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편히 미루다
11시 59분에 과제를 제출했다.
마감에 임박한 레포트 제출은 모든 학생들의 국룰이지만!
오늘은 과제 제출일인걸 알면서도 방을 청소하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엄마가 부탁한 라넌큘러스 하노이 한 단을 손질하고 누워있었다.
과제는 한 줄도 안 했지만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말의 죄책감 하나 없이 정말 끝내주게 미뤘다.
내 속도에 맞추어 살면 그게 평화라는 생각에
임용되고 나서 처음으로 ‘나 오늘 꽤 행복한데? 이래도 되나?‘ 싶었다.
유치원 교사는 그저 아이 봐주는 사람이 아니라
유능한 교사임을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강박적인 삶을 살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피곤하게 살았다.
그렇게 쫓기듯 살지 않아도 이미 유능했는데
그냥 내가 나를 유능한 교사라고 믿고 교실에
들어가면 이미 충분하고 더 이상을 바라면 다친다는
걸 몰랐다.
학부모들에게, 관리자에게 내 능력을 증명하겠다고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던 하루하루!
사실 증명은 애초에 필요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증명해도 유치원 정글에서는 홧김에 뱉은
‘아동학대’ 네 글자로 인간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요즘 부쩍 수업하고 싶고 교실이 그립고
상담심리 전공했다고 학부모상담마저 기대되지만,
기대에 속지 않고 싶다.
그냥 뭣도 아니어도 되니 천천히 내 속도대로
미룰 걸 다 미루면서 살고 싶어서 며칠 전 복직을
미뤘다.
사명감 뒤에 돌아오는 게 범죄 혐의라면 끝까지
미루고 미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되겠지.
복직 언제인지 묻지 않기! 왜냐면 저도 모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