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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봉 Oct 09. 2024

당신


수많은 인연 쌓고 쌓아

우연으로 만나 필연이 되어

미운 정  고운 정 쌓여

40여 년 살아온 지난날들ㆍ


조용히 돌아보니 어언 칠순

곱던 얼굴엔 깊은 주름 깊게 파이고

하얀 서리 당신의 머리 위해

사뿐히 가라 앉았네ㆍ


종착지 모르는 남은 날들

아쉽고 안타깝지만

설레던 첫 만남을 기억하며

당신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ᆢ


이 시는 내가  2023년 8월호에 공무원연금지에 원고를 보내 게재된 당신 이란 시 다


대전에서  교회부설 유치원 교사로 재직했던 아내를

37년 전 추석날 고향에 내려가 시골에서 중매를 하시는

농촌 어르신들의 중매소개로 추석 다음날 친정아버지와 함께 나온 아내를 소개받아 누추한 다방에서  맞선을 봤다


오전부터 이분 저분 시간에 맞춰 맞선을 보면서

첫 여성부터 일곱번째 여성까지 대충대충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맞선을 보고 끝냈다


맞선도 다 끝나고 집으로 오기 위해 터미널로 가고

있는데 내 어머님이 딱 눈에 들어오는 처녀가 있어

아내를 소개하는 중매하는 분에게 다가가 다짜고짜로 성사가 되든 안되든 우리 아들과 한 번만

맞선을 보게 해달라고 하여 계획에도 없던 맞선을

추가로 봤다

아내는  맞선 순서 여덟 번째로 터미널 근처 다방에서 맞선을 봤다


처음 보는 순간 아내는 키도 크고 날씬해 내 마음에

들어 푹 빠지게 되었다

공직생활을 한지 얼마되지도 않은 나는 부끄러움과

수줍음으로 마음에 드는 아내에게 말도 제대로 못 했지만 장모님께서 여기저기서 사주를 보니 궁합도

맞고 관록도 있다는 사주에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장인

어르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위로 선택해

맞선을 본 지 넉 달만에 결혼식을 시골 읍내 고향에서 올렸다


결혼식은  올렸지만  고향 초등학교 동창의 끈질긴 부탁으로 직장동료들에게에 돈을 빌려 급장이었던 동창에게 돈을 빌려 주고 보증을 서주었는데

동창은 계획적으로 사기를 치고 돈을 갚지 않고 도망가버려  보증인인 내 월급에 압류가 들어와 매월 봉급도 제대로 못 받았다

30세에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니 신혼생활은 달콤했지만 경제적으로는 너무 어려웠다


직장은 경기도 양평이고 가정은 경기도 부천으로

이른 새벽 5시에 일어나 전철을 타고 청량리역에서

출근 열차인 비들기호 완행열차를 타를 타고 출근했다


신혼집이라고 해봐야 지금처럼 수세식화장실이나 샤워기도 없는 타이루로 만들어진 부엌과 연탄불을 난방연료로 사용하던 시절에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600만 원짜리 단칸방을 전세로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지만 비가 오면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져 바케스를 여기저기 설치해야 했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빗물이 스며들어 벽지와 천장에는 곰팡이가 까맣게 생기고 첫 딸이 태어나 가정에 축복을 주었지만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울면 옆방에 살았던 주인집

아주머니는 아이 좀 울리지 말라  고 화를 내고.


옥상으로 아이 기저귀와 세탁한 빨래를 말리기 위해

오르락거리면 싫다고 싫은 소리와 화를 냈던 주인집의

안방마님 눈치에 전세살이 1년을 하다가 집값이 저렴한 인천 주안역 근처에 5층짜리 조그마한 평수 아파트를 은행에서 장기 대출을 받아 생전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했다


주인집의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 집은 장만했지만

매월마다 대출금 갚고 생활비를 사용하려니 항상 돈이

부족해 재래시장이 끝나갈 무렵 가격이 저렴해지면

아내와 함께 시장을 보러 가서 정말 값싸게 생필품을

구입했다


그 당시 공무원들의 봉급은 박봉으로 대기업 직원들의

봉급 절반이나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월급이 박봉인 남편을 만나 자녀 둘을 키우니

아내는 얼마니 힘들어했을지 짐작이 된다


살아가고 자녀들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나와

아내는 택시도 타지 않고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니면서 근검절약해서 저축을 했다


시간이 생기면 부업을 하고 자동차도 구입하지 않고

오직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래도 빨리 내 집을

장만했으니 은퇴 이후 여유로움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13년 전에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해 두 자녀들을

종종 출근도 시켜주고 아내와 같이 브런치카페도

다니면서 노후를 보람 있게 살려고 하지만

젊었을 때 우리 부부가 너무 많은 고생을 한 탓인지

이제는 툭하면 병원에서 오라고 부른다


결혼 후 열서너 번의 이사와 시간이 생기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부업을 하면서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뒷바라지했더니  학교와 유학 중에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공부를 하더니 두 자녀들이 회계사와

언론사에 취직이 되어 내가 하고자 했던 기자가 되어

부지런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래도 노후에

자식복도 마누리 복도 있나 보다


힘들었어도 내색하지 않고 집안일과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를 생각하면서 당신이란 시 도

써보고 글도 써 보면서  인생 끝나는 날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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