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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의 추억

화순 금호콘도

by 자봉

올해도 어김없이 삼복더위다

어머님은 종갓집 종부로 아버지와 결혼하여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아버지께서는 현역군인으로 전쟁 중

전역이 되지 않아 7년 동안 군 복무를

하시면서 전쟁 중에 다리에 총상을 입어

전역도 하지 못해 신혼시절을 혼자

보내신 분이다


집안의 중매로 아버지와 결혼은 했으나

아버지는 군 복무 중이고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에게 시집와

농사일을 거두시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면서 시동생까지 학교에 보내시느라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셨다.


이렇게 고생만 하시다가 84세의 일기로

영영 오실 수 없는 하늘나라로 떠나셨기에 더욱더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


아버지는 제대 후 마을이라야 6~7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산골마을에서

천수답 농사만 지으시면서 가난에 찌들다 보니

어디 한번 제대로 구경도 못 가시고

너무나 많은 일 만 하시다가

이제 내가 생활의 여유가 생겨

효도 좀 할까 했는데 자식 곁을 떠나셨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어머님께 위안이 되는 것은

성실히 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 않고

나름대로 효도한 게 다행이다


화순 금호콘도를 가게 된 것도

직장에서 후생차원으로 1년에 2박 배정된

콘도를 사용할 수 있어서 13여 년 전

내 고향 근처에 중고 승용차를 손수 운전해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을 모시고

전남 화순에 소재한 “금호콘도”로

1박 2일 동안 함께 여행을 하기 위해

부모님께 같이 가시자고 말씀드렸더니

오로지 동생 아들 찬혁이만 신주님처럼 사랑하고 껴안고 계신 아버지는 여행을 가시지 않았다.

(고향과 어머님)


수 없이 어머님과 유치원에 다니는 여섯 살인 남동생의 작은딸 소정이를 내차에 태워

고향에서 화순 금호콘도까지 승용차로 내비게이션을

켜고 처음으로 화순 금호콘도로 향했다.

1박 2일의 어머님과의 첫 외박이지만

어머님을 모시고 1박을 할 수 있다는 들뜬 기분에 너무나도 행복했다.


참치 캔과 김치 쌀 감자 등 간단하게 두 끼 정도

해먹을 식량을 가지고

동생 작은딸 소정이를 데리고 3명이 프런트에서 방을 배정받아 콘도 안으로 들어서니

어머니께서는 【빈집에 웬 밥그릇과 수저 냄비 등 이 있다냐?】라면서 너무나 신기하고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봤다.

어머님께 “엄마! 이게 콘도라는 것” 이라면서 자초지종 자세한 설명을 드리고 나서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밥을 해 캔 참치와 감자조림을 만들었다.

집에서 가지고 온 김치와 김을 꺼내 어머니와 조카 소정이 세 명이 한 끼 식사를 맛있게 한 후 석양이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 넓고 텅 빈 주차장을 잘 걷지 못하는 어머님을 모시고 천천히 밤바람을 쐬면서 산책했다,


80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큰 딸과 아들 둘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고, 흰머리가 반백이 되어 슬픔과 고통 속에 사셨던 내 어머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터질 것만 같았다.


동생이 고향 읍내에서 밤늦도록 음식점과 요식업을 하기에 나이 어린 손자 3명을 보살피면서 무뚝뚝한

아버지의 평소 언행을 들으시며 평생 고생만 하셨던 어머니를 모시고 1박 2일 동안 외박 아닌 외박을 화순금호콘도에서 보냈더니 가슴 아픈 마음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깨끗한 침구류와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집에 모셔다 드린 후 아버지와 어머님의

건강이 걱정이 되어 읍내에 위치한 한의원에 모시고 가 진맥과 검진 후 보약을 한 첩씩 해드리니 자식 된 도리로써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동생은 사업을 할 때마다 실패해 버려 저도 모르게 아버지한테서 사업자금을 받아가 여러 차례 사업을 반복해서 시작했건만 계속 실패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워 부모님께서는 좁고 좁은 동생 월세집에서 손자 3명을 돌봐 주면서 80세가 지난 고령에도 불구하고 고생만 하시다가 한 달 전 오토바이 사고로 요양병원에 장기간 계시다가 치매와 노환으로 결국에는 세상을 떠나셨다.

똑같은 어머니에게서 7남매가 태어났건만 자녀들은 살면서 다 다른 생각과 이기심이 많은 동생이 있어 가정이 편할 날이 없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셨지만,,,,,


어떤 동생은 자녀만 많이 낳고 중학교까지만 가르치고 상급학교 교육을 시켜주지 않았다고 어머님께 몰래

대들다가 나한테 들켰는데 그때 어머님 모습이 너무 어두웠는데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 는

속담이 이럴 때 어울린 것 같았다.

.

딸만 둘이고 아들이 없다고 아버지께서는 장남인 나와 아내에게 【아들도 못 낳은 칠거지악】 『낫으로 목을 쳐버리겠노라』하시고, 그토록 장남인 우리 부부를 아들을 못 낳았다고 미워하고, 다른 자녀들 몰래 전. 답을 다 팔아 딸 둘 아들 한 명 낳은 남동생에게 아무도 모르게 수억 원의 재산을 팔아 주더니 남동생 부부는 사업한답시고 단란주점. 음식점. 다방을 객지에서 하더니만 우리들 몰래 부모님께 물려받은 전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그것도 부족해 조상님이 모셔져 있는 40 여기의 산소가 자리한 선산 임야 10개 필지도 네 살 먹은 남동생 아들에게 몰래 증여해 주더니 친권자는 동생 부인으로 해놓고 위장이혼 해놓고

결국에는 동생부부도 갈라서고 아이들의 친권자로 되어 있는 동생 부인은 아버지한테 증여받은 선산땅도 필지별로 측량해서 다 매도해 버려 화가 난 내가 동생부부에게 꾸지람을 했더니 협박죄. 명예훼손죄. 등 등으로 고소해 놓고



경찰서와 검찰청에서 조사받고 무혐의 처분받았더니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셔 장례비도 장남인 내가

부담해야 되고, 오로지 유교사상에 젖어 변하지 않은 우리 아버지는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는 아들이 없고 직장이 튼튼하니 아들 낳은 남동생을 도와주라” 는 억장 무너지는 말씀만 하시니 더욱더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님 생전에 정신이 총명하실 때에 항상 우리 부부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희 부부는 집도 깨끗하고, 너희 둘이 고생해서 부모 도움 없이 집도 장만하고 대단하다』면서 항상

우리 부부를 칭찬해 주었다.

이렇게 어머님이 우리 부부를 항상 마음에 들어 하시고, 칭찬을 해주시니 질투가 난 탓인지 여동생과 남동생들은 “왜. 엄마는 큰아들 부부만 칭찬하느냐”

면서 그렇게도 우리를 미워하고 질투하더니

어머님 돌아가시자 동생들에게는 문상온 친구나 동료도 없었고, 아직도 변함

없는 아버지는 100세 이상 사실정도로 건장하시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때문에 조상 대대로 내려온 문전옥답도 선산도 작은아들

한테 몰래 증여와 매도해 주더니 재산도 날려 버리고, 이제 와서 가정사에

지출될 돈이나 병원비는 고스란히 장남인 내가 책임져야 하니 누구를 원망

하리오!!

지인들과 친구들은 모두가 다 “장남으로 태어난 죄”라고 말하면서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다들 말한다.

아버지는 아직도 유교의식이 강해 아직도 7세인 남동생 아들을 하느님처럼

떠받들고 매월 지급되는 연금으로 남동생 아이들 핸드폰요금, 우유값, 학습지

요금이나 매달 내주면서 당신은 돈이 아까워 우유 한 병 사서 마시지 않은다고

동네 슈퍼 아저씨가 아버지를 찾을 때마다 저에게 전해준다.


이러하신 아버지께 겨울옷과 간식. 음료수들을 사드리면서, 때로는 화가 머리

끝가지 나지만 부자지간은 천륜이라고 하는데 인연을 끊을 수도 없고,

나 어릴 적에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우리 7남매를 키워주신 어렵던

시절을 생각하면 부모님께 효도해야 된다고 마음 다짐을 해본다.

어머니는 생전에 제가 큰아들이라고 가난한 형편에 보리밥을 먹더라도

한구석에 조부님과 저한테는 그래도 쌀밥을 먹이고 사랑해 주셨는데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어머니는 아무런 경제적인 힘도 없고, 통장도 없고,

돈 관리도 아버지가 다 하시다가 남동생 부부와 그 자녀들에게 다 주더니

마을과 문중에서는 아버지 흉을 보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래도 내 부모님인데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어린 시절 나를 사랑해

주셨던 부모님이신데.....

오늘따라 가을이 깊어가고 날씨마저 쌀쌀해져 가니 아버지 보다 돌아가신

내 어머님! 사랑스럽고 인자하신 어머님이 간절히 그리워진다..

자식들을 못 가르쳐 항상 고통과 아픈 마음으로 사셨던 내 어머니가 떠나셨으니 여름철 휴가 성수기에

어머님 생각이 자주 난다

(내. 결혼식때 혼주석에 앉으신 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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