였다.
그때부터 거리 두기를 스스로 연습해 왔다.
사람들과 ’적당히 아는 정도로‘ 지내기,
다정을 퍼주고 싶을 정도로 경계를 낮추지 않기.
거리 두기를 할 수 없는 예외사항은 하나 존재했다.
바로 우리 반,
아이들을 그저 업무상 담당 유아로 여기고 싶었지만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매년 실패하곤 했다.
솔직히 정의 깊이는 매년 달랐지만,
아이들을 수료나 졸업시키고 나면 오래된 연인과
이별한 사람처럼 큰 상실감에 많이 힘들어했다.
그 상실감을 처음 겪던 초임교사 시절에는
수료식 날에만 몇 시간을 내리 울고, 퇴근하며 울고,
상실감이 몇 달 동안 지속될 정도였다.
다 키워놓은 우리 반에게 정 떼는 게 너무 힘들어서
교사 일을 못하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매년 깊이 정들고 이별하는 직업이라니.
다정인간에게 최적의 직업이지만 최악의 직업이다.
교사를 쉬고 난 뒤에는
우리 반 아이들만큼 존재 자체만으로 예뻐할 대상이
없어서인지 인류애가 마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미 내 주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게 사랑을
받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독자님들까지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주시니 사람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태도가 나에겐 당연했다.
하지만 인생은 절대 예상할 수 없는 것,
칩거생활을 끝내고 집 밖으로 나오니
나에게는 새로운 사회생활과 인간관계가 주어졌다.
굳이 정을 더 주거나 덜 주지 않고 지냈다.
난 더 이상의 내 사람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역시나 망각의 동물!
가끔씩 나도 모르게 훅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내 바운더리 안에 들어오면 내 사람이 되고
또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다정을 퍼붓는다.
대부분은 완전한 내 사람이 되어 다정을 나눈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 다정을 약점으로 보는 사람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빌런처럼!
나는 경계를 풀고 다정을 퍼부을 준비가 되어있는데
빌런의 등장에 당황한다.
당황하면서도 이미 풀린 경계는 다시 닫기 어렵다.
그렇게 밥을 주지 않아도 또 꼬리를 흔든다.
내가 인류애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사람을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낯가리는데 사람은 좋아!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의 매듭에서 고군분투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을 한다.
그냥 나 생긴 대로 편하게 이것저것 안 재고 다정 퍼부으며 살까?
다정하다 상처받은 게 어디 한두 번이야?
냉정해지자. 나는 내 사람만 챙기면 되지.
인간관계의 가지치기, 내게는 너무나 어렵다.
그중에서 열려버린 경계를 닫는 것이 제일 어렵다.
아, 인간은 대체 왜 사회적 동물인 걸까?
나는 작은 사회관계 하나에 왜 이렇게 예민할까?
나도 좀 둔하게 살고 싶다.
만약 예민함이 눈에 보이는 촉수처럼 붙어있다면,
다 떼어내버리고 싶다.
다정은 병이다. 내가 나를 힘들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