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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자봉
Nov 02. 2024
나의 삶,그리고 고향
가난
1, 가난
가난 때문에 힘들었던 유년기와 학창 시절
보리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온 나의 어린 시절과 가난이라는 멍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무조건 참고 인내하면서
몸이 아프고 부서져도 앞만 바라보고 살아온 나의
70여 년의
세월을 생각하니
지나온 날들이
험난한
시간들이었다
지금은 보석 같은 인생을 살고
있지만 1
970년대
중반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치러 추첨으로 고등학교에 첫
배정되어 농촌에서는 돈벌이가 없었기에 무조건 힘든 농촌생활을
벗어나고픈 욕망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대
도시가 그리워 무작정 광주로 올라갔다ㆍ
서너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산촌을 벗어나
대도시의
생활은 학비를 제대로 납부하지 못해 툭하면
담임선생님의
특별
면담과 신문배달로 간신히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즐거워야 할 학창 시절은 돈이 없어 별로 추억도 없고
가슴 아픈 사연들만 쌓여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이면 비닐을 뒤집어쓰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엄동설한에도
젊은
학생의 옆구리에는 석간신문 100부를 허리에 차고,
무등산 증심사 쪽으로 운행하는 시내버스 기사분에게 신문 한부를 드리면서 무사히 배달을 마치고,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는 보급소에 나와
신문구독료를 수금하러 다녔던 새까만 40년 지난 추억들이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추억의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산중턱 양계장에 신문배달을 하고 내려오다가 불량배와 맞닥뜨려 “걸음아! 나살려라”라고 번개처럼 도망쳐 나오면서 폭력배로부터 간신히
피했
던 나의 고교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는 것도 잊을 수
없는
아픈
추억이지만
그 시절을 회상해 보면
보석처럼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힘들게 역경을 살아오면서 사회에 뒤치지 않고, 성공하고
잘 살아보기
위해
직장에 다니면서
늦게
대학과
대학원에 다녔으니 일과 학업의 병행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수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색되지 않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며, 열심히 변화무쌍한 삶의 한가운데서 변하지 않고 근검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온
나
에게 “그동안 정말 고생하고, 수고 많았다”라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다독여 본다.
2, 나의 고향
농촌이라기보다는 산촌에 가까운 대 여섯 가구가 옹기종기
집성촌을 만들어 사이좋게 살았던 내 고향은 서울에서
정남
쪽이라서
정남진이라고
불리는
남쪽
장흥이다.
경주이씨
종갓집 종손으로 태어나
10리 길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고향
에서 다니면서 같은 반
또래 친구도 없는 외로운 소년이었다.
초등학교에 등교하려면
비탈지고 마을도 보이지 않은 단웅국재를 넘어 푸른 수풀들과
나
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묘지들 옆으로 학교를
다닐 때에는
무서워서 울면서 학교를 다녔다.
고향이 워낙 산골이라,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은 외딴
마을이었기에
등유를 사용하는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글씨도 보이지 않은
교과서와 산수 문제 풀이를 하면서 검정고무신을 신고 보자기에
교
과서를 똘똘 말아 어깨뒤로
메고
비와 눈을 맞으면서 한 시간 동안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이렇다 보니, 비가 내리면 옷도 다 젖고, 눈이 내리면 행여 미끄러져 다칠세라 무릎 위까지 내린 하얀 폭설에 농사짓고 남은
볏짚
으로 새끼줄을
만들어 검정
고무신을
똘돌감아
메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10리 길을 우리
4남 3녀
7남매들이 다녔다
다행히
나는 종갓집 장손이고 종손이어서 힘들었어도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해
초가집에
사글세를
얻어
나무로 불을 피워
손수 밥을 해 먹으면서
학교에 다녔으니
고난의
유학생활이나 다름없다
지금처럼 교통환경이
좋았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열악한 환경으로
항
쌀과 반찬,
난방과 밥을 지어야 되기에
군불거리 나무들을 어머님은 토가리를 만들어
잔뜩 머리에 이고 외진 숲길과 오솔길을
걸어
삼정
마을까지 배웅해 주셨다
신작
로에는 포장되지 않은 비포장 도로에 한두 시간
이상 기다리면
덜덜거리는 완행버스가 도착해 30여분
동안
몸과 짐을 싣고 가다 보면 읍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었지!
이곳에 내리면 어김없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짐을 날려주고 돈을 받는
지게꾼과
리어카꾼
육중한 자전거꾼들이 어린 학생들과
운반비
흥정을 하고 자취방까지 함께 배달해 주었던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학창 시절은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생활이 즐거울 리가 없고, 도시아이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지만, 시골 아이들은 농사를 짓는 부모님 일을
도와 드리기 위해 농번기 방학이 별도로 있었고, 틈만 나면 공부보다는 논, 밭에 호미와 삽, 낫을 들고나가 풀을 베고 비료와 농약을 뿌리는 부모님을 도와주는 게 공부보다 중요했었다.
다행히도 남자이고 장남이라서 중학교에 진학이라도 했지만, 두 살 터울인 누나와 바로 밑 여동생은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농사짓는 부모님 일을 뙤약볕을 쐬면서 고생했다.
이렇게 고생만 하신 내 누나는 농촌으로 결혼을 해 농사짓느라고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50대 초반에 불치병인 혈액암으로
돌아가시고,
남동생 둘 마저 교통사고로 너무 젊은 나이에 하늘의
별이 되어 3남매와 이별했지만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고 애석하고 눈만 뜨면
누나와 동생들이
보고
싶은
그리운 내 고향이다
누나가 생전에 계실
때에는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꼭
시간이
생기면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과
누나와 매형을
모시고
맛있는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누나에게 많은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용돈이라도
자주
드렸었는데
. ㆍㆍㆍ
이제
70에 가까이 지다 보니
이 세상에 한 명뿐이었던
누나가 계시지 않으니 마음이 늘 허전하고
쓸쓸할 때가 참 많다 ㆍ
누나와 남동생들이 지금 살아 있었다면 다른 가족들처럼 우리 남매들도 자주 만나고 여행하고
맛있는 것 자주 먹으러 다니면서 웃고 떠들고
인생후반기가 참 즐거울 것인데ᆢᆢ
우리 3남매와 고향생각을 하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면서 눈물이 솟구친다.
그 옛날 온 가족이
오손도손
고향 초가집에 옹기종기
다
모여 다정다감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가을밤
밤하늘에
초롱초롱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을 바라보면서
저녁을 마당에 덮석을 깔아놓고 보리밥과 밀죽으로
소박한 저녁을 먹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세상사 살아가면서 한평생이라면 그리 길지 않은
50
년 전인데
이제는 그리운 부모
형제가 계시지 않은 고향
이지만 그래도 고향이 좋다
어차피,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지고 이별한다고 하지만,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조용하고
적막한 내 고향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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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
자봉
일상생활들을 글로 표현해 보는 소소한 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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