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무엇을 했나요
휴직 2년 차,
작년에는 거의 집 안에서.
아니다 우리 집 내 방 내 침대 안에서 한 해를 보냈다.
올해는 그래도 나름 성장해서
아주 사소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나에겐 당연하지 않았던 일상의 일부를 누렸다.
한 해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뭘 했다고 연말.
올 해의 나는 무엇을 ‘해봄’ 했을까?
첫 번째, 휴학 그리고 여행
내 생에 첫 휴학이었다.
펑펑 놀아버리고 싶었지만 놀기에도 힘이 부족했다.
내 휴학은 진로 고민 때문이었다.
상담‘도’ 잘하고 싶어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한
교육대학원 상담심리전공.
하지만 막상 대학원을 다녀보니 수업은 재밌었지만
동기들은 상담교사 임용을 준비하거나,
학회 수련을 꾸준히 해나가는 모습이었다.
나는 학교라면 몸이 먼저 불안과 강박에 반응하는
교사가 되기 어려운 몸이었고
무엇보다 전문상담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교사’라는 직업과 ‘학교’라는 공간은 공포다.
그렇다고 상담사가 될 자신도 없었다.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상담자는 내담자의 전이를
받아내고 알아차려야 한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갖는 역전이도 마찬가지다.
상담자와 내담자가 주고받는 심리역동적 과정에서
내 심리적 병리, 결핍, 방어가 드러난다.
나는 아직도 내 병리를 직면하는 게 두렵다.
무작정 제주로 떠났다.
하도 자주 떠나서 친구들에게 제주댁으로 불렸다.
속세와 떨어진 기분.
그곳에서 육지의 고민을 비우고 새 생각을 채웠다.
교육대학원에서의 공부는
철저히 나를 알고 다루기 위한 것이다.
꼭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두 번째, 외상 후 울분
일명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pted. 외상 후 울분 장애는 덜 알려져 있다.
정신적 충격을 주었던 상황이 떠올라
괴로움을 겪는 점이 유사하지만,
외상 후 울분은 뭐랄까 화병에 가깝다.
부당함, 모멸감, 좌절감, 분노 등의 감정이
안 그래도 충격받은 나를 지배한다.
7월 18일, 서이초 선생님이 교실에서 자살하신 뒤
내가 겪은 정신적 역동이 외상 후 울분에 가까웠다.
내가 유치원에서 겪었던 매일의 좌절감들,
차마 동료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개 교사의 서러움,
무너져가는 몸과 마음, 금가고 있는 일상 수행 능력,
그렇게 더 이상 이대로는 살지 못하겠다는
거대한 압력에 깔려 움직이지 못하는 무력감.
나만 사라지면 모두가 행복할 거라는 큰 착각,
언젠가 직면해야 했지만 다시 느끼기엔 너무나
두려웠던 울분이 깊은 마음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무서웠고, 나 자신이 안쓰럽고, 고인이 안쓰럽고
마치 내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침체되었다.
그나마 일상생활하는 ‘척’을 할 수 있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최악의 상태로 돌아왔다.
학교에 가서 헌화를 하고, 집회에서 추모를 외치고
고인을 평화 속으로 예쁘게 보내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 고인이 나였을지도 모르니까.
세 번째, 투쟁
30년간 지지부진했던 케케묵은 카더라가 현실로
떠올랐다. 바로 유보통합.
유보통합이 정말 교육의 가치를 존중하고,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와 학교에 도움이 되었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교육공동체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당장은 눈에 보이는 게 없지만, 미래에 그 가치를
발휘하는 교육이 희생되는 정책이 전개되었다.
조만간 학교에서 교육은 사라지고 돌봄만 남을 지도.
몇 안 되는 소중한 활동시간을 쪼개어 투쟁했다.
투쟁했지만, 공동체 중 일부만의 투쟁은 큰 힘을
얻지 못했다. 몇 년 뒤의 유아교육을 상상하면 전혀
떠오르는 그림이 없을 만큼 막막하다.
그렇게 ‘유치원 교사’의 꿈은 완벽히 산산조각 났다.
앞으로도 투쟁을 이어나가겠지만,
이젠 내가 애정하던 분야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
유아교육의 교육적 가치를 완전히 잃지 않으려고
나를 위한 투쟁에 그치려 한다.
지쳤다. 나는 누군가의 구원자가 될 수 없고
구원자가 되고 싶어도 같은 사람일 뿐이다.
나는 나를 구원할 뿐이다.
해봄, 무엇이든
올 한 해도 결실을 이룬 건 없지만,
무엇이든 해보며 살아온 나를 격려하고 싶다.
내년에는 몸 사려가며 적당히 해보자!!
꼭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