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자살하지 말아주세요.
검정 티셔츠에 검정 치마,
옷장 속 깊숙이 들어있던 검정 가방을 꺼냈다.
검정 신발을 신고 나서 집어든 검정 우산.
오늘따라 내 머리가 갈색인 게 아쉬웠다.
1년 전 오늘
고통에 몸부림치던 한 젊은 교사가 죽음을 선택했다.
순직 교사로 인정받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무엇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 다들 짐작하는 눈치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사실은 없다.
밝히려는 시도는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아니겠지.
7월 18일.
여름방학을 코 앞에 둔 시기이자 급여일 다음 날,
이 시기면 교사들은 지친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영혼을 끌어모아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하지만 순직 교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어제 입금되었을 귀여운 급여도, 다가올 여름방학도
선생님에게 실낱 같은 희망이 되어주지 못했다.
잠시 출근을 하지 않는다고 벗어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생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빛나는 고인이지만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혼자가 아닌데 결국은 혼자인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으니까.
고인의 비보를 접하고 며칠 동안 이부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까닭은 죽음을 바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내가 떠올라 부끄럽고 아팠기 때문이다.
먼저 죽음을 생각한 나는 죽는 것이 고통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영혼이 까맣게 다 타틀어가 몸만 남은 껍데기의 삶
빈 껍데기로 사느니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이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했다.
힘들다고, 너무 아프다고 앓는 소리를 해댔지만
나만 힘든 게 아니기에 스스로를 작게 구겨 눌렀다.
그런데 그건 누르면 안 되는 마음이었다.
힘들다고, 너무 아프다고, 매일이 벅차다고,
그래서 차라리 죽고 싶다고
또박또박 말할 걸 그랬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던, 뭐라고 말하던 신경 안 쓰고
그냥 말하고 또 말할 걸 그랬다.
그렇게 했다면 누군가는
나만 죽고 싶은 게 아니란 걸
내가 약해서 죽고 싶은 게 아니란 걸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는 걸
죽기 전에 알 수 있지 않았을까?
교실에서 교사가 죽어나간 뒤에야
그제야 세상은 학교의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명무실한 규정이 몇 개 더 생겼을 뿐
교직은 달라진 것이 없다.
지금 교직의 누군가가 죽고 싶다면
자살을 시도하기 전 이 글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선생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은 죽어서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부디 살아주세요.
살아서 선생님의 말도 안 되는 고통을
세상에 알려 주세요.
돕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