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봄 Aug 19. 2024

유아교육과 후회하나요?

후회 안 하고 싶었다.

삼십 년이 조금 넘는 삶 동안 가장 후회하는 걸

꼽으라면 단연코 ‘유아교육학과’를 선택한 것이다.

막연히 이 일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이 분야의 불합리한 상식과 문화가 너무나도 싫다.


더 싫은 건 결국 나도 이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것.

이 조직의 가스라이팅은 가혹할 만큼 사람을 작고

약하게 만드는데,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고작 태어난 지 3-5년 된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인

만큼 따뜻한 성품,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는 건

당연히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점이다.

유아교사는 타인과 공동체를 갓 인식하고, 세상에

적응해 가는 유아들에게 바른 모델이 되어야 하니까.


유아기인 아이들에게 가정의 울타리 밖에서 만나는

가장 모범적인 어른이 되어 주는 것.

난 그것이 유아교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고,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겠다고 나에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했다.


평소의 말과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아이들 앞에서

튀어나올까 봐 일터의 경계를 넘어 일상에서까지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바른생활을 요구했다.

하지만 ‘바름’에 대한 내 태도는 압박에 가까웠다.


내가 아프게 되고, 정신과에 다니고, 상담을 받고,

급기야 심리학까지 전공하게 되어서야 알게 된 건

아이들에게 괜찮은 어른이 되겠다는 것

이 쌓이고 쌓여 심한 강박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저 아이들 앞에서 그럴듯한 어른이면 되었다.

괜찮은 어른이라는 게 항상 웃으며 듣기 좋은 말만

하는 도덕책 같은 존재도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는 무조건 착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들의 권리를 싸워서라도 쟁취하는 게

아이들을 웃게 만들 수 있었다.




아이들이 싸우면 “싸우는 건 나쁜 행동이야.”라고 하지 않고 “싸웠을 때에는 서로의 말을 잘 들어주고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해. “
누구나 생각이 다르니 싸울 수도 있어.

이렇게나 아이들의 갈등에는 관대했던 나지만

그저 젊고 경력 적은 교사였던 나는 부당한 지시,

오히려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요구, 아이들보다는

부모님의 만족을 위해 진행하는 일에 순응했다.

조직에서 뭣도 아닌 내가 갈등의 불씨가 될 까봐.



내 무의식 속에는 괜한 갈등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잘못된 도덕의식과, 저경력 교사는 경험이 없어

‘부족하고’ ‘배워야 하니’ 관리자의 지시대로 얌전히

따라야 좋은 교사라는 유아교육계의 가스라이팅이

빈틈없이 차 있었다.


말 그대로 잘못된 도덕의식,

평균 연령이 젊은 교사들을 제 멋대로 부리려는

찌든 어른인 관리자들의 가스라이팅일 뿐이었다.





저경력, ‘착한 유치원교사’ 답게 순응하던 내 태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하면 아이들이 더 좋아야 하고,

교사로서의 효능감은 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학부모님께 사랑발린 말로 처신하는

기술만 늘어갔기 때문이다.

내가 교사인지, 베이비시터인지 헷갈리기 시작했고

내 교육 역량은 그대로, 오히려 퇴화되고 있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교사에게 교육 이외의 것들이 마치 의무인 것처럼

전해지면 불합리함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회의 시간에 내가 입만 열면 순식간에 싸해졌고,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으며 쌓아온 나도 몰랐던

논리로 관리자들의 요구를 속속들이 따지고 들었다.

꽂히면 끝장 보는 성격 탓일까,

심지어 퇴근 후에 우리 유치원의 불합리한 점과

부당 지시에 대한 증거, 내 요구를 뒷받침할 법령을

공부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알았다.


더 이상 이 조직에서 ‘착하고 좋은’ 교사는

될 수 없다는 걸.

정말 아이들에게만 좋은 교사이면 안 되는 걸까?

내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을 하는 걸까?


조직에게 좋은 구성원일지라도,

아이들에게 좋은 교사가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아니 근데 진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